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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 사탕통/팝핑 캔디

[올캐러+슈미카][미완] Space Oddity

by 료밍 2020. 12. 13.

원래 슈 생일 축전으로 쓰려고 한 것이지만 기한 못 맞추고 한달 넘게 방치되고 있던 것. 아마 미카 생일날 축전 쓴다면 같이 올리거나 하지 않을까 싶음.

슈미카 전제의 올캐러물. 슈미카 이외의 관계성들은 논커플링입니다.

 

 

당신을 위해, 나를 녹여 빛나는 초가 되리.
영문 모를 이유로 경원시되던 사람이 있었다. 또는 주제넘을 정도로 사랑받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왜 경원시되는지를 알았고, 제 주제도 잘 알았기에, 적의든 선의든 많은 것에 분노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주는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것은 이국에서 쓸쓸히 맞이할 뻔 했던 그의 생일날, 그런 때의 이야기다.


가을의 허공은 구름 한 점 없이 깔끔했지만, 점점 건조함을 품어가는 바람이 머금을 한 치의 습기조차 없어 쌀쌀했다. 몸을 덮는 옷가지가 길어지고 또 두터워지는 이국의 계절을 등지고, 천만으로는 불완전한 온기를 코트 속에 품고서 남자는 고향의 변한 계절과 다른 하늘색을 맞이했다. 지금껏 생활해오던 파리보다는 따스했다. 겉옷을 입기엔 조금 더운 날씨라 코트를 벗어 팔에 걸면, 선선한 바람이 퍽 쾌적했다. 그러나 그런 날씨와는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은 예술가 이츠키 슈의 포부를 담기엔 좁고도 답답한 땅이었다. 평소에도 결코 범인은 아니었던 – 그는 자신을 범속한 자들과 구분짓는 안목의 소유자라 늘 자부해왔지만, 그와 세간을 먼저 구분짓기 시작한 건 자신이 아님 역시도 잘 알았다 – 그는, 동아시아 특유의 꽉 막힘과 불관용이 없는 타지에서 잠시간 숨통을 트고 있었다. 명석한 머리는 이국의 언어를 쉽게 몸에 배게 했고, 비록 이방인을 향한 차별의 시선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방인'이 아니라 단순히 '괴짜'에 대한 관용만큼은 몇 가지 불편을 웃돌았다. 그런 사회가 슈에게 기묘한 안정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그곳의 식사가 입에 정말 잘 맞았다. 근처의 슈퍼마켓에서 양질의 치즈를, 집에서 5분 거리의 빵집에서 갓 구운 빵을 매일 사 먹을 수 있는 식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웠다. 이 기쁨을 고국에 있는 파트너, 카게히라 미카에게도 선사하고 싶어서, 세관에 걸리는 식품이 무엇인지는 항상 꼼꼼하게 체크했었다. 기왕이면 여기서 같이 살아도 좋겠건만, 미카에겐 자신 말고도 그 땅에 소중한 것이 많았으니 무리는 시키지 않으렷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처럼 외국 생활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니까. 한편으론, 슈가 이 땅을 몇 번이고 밟는 것 역시, 이 사랑스런 파트너가 존재하고, 그이와 함께 무대에서 만들어갈 가능성들이 조금이나마 이곳을 덜 염증 나게 만드는 까닭이었다.

그는 문득, 답지않게도 자신의 팬 한 사람을 떠올렸다. '중학교 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라고 말한, 소녀인지 소년인지 알 수 없었던 이. 라이브하우스를 거점으로 인디즈 활동을 하던 시절에도 자주 찾아왔었고, 몇 번이고 미카가 진행하던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왔던 것도 기억한다. 말하는 화제와 사용하는 닉네임의 느낌으로 어렵지 않게 동일인물임도 알 수 있었던. 그 팬을 유독 기억하는 이유는, 먼저 눈에 띄는 패션 때문이었다. 특유의 매니악하고 '고귀한' 분위기를 경전처럼 떠받드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던 Valkyrie의 코어팬들은, 공연이나 행사에 갈 때도 특유의 드레스 코드를 갖추곤 했다. 그들의 상징과도 같은 와인 레드를 기조로 한, 정숙한 정장부터 화려하지만 색조는 중후한 로리타 패션의 드레스까지. 벨벳 커튼과도 같은 진홍빛의 물결 사이에서, 마치 다른 세계의 주민인 것마냥 알록달록한 파스텔 톤의 복장을 한 이였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그가 라디오에 보내는 사연이 지극히 일상적인 것과 가끔은 기이한 것을 오가서였다. Valkyrie의 분위기를 의식해서인지 팬들은 주로 자신의 예술적 안목과 때로는 허영을 검증받으려는 시도를 해 왔지만, 이 팬은 지극히 사소한, 시답잖다고까지 할 수 있는 일상을 늘어놓았다. 많은 것들은 보편의 레벨에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는, 어딘가 평범해보이는 이야기인데도 특유의 동떨어진 느낌을 피력하는 사연들이 있었다. 미카는 그런 것들에도 물 흐르듯 답변을 해 주었고, 슈는 남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이 사연들에 기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러고보면, 그는 중학교를 일본에서 다니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타지 생활을 해 보니, 슈는 그 팬이 했던, 그때가 행복했다는 말을 이해할 것만 같았다.

홧김에 옆나라 이탈리아로 떠난 슈의 고등학교 동창, 세나 이즈미는, 우여곡절 끝에 겨우겨우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고는 삶의 고충을 토로하곤 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지 알았다고 슈에게 말했더랬다. 일 때문에 피로에 찌든 채 일본으로 귀국했을 때, 공항노숙을 결행하면서 공항 의자에 앉아 나눈 대화였다. 아마 이즈미의 외로움은 피렌체행의 동지였던 츠키나가 레오가 도로 일본으로 가버린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그 말을 본인에게, 그리고 고향의 동료들에게도 해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라고 말해준 기억도 어렴풋하게 난다. 그 짧은 순간을 회상해보면, 슈도 마음 한 구석이 찔리는 것이었다. 자신의 주변에도, 분에 겨울 정도로 좋은 이들이 차고 넘쳤으니까. 당장에 제 파트너인 카게히라 미카부터가 그랬고. 그것이 제게 배타적인 세상과, 그 속에서 늘 어떤 종류의 위화감을 품고 살아가는 자신을 견디면서, 조금이나마 숨통을 틀 수 있었던 이유였다. 비록 자신은 생존을 명목으로 그들에게 가시를 세운 배은망덕한 인간이었다면, 그들이라도 없었다면 정말로 절망해 인간의 도리를 저버렸겠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에게 엄격한 그로서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마 그렇게 자신에게 일말의 핑계를 용납하는 순간, 슈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더욱 세게 채찍질할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에게 '어쩔 수 없는' 부분은 있었다. 슈는 프랑스 생활에서 자유를 느꼈고, 비록 그리움도 외로움도 있었다지만 향수병으로 고생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이 자신과 옛 동창의 차이였다.

몇 명의 선의만이 이 땅의 모든 사람을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 사이에서 이츠키 슈라는 인간은, 그 자신이 세운 엄격한 기준들과는 대비되게도 세간의 엄격한 기준으로부터 탈락한 인간이었다. 또래 남자아이들이 아무도 그러지 않을 때 인형놀이와 자수 놓기가 더 좋았던 어린 시절부터, 하필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도 카게히라 미카와 사랑에 빠지고, 이해받지 않는 이들에게 닿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게 무대에 서는 이유 중 하나가 된 지금까지, 그는 자신이 공중을 부유하는 이물임을 체감해왔다. 한때 누구보다도 범속한 이들을 얕잡아보듯 말하던 소년은, 사실 자신에게 '평범'이란 오래전에 단념한 무언가임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면 몸 곳곳이 아려오기 때문에 그는 대단한 사람이 되었고, 그 강박에서 자유로워지기까지는 오랜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그에겐 다른 기준이 필요했고, 자유와 혁명의 나라는 그 별명답게 고국에선 울타리 밖 인간이자 이국에선 디아스포라일 그에게, 그 정도의 자유는 허락해주었다. 아무튼, 이즈미는 슈에게 어떤 동병상련이라도 느낀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슈는 세나 이즈미가 생각하는 종류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하리라. 강박도 완벽주의도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비슷할지언정, 틀을 만들어 그 안으로 숨을 수 있었던 세나 이즈미와, 틀 안이 전혀 안전하지 못했던 이츠키 슈의 불안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이상한 아이'를 지나, '기인'을 지나, '이방인'이 되었을 뿐이다. 자신은 늘 그럴 것이니까.

비행기에서 내려 칸사이 국제공항의 익숙한 억양들 – 아마, 그것 역시 미카의 영향이겠지 –을 배경음 삼으며, 슈는 스마트폰의 비행기 모드를 풀었다. 밀린 연락들이 하나둘씩 알림이 되어 화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변함없이 사랑스럽고 활기찬 카게히라 미카의 연락을 제일 먼저 확인한다. 그 다음으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만남을 선사한 네 벗들. 또 그 다음은 변해버린 자신을 변함없이 믿어준 어릴 적 친구. 저마다 개성과 자기주장이 강한 메시지들에, 슈가 보낸 답변은 똑같았다. '오늘은 집에서 보내고 싶다.' 사실 그들만 있어도 생일에 더 바랄 것은 없었지만, 올해는 지긋지긋한 고등학교를 벗어난 후의 한 해를 기념하듯 뜻밖의 인물들도 제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그 중에는 외국 생활 하더니 유난히 연락이 늘어난 세나 이즈미나, 이름만 올려놨는데도 같은 기숙사랍시고 의리 연락을 해온 이사라 마오, 미카와 부쩍 친해진 김에 슈에게도 뭔가 장난이라도 걸어보고 싶었던 아오이 쌍둥이들, 제 원수와 같은 유닛이었다고 매몰차게 대했건만 실은 저녁 찬거리 같은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했던 란 나기사까지, 웬일로 제 생일에 참견할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다. 오늘은 이츠키 슈의 생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자신의 마음에, 어쩔 수 없이 들어앉아버린 사람들과, 그런 어쩔 수 없는 자신을 허락하길 선택한 사람들로 구성된 제 삶을 뼛속 깊이 느낄 수밖에 없는 연례행사. 그런 날이면 세상으로부터의 축하, 그리고 부여받은 삶에 대한 감사가 기본일 것이다. 하지만 슈에게는 이 상냥한 주변 세상에 전하는 감사조차, 가끔은 너무나도 많은 걸 마음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려야 하는 고된 일이었다. 속정은 깊은 슈에게 그 감사의 크기는 거대했을 뿐더러, 어느 곳에서도 둥둥 떠다니는 존재는 밑바닥에 팔을 댈 때도 허우적거려야 했으니까.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고귀한 존재라도 되는 듯한 풍모를 무대 위에서 자랑해왔는데, 자신은 이 세계의 제왕이라고 늘 말해왔는데, 그런 자신이 태어난 날에는 제 존엄마냥 축하를 받아들이기보다 고뇌가 앞섰다. 익숙했지만.
공중을 부유하는 이물. 조화로운 음계 속 날카로운 불협화음.
그렇게 나고 자란 자신은 쭉 고독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고독에 슬퍼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세상을 향해 노래할 것은 분노와 경멸뿐이라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 슈에겐 소중한 것이 생겼고, 그 순간에 세상에서 그는 자신이 생존하고, 그 생존을 고해야 할 이유를 찾았다. 아껴 마다않는 이들을 위해서, 라고 온전히 확답하기엔 그는 지나치게 이기적인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그 오만한 자태가 그의 노래를 그늘 속 사람들을 위한 찬가로 만들지 않았던가. (사실, 그의 썩 사교적이지 않은 태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를 찾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지만.) 그 흐름을 슈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만큼은 고뇌 없이, 생일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면, 명쾌한 해답 너머로 귀퉁이를 적시는 먹먹함은 남아있었다.

오사카에서 도쿄로 돌아오는 열차 창문에 풍경이 스치다 멈추기를 반복하면, 슈의 사고도 주행과 멈춤을 반복했다. 작년 생일은 어땠지? 작년 생일은, 기실직고하자면 전례 없이 행복한 생일이었다. 유난히 생생했던 고양감. 그의 생일은 할로윈 전날이었고, 멋진 파티를 했었지. 저도 그 무대 위에 있었다. 자신이 쭉 마음에 품어온 이의 꿈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꿈과 사랑을 전해온 날. 마음속에 죽어있었던 것 같은 꿈 많은 자신이 돌아온 듯이. 슬슬 어두워지는 하늘색이 파노라마처럼 넘어가는 창문 너머에서, 호박 빛깔 가로등이 하나둘씩 정경을 비췄다. 슈에게 그 광경은 마치 할로윈의 잭 오 랜턴 같기도, 자신을 맞이하는 촛불 같기도 했다. 그 시간으로부터 한 해, 한 해, 어두운 기억의 터널로 머릿속 열차는 들어가, 해에 맞는 정거장에 선다.

죽은 자가 돌아오는 시간이라 했던가.
그 시간이라면 자신이 먼 옛날에 죽여버렸던 과거의 자신조차도 돌아오는 걸까? 자신이 무자비하게 숨통을 끊은, 위풍당당하지만 많은 걸 몰랐고 또 많이 물렀던 시절의 자신? 혹은 그보다 더 옛날, 많은 것을 딛고 올라가기 위해서 잘라내야만 했던, 일말의 냉소를 품었지만 꿈 많고 쓸데없이 감수성 풍부하던 어린아이? 어느 쪽이든 결국 잘라내고 잘라내 봐야 자신이라는 건 변함없고, 그 시절 자신이 제일 싫어한 것도 자신인데, 때마침 태어난 날도 같겠다 원령이 되어 스멀스멀 손짓하는 거겠지.
슈는 열차 창문에 어른거리는 제 얼굴의 잔상에서 조금 앳된 면모를 보았다. 그 시절의 스스로를 미소년이라 자부할 수 있는 게 유일하게 좋은 점이었다. 그러나 그 잔상과 함께 썩 기쁘지만은 않은 기억도 돌아왔다. 왜 태어났는지, 라든가, 생일을 저주한다거나, 누군가를 놀리기 위해 아이들이 가사를 바꿔 부르던 생일 축하 노래가 이명이 되어 울린다. 때로는 작은 장난기부터 때로는 작은 마음에 담기엔 비대한 악의까지 담긴 그 노래를, 어릴 적 생일날이면 밖에서 돌림노래마냥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큰 상흔조차 되지 않는, 하찮은 어린애들의 괴롭힘이었지만, 적어도 그 소절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고뇌와, 그 바탕이 된 부유감을 부여한 것은 틀림없었다. 아니, 애초에 자신이 섞이지 못하는 불순물이 아니었다면, 제 생존할 권리와 생존방식에 대하여 세상 누구도 자신에게 묻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떠올리다 보면, 기억 속의 슈가 어느덧 도착한 종착역에는 기이한 소년이 하나 있었다. 잡동사니의 산 위에서 춤을 추던, 요괴 같기도 요정 같기도 했던 아이. 보석 사탕을 닮은 눈 색만은 선명했던 아이. 저도 모르게 그 아이에게 홀려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옷장 속에 숨어 손전등 빛만 비추고는 원피스며 코트 등 여러 옷들을 입고 입히며, 웃고 까불었다. 그 아이와 놀 때는 이상하게 붕 떠 있단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둘이서 같이 허공에 뜬 채 손을 잡고 있어서, 외롭지 않단 느낌이었나? 그 모든 것은 슈에게 꿈같았고, 옷장 속이기 때문에 허락되는 몽상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 아이도 오사카에서 여기까지 왔댔지. 지금 시점에서, 슈는 작년까지만 해도 기억도 잘 안 나던 그 아이의 눈색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지점까지 기억이 거슬러 올라감과 동시에, 오사카에서 온 열차도 어느새 목적지까지 남은 길을 향해 문을 열어주었다.

열차에서도 기억의 정거장에서도 내린 슈는 한참을 걸어 고향집의 별채로 돌아왔다. 찰칵, 하고 문을 열면 켜진 불 하나 없이 저녁 그늘이 복도에 낮게 드리웠다. 한동안 주인 행세 하던 막내가 떠나 스산하기까지 하던 이츠키 가 별채의 실내 공기가, 어쩐지 슈에게는 꼭 맞는 반김 같았다. 동시에, 아무도 없진 않을 거라고 슈의 직감은 말했다.
'생일은 집에서 보내고 싶어.'
괜스레 감상적이 되어 귀국을 결정해놓고, 미카한테도, 이상한 데서 오지랖 넓은 동료들에게 보내고, 확인 차 돌아오자마자 또 보낸 연락. 항상 제가 모진 말을 하고 가시를 세워 혼자 있더라도, 그 여유 없음마저 존중하겠단 명목으로 자리를 비켜주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뒤에서는 그렇게 보여도 좋은 사람, 이라고 열심히 일말이라도 슈를 믿어보려 했을까. 지금 같은 때에 편리하게 거기 기대는 것도 명예롭지 못하지만.

그렇다 해도, '집'이라는 것이 이곳 별채를 가리킨다고 받아들이는 건 미카 뿐이리라. 물론, 아파트에서의 자취 생활이 장렬한 실패로 끝난 이래로, 미카는 기숙사 방에 입주를 했지만, 그곳 기숙사야 잠깐 묵을 호텔처럼 쓰는 사람들도 슈를 포함해 많았는데다, 미카도 이왕이면 익숙하고 추억이 서린 곳에 정착해 생활력을 기르는 게 낫다고 둘은 판단했으니까. 오늘을 누구보다 기뻐할 사람이 미카라는 것, 그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마음에 확실한 정언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 한 가지 사실이 정서적 이방인인 그를 혼자 두지 않으려 한다. 문득 슈는 제게 축축한 종이처럼 깊게 스며든 외로움을 외면할 수 없음을 떠올리고 부드러운 한숨을 쉬며, 적막한 실내로 발을 딛었다. 그러자,

"스승님, 어서 온나! 많이 기다렸다 아이가. 생일 축하한데이!"

집 안의 불이 탁, 하고 켜지면서, 그리운 이가 두 팔을 벌리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슈를 반겨왔다. 그야, 그라면 자신을 반길 것이다. 그것은 예상 내였고, 그 예상이 지금은 너무나도 따스하게 가슴 속을 채우지만, 놀라운 것은...

"카게히라, 그 옷은?"

바로 그가 작년, 라이브하우스에서 선보였던 장난감 열차의 차장 의상을 입고 있었단 것이다. 슈가 좋아하는 반바지와 흰 스타킹까지 그대로 재현한, 그때 그 복장 그대로였다.

"스승님 생일이니까, 오늘은 특별히 스승님을 꿈의 세계로 인도할, 카게히라 미카 역장입니데이- 고양이는 아이지만예, 여 명물이라고 생각 해 주소. 응앗, 스승님 취향이라면 고양이 귀도 쓸 수 있다?"
"호오, 카게히라, 뭔가 준비한 게 있는가보구나? 그래, 이 나를 놀라게 해 보거라."
"응후후, 스승님, 각오는 됐나? 내 놀라게 해도 되는 거제?"

사랑스러운 아이가 꽤나 귀여운 짓을 준비하고 있나보다. 눈 녹든 풀린 마음이 웃음으로 튀어나왔다. 조금은 홀가분해졌나. 이 정도의 서프라이즈라면, 슈도 생일날 유쾌한 해프닝으로 기억할 수 있다. 많은 생일을 고뇌로 보내온 그에게 이런 작은 소란, 있어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이렇게 단 둘이 보내는 단란한 시간은 오히려 바라던 바다. 와라! 카게히라! 우리의 집에서!

"내, 정말로 스승님 놀래켜도 괘않나?"
"카게히라, 얼마나 대단한 걸 준비했기에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그야, 네가 주는 놀람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단 게야. 자, 사랑스러운 아이야, 어서..."

그러나 슈는 정말로 놀랄 일은 그보다 더 뒤에 찾아온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은 세상의 보물인 스승님이 이 세상에 내려온 기념할 만한 날이라가,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아이가!"
"뭐, 뭐?"

미카가 대체 뭘 저지른 것인가 의문을 품기도 전에, 팡, 팡 하고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나면서.

"생일 축하합니다, 나의 벗, 슈!"
"축하하네, 이츠키 군."
"오늘은 슈의 생일이라, 미-씨와 특별히 '준비'한 게 있어요."
"슈 형, 생일 축하'해'."

아주 익숙하고 표현력이 팍팍 묻어나는 성량 큰 목소리를 필두로, 자신이 아는 인물들의 목소리가 슈를 환대하는 것이었다. 대체 이 인간들은 무슨 수로 여기까지 찾아왔단 말인가? 자신도 어안이 벙벙해 슈가 말을 잃고 있으면, 미카의 뒤를 이어 튀어나온 히비키 와타루가 은빛 융단 같은 장발을 멋스럽게 휘날리며 화려한 턴을 몇 번 하고는, 슈에게 보랏빛 장미 꽃다발을 정중하게 건넸다. 그 주변에도 마술이라도 부린 양 꽃잎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츠키 슈의 어이도 잠깐 바람에 날아갈 듯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오늘만은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입니다. 당신의 보라색 장미의 사람이에요."
"컷. 그리고 뒤의 문구는 필요 없었어. 그보다도, 너희들 지금 남의 집에서 뭐 하는 짓인 게야?"
"어디든 출입하는 건 원래 신출귀몰하는 자의 몫... 에헴, 하지만 이츠키 군의 마음 속으로 가는 데에는 카게히라 군이 열쇠를 갖고 있었지."

 와타루의 화려한 등장에 반사적으로 슈가 태클을 걸고 있으면, 건너편에서 언제 왔는지 사쿠마 레이가 걸어와 점잔 빼고 있었다. 그 옆에서 미카가 응후후, 하고 장난을 들킨 아이마냥 혀를 쑥 빼물고는 손에 쥔 열쇠 뭉치를 짤랑이며 들어보였다. 다른 사람이 보면 꼭 연륜 많은 할아버지와 재간둥이 손자의 합작 같다고 느꼈겠지만, 슈에게는 사실 둘 다 수준은 거기서 거기라 보였다. 이상한 녀석들. 꼭 사람 말을 반대로 들어... 하지만 그것이 '반대'였을까? 사실 이런 분위기, 마음속에서는 싫지 않았던 게 아닐까? 슈는 조금이지만 흐뭇한 웃음이 피어오르려는 것을, 평정을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숨겼다. 그래, 이 나를 즐겁게 해 보거라, 하는 이상한 승부욕도 생겼다.

"카게히라, 너..."
"그치만 스승님아, 기인 선배들이랑, 낫군이랑, 또 다른 선배들이랑... 다들 스승님이 외국에 있어서 마이 외로웠다 안 카나. 글구 스승님도 안 외로웠으면 좋겠어가..."
"따, 딱히 외롭다고는 말 안 했단 게야! 그렇다고 해도 오늘은 분명 혼자 있고 싶다고 연락했을 텐데?"
"그치만 형, 말은 똑바로 하'자'. 혼자 있고 싶다곤 말 안 했잖'아'. '오늘은 집에서 보내고 싶다'라고만 했지."
"애송이, 많이 컸네."
"미카 군은 착하게 살았'어'."

역시 사카사키 나츠메, 그 칼같은 말의 허점 찾기는 슈만큼 날카로운 이도 당해내기 힘들 때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히 슈 본인이 집에서 보내고 싶다고 하니까 다들 집으로 올 걸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나츠메는 그 말 이후로도 얼핏 장난스러워 보이지만 어조만큼은 무미건조한 그 투로 몇 번이고 슈를 쿡쿡 찔러댔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전달하지만 듣는 사람은 결코 피할 수 없어, 자신의 마음을 무심코 투영해버리는. 그러고는 살쾡이 같은 눈매를 스윽 좁히면서 의뭉스럽게 웃는 것이다.

"그래요. 친구한테 '남'이라니 섭해요-. 조금 더 '소중히' 여겨주세요? 생일날에 슬픈 얼굴을 하면, 여기까지 우리를 모아준 미-씨도 울어요?"
"마치 소중히 하지 않았다는 듯이 말하는군, 카나타! 그, 그저 이렇게까지 날 위해 고생할 필요는 없단 말이다."

그 뒤에서 바다처럼 잔잔한 미소를 얼굴에 띄운 카나타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슈를 올려다보는 미카와, 타이밍에 적응한 카멜레온처럼 때맞춰 섭섭한 표정을 얼굴에 입혀보이는 나츠메 뒤에서 스윽 나타났다. 

"자아, 아이들을 무시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랍니다? 오늘만큼은 웃어봐요. 행복은 '의무'라고요?"
"스승님?"
"형?"

저마다 필살의 눈빛을 보내는 후배들의 공세에 슈가 못 당해내겠다는 듯이 풋 하고 웃음 터뜨리며 둘을 맞이해주었다. 이츠키 슈, 연하에 약한 남자. 그리고 그 순간 뭔가 통했다는 듯 미카와 나츠메는 짝 하고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이 아닌가. 카나타는 마치 불구경하듯이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그저 미소만 지었다. 아무 말 안 하고 있지만 사실 카나타야말로 상냥하게 정론을 주워서 하나하나 손 안에 담아주는 타입이었다. 어쨌든, 이들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은 호감이고 정이다. 거기에서 자신이 눈을 돌릴 수 없고, 마음의 주박도 이제 점점 느슨해져 풀어 으깰 수 있을 정도가 됐다면, 감사의 표현정도는 해도 다치지 않을 터다. 다만, 주박에서 풀려난 후 맞이하는 두 번째 생일은 조금 생경하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의 배드 섹터가 존재했던 것이다.

"근데 카게히라, 기인 선배들이랑, 낫군이랑, 다른 선배들이라고 했지? 그러면 여기에 더 올 사람도 있단 소리인가? 얼마나 더 왔지?"
"응아아... 그게..."

미카가 혹시 스승님이 감당하기엔 너무 대인원이 아닌가하는 걱정으로 인원수를 세고 있으면, 걱정 말라는 듯 미카 옆에서 카나타의 옆에서 키가 큰 인영이 시원스레 손을 흔들었다. 슈와 어린 시절을 함께해온 소꿉친구, 키류 쿠로였다.

"여, 이츠키, 오랜만이야. 나는 이런 요란한 이벤트는 잘 거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생일 축하한다." 
"키류? 너까지 이걸 거들 생각을 했단 말이야?"
"명색이 친구 생일인데, 안 오면 섭하지. 너네 집도 오랜만인데, 이런 재미없는 녀석이라 미안하긴 하네."
"그렇게 말하진 않았다고. 너야말로 그런 식으로 자신을... 아니다. 지금 할 얘긴 아니지."
"뭐, 시간은 많으니까. 오늘은 다들 여기서 진득하게 눌러앉을 생각인가봐."

아주 눌러앉을 작정이라니, 생각 이상으로 소란스러운 하루가 되겠군. 슈는 상념에 잠겼다. 슈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 생일에 친구를 집에 초대해 생일파티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 땐 그만큼 친한 친구도 적었고, 저를 괴롭히던 무리에게 생일날 조롱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으니까. 그나마 의리 깊은 쿠로만은 생일 때마다 놀러오곤 했지만, 그마저도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발길이 끊기고 말았다. 시간의 공백과 서로에게 품은 모종의 죄책감들을 지나, 모처럼 오랜 친구와 같이 맞이하는 생일은, 옛날처럼 쓸쓸하지 않고 이렇게 사람의 활기와 온기로 가득한 자리라니, 세상일은 정말 모를 일이었다.
여전히 떠들썩한 모임은 번잡해서 꺼리던 슈에게, 이런 분위기는 솔직히 적응이 안 되었다. 그랬지만 친구들과 안부를 묻고 있다 보면 그 분위기조차 썩 나쁘지 않게 여겨졌다. 마음이 또다시 홀가분해졌다. 그러다 보면, 슈의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생일 축하해, 이츠키. 너도 비행기 타느라 고생 많았겠다."

세나 이즈미. 사는 곳은 다르지만 어쩌다보니 외국 생활 동지가 되어버린 녀석. 졸업하기 전 같은 반의 마지막 양심이었던 녀석. 요즘 부쩍 이야기 나눌 일이 많아졌다지만, 굳이 생일까지 찾아와줄 줄은 슈도 몰랐다. 그리고 둘이 말을 트는 틈새를 놓치지 않고, 주황색 꽁지머리를 한 인영이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컹그레츄레이션! 인스피레이션! 홈 스윗 홈! 슈, 생일 소감은 어때?"
"얜 그냥 원 플러스 원으로 따라왔다고 생각하면 돼." 불쑥 고개를 내민 츠키나가 레오의 팔을 한 손으로 가볍게 밀어 그의 돌발행동을 저지하며, 이즈미가 말했다.
"아니거든? 내가 먼저 왔고 세나가 뒤에 따라온 거거든?"
"그건 넌 일본에 있고, 나도 쟤처럼 비행기 타고 왔으니까 그런 거고. 당연한 걸 물어. 레오군 바보야?"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이 바보야! 근데 네 말대로 나도 바보니까 뭐, 괜찮아, 세나. 우린 동지니까!"
"너 보자보자 하니까 선 넘는다?"
"그리고 슈까지 해서, 설원의 바보 트리오를 결성하는 거야. 그때처럼!"
"...지금 나까지 바보 취급한 게냐, 츠키나가?"

찌릿, 하고 날카로운 두 시선들이 레오에게 꽂힌다. 아랑곳하지 않고, 실없는 농담을 이까지 싹 드러낸 함박웃음에 가미하며, 레오는 태클 걸기 바쁜 이즈미와 슈의 어깨에 턱 하고 양 팔을 걸쳤다. 이즈미는 둘째치고 키도 작은 녀석이 자기보다 키 큰 슈에게 그러니까 꽤나 웃긴 모습이었다. 그것을 밀쳐내려던 이즈미는 운없게도 균형을 잃으면서 오히려 제가 스스로 레오의 어깨에 팔을 걸치는 모양새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어깨동무 트랩의 희생양이 된 슈는, 이 엉뚱한 광경에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진 파티 풍선처럼 웃어버렸다. 눈이 밀가루처럼 내리고 열이 많이 나던, 그런 날도 있었지. 억지를 부리며 아픈 몸을 이끌고 스타페스의 무대까지 달려온 자신을 부축했던 둘. 소중한 것은 제대로 보고 아끼란 말을 듣고, 남말하네, 하고 속으로만 생각했던 시절. 그 해의 자신은 그렇게나 어리석었지만, 어리석음을 공유하면서 지난날을 돌아볼 수 있는, 그리고 지금도 서로 꼬집어 보며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된 건 행운이었다.
그것이 행운인 만큼, 그는 또다시 기묘한 부유감을 느꼈다. 이 편안함이, 자신을 맞이하는 이 작은 세상의 조각이 나를 감싸고 있단 게, 괴이현상 같은 거라면? 내 몫이 아니라면?


"밥 안 먹었지? 그럼 일단 밥부터 먹자. 나도 밥 안 먹고 왔거든."

기지개를 켜면서 이즈미가 말을 던지면, 그에 이어 미카가 총총 다가와 삑, 하고 호루라기를 불어 슈와 유쾌한 친구들의 이목을 끌었다.

"네네, 그러면 스승님을 위한 어... 이번 우주 투어 열차의 특별 코스를 제공하겠습니다!"
"언제 우주라는 설정이 붙은 게야?"
"응아아, 그건 그냥 내가 좋아서 붙인 거데이? 듣고 있던 노래에서 따온 것도 있구. 글구 걱정 마라, 식사는 우주 보존식에 비하면 윽수로 맛난 거니까!"
"우주 보존식을 먹어본 적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좋아. 기대해 보도록 하지."

슈는 미카의 약간 엉성한 에스코트와 함께 부엌으로 향했다. 하나둘씩 모인 이들도 식탁에 둘러앉았다. 식탁을 둘러보면 테이블 중앙에는 마르게리타 피자 두 판과, 수북하게 쌓인 갖가지 기괴한 모양의 쿠키가 담긴 큰 접시가 차려져 있었다. 신선한 야채의 색채를 말끔한 원형의 도우 위에 품은 피자와, 개성적이다 못해 기하학적인 모양을 한 쿠키들은 얼핏 부조화를 이뤘다. 그 때, 어디서 났는지 어느새 전문 셰프마냥 갈아입은 와타루가 화려한 쇼맨십을 보이며 나타나 오늘의 메뉴를 소개했다. 그 옆에서 재밌는 일이 벌어지겠다는 듯 레오가 피곤해하는 이즈미를 끌고 왔다.

"보세요! 오늘의 만찬을. 슈를 위해서 정성을 담아서, 여기 두 사람이랑 같이 만든 마르게리타 피자입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쉴 새 없었어요. 부디 즐기길!"
"요리에 머리카락을 댄다니, 농담이라도 위생관념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냔 게야."

흔들. 휙휙. 삐죽.

"뭐, 와타루 너라면... 농담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그 말과 함께, 어쩐지 와타루의 머리카락이 연체동물의 사지마냥 유연하게 움직이는 게 보인 것 같아서, 슈는 흠칫 하고 말을 멈췄다. 머리카락조차도 정말로 와타루의 연극적인 표현 하나하나에 덩달아 의사를 표현하는 듯했다. 슈의 눈길을 잡아낸 와타루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우아한 손짓과 함께 말을 이어갔다.

"마법의 실이라 생각해주세요? 한때 인형사를 자처하던 슈라면, 비유는 대번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 남의 생각하고 싶지 않은 역사를 그렇게 폭로하다니, 섬세함이 없군! 오늘은 그래도 나랑 패션 센스가 겹치지 않은 걸로 봐주도록 하지. 그리고 그 끔찍한 꽃무늬 셔츠를 안 입고 온 걸로도 용서하는 게야. 아무튼, 내 입맛을 즐거이 해 보거라, 내 벗이여."
"물론, 기꺼이. 당신의 센스도, 당신의 입맛도 얼마든지 맞출 수 있어요. 서로를 찌르고 싶을 만큼 잘 아니까, 친구에게 요리를 대접한다는 행위의 의미도 아는 것이랍니다."

막역한 사이간의, 조금 찌릿할 정도가 흥 나는 말놀이를 슈와 주고받으면서, 와타루는 피자를 하나씩 접시에 덜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럼 우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이제는 파티의 사회자 일이 익숙해진 미카의 말을 필두로, 제각각이던 목소리가 하나가 되어 슈에게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기 시작한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바뀌지 않은 가사에 실린 진솔한 마음들과, 그 끝에 걸린 박수소리까지. 그것이 오롯이 슈를 향한다. 그 속에서, 슈는 또 다시 우주를 떠다니는 듯한 아찔한 부유감을 강하게 느꼈다. 그 감각은 타이밍 좋게 제 배에서 꼬르륵, 하고 난 소리와 함께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눈 앞에는 피자가 있었다. 일단 뭐라도 먹으면 머리가 돌아오겠지, 하고 슈는 나이프로 피자를 썰어 입에 넣었다. 식기가 부딪히는 맑은 소리와 새콤하고 깊은 토마토의 맛과 허브의 잔향이 감각세포를 타고 신체에 스며들면서, 슈의 마음은 다시 평안을 찾았다.

"그래서, 이 요리를 함께 마련해준 셰프 동지 여러분들은 특별히 할 말씀 없으신가요?"

갑자기 와타루가 자신들을 지목하자, 레오는 양손으로 브이 자를 만들었고, 이즈미는 당황했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언제 한번 정통 이탈리아식으로 해보고 싶었으니까. 저기에서 요리도 좀 배웠는데, 배운 게 있으면 써먹어야지. 마침 너네 집에 화덕도 있고."
"좋잖아, 화덕피자. 그리고 쿠키도 구워왔어. 전에 슈랑 라디오 방송 했을 때 기억나지? 그때의 인스피레이션 쿠키야. 사실 내가 먹고 싶어서."
"인스피레이션 쿠키라는 건 결국 그건 조리법이 없다는 말 아닌가?"
"정답이야, 슈. 너도 방송 나가서 이래도 괜찮냐고 몇 번이고 나한테 물었잖아. 근데 알게 뭐야. 먹고 싶다는 마음으로 만들어지면 그만이지."

츠키나가 레오와 세나 이즈미, 같이 지낸 시간은 분명 많을 전우들이지만, 둘은 정말로 달랐다. 레오가 그 정도로 제 요리에 대한 모든 설명을 끝낸 반면, 이즈미는 틈틈이, 모종의 프로의식까지 발휘하여 자신의 조리법과, 요리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설명했다. 얼마 전에 요리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도 있었댔지. 지중해 요리에는 슈도 워낙 관심이 많았고, 요리도 연예계 생활도 그 짬이 괜한 것은 아니라는 듯 술술 막힘없이 이어지는 이즈미의 달변은 테이블에서 흥미를 돋우기 충분했다. 특히 이즈미가 세관에 걸리지 않고 본토에서 치즈를 가져오는 방법을 이야기한 대목부터는, 치즈에 환장해서 미카랑 나눠먹을 치즈를 여기까지 공수해온다고 별 짓을 다하던 자신의 우여곡절까지 떠올라서, 슈는 저도 모르게 전력으로 공감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일본 세관을 통과하려면 검역 증명이 필요하고, 통과할 수 있는 치즈는 5kg까지였지, 그래. 막상 먹을 만큼만 가져오려고 하면 빡빡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아, 맞다, 스승님도 전에 브리 치즈 무더기로 갖고 온다고 고생 마이 했제!"
"카게히라, 하지만 맛있는 요리는 삶을 풍요롭게 만든단 말이다. 너와 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나는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어."
"아 쟤네 또 여기서 프로포즈하네. 아무리 오늘이 생일이라지만 완전 짜증나. 저기요. 아니... 됐어. 네 생일이니까, 마음대로 해. 그리고... 3일 뒤에 내 생일 때 올 거면 적당히 자제하고."
"와 세나 은근슬쩍 여기서 자기 생일 어필한다."
"외국 생활하면 심심한 게 쟤만은 아니거든. 그게 나빠?"
"나는 별로 심심하진 않았다만."

그 말에 이즈미는 한 방 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슈의 말은 진심이었다. 외국 생활은 심심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즈미는 말을 바꿨다.

"그래서 요리는 입에 잘 맞아?"
"토마토와 허브의 풍미도, 도우의 질감도 살아있어. 훌륭하군. 식감이 산뜻하고 끈적이지도 않아. 모짜렐라는 생 모짜렐라를 썼나?"
"물론이지. 하, 누가 만든 건데. 맛없다 소리는 절대 용납 안 할 각오로 만들었는데, 다행이네. 역시 화덕이랑 오븐이 갖춰진 건 중요하다니까."

생각해보니 이 녀석들, 그냥 때마침 슈네 집에 화덕이랑 오븐이 있으니까 그게 재밌어서 뭐 만들어먹자고 한 거 아닌가? 그렇지만 아무렴 어떠냐, 생일날 다 같이 즐기는 이 공간의 따스한 공기는 구워낸 피자와 과자에 녹아있으니까. 그걸 소화해내면서 부디 마음이 체하지 않기를 슈는 바랐다. 모름지기 요리는 몸의 양식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양식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 증거는 바로 슈의 옆자리에서 절찬리에 보여주고 있었다.

"스승님, 아-해봐라."

옆자리에서 맛있어하며 오물오물 하고 피자를 먹는 미카에게 슈는 눈길이 안 갈 수 없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스러운데,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 저와 눈을 맞추며, 포크를 제게 내밀며 먹여주려는 모습. 아, 이 얼마나 귀여운 광경인가. 슈는 미카가 주는 피자 조각을 먹고, 자신도 잘라낸 피자 조각을 포크로 집어 미카의 입에 넣어주었다. 슈는 무심코 식사자리에서 미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버렸다. 모두가 둘러앉은 이 식탁에서. 하지만 이츠키 슈, 사랑의 사람이 아니던가. 그래서 슈는 결국 저질렀다. 슬쩍. 쓰윽쓰윽.

"스승님이 쓰다듬어 줬데이, 응후후, 미카는 행복합니더..."
"슈와 함께 파랑새 씨도 행복해하고 있군요. 역시, 사랑이네요..." 

그것은 이 요리를 대접한 와타루의 눈에도 좋은 구경거리였다. 사랑이야. 사랑이네. 하고 식탁 곳곳에서 흥미와 때로는 좀 질린 듯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설탕을 토할 것 같은 공기중 당도를 견디지 못한 이즈미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면서, 그 분위기를 끊고 상식인다운 표정으로 슈에게 물었다.

"그러고보니 이츠키, 너 말야, 가끔 집밥이 그립지 않아?"
"딱히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단 거다. 식사는 입에 잘 맞았으니까."
"다행이네. 일식집이나 다른 아시아 식당이야 외국에도 있지만, 그래도 고향 맛이랑은 다르니까."
"나는 현지화된 맛도 고유의 개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때론 정통파를 고집할 수밖에 없는 심리가 있지. 인정하는 바다."

역시, 이건 좀 다르다. 이 사람은 나랑 다르다. 그것을 느낀 이즈미였다. 이 스몰토크는 일식파냐 양식파냐, 해산물이 좋냐 싫냐 따위의 주제로 이어질 법도 했으나, 그것은 이즈미의 다음 말에 뜻밖의 방향으로 선회했다.

"근데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게 아니라... 일식이냐 양식이냐 그런 거 말고, 왜 있잖아, 말 그대로 익숙한 데서 먹는 밥. 가족들이랑 먹을 때나, 나같은 경우엔 우리 유닛 애들이랑 스튜디오에서 전골 끓여먹고 그러잖아? 그런 게 외국 사니까 새삼 그립더라."
"집이란 게 물리적인 장소에 구애받는 개념이라곤 생각하지 않아. 나고 자란 곳, 익숙한 곳이라고 해서 정서적으로 가까움을 보장하진 않는단 거다."
"그래? 이츠키는 향수병 같은 것도 없어?"
"나는 여기에서도 내가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니까. 마치 우주에 뜬 것 마냥."
"나로서는 좀 알기 힘든 기분이네."

그렇게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공감하고 있다 생각한 상대와의, 조금이라 생각했지만 갈수록 커져가는 혼선과 불일치에 이즈미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으면, 도로 레오가 반대되는 의견을 꺼냈다.

"아, 뭔지 알 거 같다! 나도 그런 거 있어. 붕 뜬 거 같은... 아니 좀 다른데, 세상의 모든 게 눈에 확 보이는데 멀어보이는 그거지?"
"츠키나가, 좀 알기 쉽게 정리해서 말해보란 게야."
"슈보다 스케일 더 클걸? 나도 꽤 진심으로, 내 고향은 지구가 아니라고 느끼거든. 컨셉 아니고 진짜다 이거?"

레오는 아까의 까불거리는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꽤나 진지하게 그 말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흥미가 동했는지 슈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또 나한테 보이는 게 다른 사람한테 안 보이는 것 같지? 그런 적 있지?"
"아... 확실히, 그런 적은 있지."

다시 찾아오는 부유감.

"그러다 보면 뭔가 내가 어느 별에서 왔나, 그런 생각이 들거든. 근데... 섭섭하긴 해도 나도 딱히 외롭지는 않더라. 왜냐면 내가 그런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냥 그런 거니까. 그리고..."
"그리고?"
"붙잡아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여기에 어떻게 사는 거 아니겠어? 내 고향은 아니라도 살만한 곳이라곤 느낄 수 있지. 그거면 됐어."

그 말에 이번에는 슈가 침묵을 지켰다. 옆에서 이즈미도 얘가 뭔 소리를 할까 긴장한 표정을 짓다, 말을 끝까지 다 듣고는 이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레오는 또 시원하게 한바탕 웃고는,

"그냥 해본 소리야! 와하하! 슈 너 아까, 표정이 갑자기 험상궂어져서, 또 뭔가 유탄이라도 튀었나 했는데, 그냥 평소 네 표정이 그런가보다. 그래도 괜찮아. 여기 모인 애들, 고작 그 정도로 사람 평가할 애들 아니거든."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실없는 소리였겠지만, 슈는 그것이 기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방금의 이야기가 상당히 내밀한 부분들을 파고드는 이야기였다는 점조차, 이 화기애애한 식사 시간 안에서는 위화감 없이 진행되었다. 그것이 한 순간의 물거품이 아니길 바라며, 슈는 남은 피자와 그 분위기를 음미했다.


식사를 끝나고 식기들을 정리하고 나면, 나츠메가 자기 몫의 커다란 백팩과 트렁크에서 주섬주섬 노트북과 여러 책들, 그리고 갖가지 색의 주사위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츠메가 가져온 책들은 TRPG, 즉 테이블탑 롤플레잉 게임이라 하여, 주사위를 굴려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유서깊은 탁상 게임의 규칙책들이었다. 미카도 옆에서 책 정리를 거들려다가, 떨어지려는 책 하나를 잡으려다 미끄러질 뻔 하고는 바로 퇴짜를 맞았다.

"미카 군은 사회나 '봐'."
"응앗... 낫군, 이럴 땐 말이 심하데이."

그렇게 얼추 음악을 틀기 위한 노트북과, 거실의 책들과 주사위 트레이가 자리잡히자, 미카가 삑, 하고 다시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자유 레크리에이션 시간입니다! 종착역에 도달해 좋은 꿈에 빠질 때까지, 스승님과 함께 즐겁게 지내주세요!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특별히... 니 리믹스 할때는 따로 명의 있었지 않나?"
"아니, 됐어, 그냥 DJ 사카사키 정도로 해 '둬'."
"에이 그러지 말고 좀 느낌 사는 걸로 해 봐라."
"그래. 그러면 플레이아데스 원더로 하'지'. 예전에 BMS 만들 때 명의'야'."
"...그렇다 카네. 아무튼 낫군이 믹스테이프를 준비해왔습니다. 마법 같은 음악의 세계와 함께, 파티 게임을 하죠!"
"어차피 별명으로 부를 거면 물어보질 말던'가'..."

카게히라 미카, 이 아이, 의외로 태클로 역공하는데도 능숙한 타입이었던가? 둘은 생각보다 죽이 잘 맞는 구석이 있었다. 작년만 해도 나츠메가 미카를 일방적으로 놀려먹는 것 같았는데, 미카의 묘하게 순진하고 자각 없는 구석은 의외로 사람들을 뜻밖의 곳에서 당황시키는 면도 있는 것 같았다.

"이 인원이면 두 그룹으로 나누면 되겠'다'. 선배들이 각자 원하는 거 가져가서 놀'아'."

노트북을 만지작거려 자신이 만든 리믹스 트랙을 배경음악으로 깔고, 나츠메는 하나하나 인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여론을 모아보니, 헤아릴 수 없는 신적 존재와 이상현상 앞에서 나약한 인간들의 공포를 만끽하는 코즈믹 호러 룰, 크툴루의 부름과,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으로 게임을 진행시켜 가는, 유연한 아포칼립스 월드 엔진 룰로 크게 나뉘는 느낌이었다. 예상대로, 다들 플레이어를 하고 싶어하지, 게임의 사회자 역할인 게임마스터를 하고 싶어하진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그 결속력은 어디 안 가는 듯이, 삼기인은 하나로 뭉치는 것이었다. 나츠메는 그것을 보고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서, 익숙한 일인 양 자신이 게임마스터를 맡겠다고 선언하고, 둘 다 이런 취미에 별로 경험은 없지만 어쨌든 한 세트인 이즈미와 레오, 그리고 마찬가지로 초심자인 쿠로를 설득해서 한 그룹으로 모아 같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남은 것은 슈와 미카, 둘 뿐.

"낫군은 그... 기인 선배들이랑은 안 하는 기가?"
"형들이랑 하면 캠페인 진행이 안 '돼'. 여관에 모여서 시작하는데 여관에 안 가겠다고 뻐기질 않'나'... 룰의 허점만 귀신같이 찾아내서 그걸로 이야기를 탈선시키지 않'나'... 슈 형은 무슨 말인지 알'지?' 루니가 두 명만 되어도 그 세션은 머리가 아프다'고'."
"그러면 빌드도 마스터도 필요없는 게임을 하면 되지 않느냐? 피아스코처럼 말이지."
"슈 형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이번엔 신선한 뉴비들이랑 좀 더 정통파 크툴루 세션이 하고 싶거'든'. 아무튼 그래서, 내 대타로 미카 군을 내세우겠'어'."
"응앗?! 낫군?"

나츠메는 미카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슈와 익숙한 삼기인 선배들이 있는 곳으로 미카를 인도했다. '잘 해봐', 그 말만큼은 마치 신비한 언령이라도 되는 듯이, 말꼬리의 기이한 억양 없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렇게 미카는 예측불허의 플레이를 선보일 것만 같은 선배들의 사이에 무자비하게 내던져지고 말았다.

"그럼 잘 부탁하네, 카게히라 군."
"어서오세요. 슈의 귀염둥이."
"미-씨는 '신입'인가요? 신입에게는 '상냥'해야지요."

고작 파티 게임 하나 하는데도 마치 신화 속 신들 같은 위엄을 놓치지 않는 세 사람의 눈빛은, 억만년만에 들어온 신입에게 이것저것 떠먹이려고 필사적인 고참들의 맹렬한 공세로 미카에게 다가왔다. 미카는 그 분위기 속에서, 마치 형언할 수 없는 신화생물을 마주한 듯한 긴장감이 등골을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실 딱히 무서운 건 아니었고, 기인 선배들이이야 오히려 친근하게까지 느끼는 미카였지만, 원래 초보자에게 고참은 뭔가 있어 보이는 법이다. 그리고 미카는 들떠서 긴장한 것과 무서워서 긴장한 것을 자주 헷갈리곤 했다.

"그, 그러면, 하모, 힘내야제!"

그 때, 구세주처럼 슈가 뒤에서 나타나 미카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괜찮아, 카게히라. 내가 있어."
"응앗, 스승님..."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봐주고 지탱해준, 사랑스러운 아이. 그 아이의 위기에 이 이츠키 슈가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 세션의 마스터는 내가 맡겠다!"

그리고 슈는 사랑하는 이의 마음의 평안과, 올드비와 뉴비의 바람직한 화합과 건전한 놀이문화 고취라는 대업...까지는 아니고, 그냥 미카의 긴장을 풀고 모처럼 만난 친구들이랑 마음 놓고 놀기 위해서 게임마스터라는 중대한 직책을 짊어지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하기로 한 것은... 아니, 거기부터가 문제였다.

"그러고보니 우리, 룰을 정하지 않았군. 무엇으로 할 텐가? 아포칼립스 월드 엔진 계열을 희망했던 것 같은데."
"그럴 때는 운명의 여신에게 맡겨보는 것이 어떤지요? 주사위는 모든 답을 알고 있답니다."
"한두번 해보는 것도 아니고 말일세. 적당히 이츠키 군이 골라주는 건?"

와타루와 레이는 뒷짐 지고 슈를 바라봤다. 카나타 역시도 생글생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 인간들, 처음부터 글렀어! 슈는 생각했다. 그만큼 닳고 닳은 역전의 용사들이기에, 주사위 굴려서 무슨 룰이나 해도 상관없는 것인가? 아니, 그 전에, 그만큼 기호가 희박한 것인가? 초보자 앞에서, 일단은 자신이 하고 싶은 역할연기의 심상이 명확해야 하는 TRPG를 하면서 이래도 되는 것인가?

"너희들, 아무리 뭘 하든 다 자신있다 해도, 자기 의사는 말하란 게야! 하고 싶은 게 없으면 이야기는 굴러가지 않아."
"그래도 이츠키 군이 마스터가 아닌가. 그러면 이츠키 군이 말하는 게 곧 우리가 갈 길일세. 잘 해보게나."
"마스터는 내레이션이랑 규칙을 출력하는 기계가 아니란 말이다! 너희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러 왔지, 끌려다니러 온 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설마, 나도 여기에 즐기러 온 것임을 잊어버리진 않았겠지?"
"'주인공'이군요-. 슈는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슈는 순간 여태껏 이런 친구들을 끼고 게임마스터를 맡아온 나츠메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숙연해졌다. 저절로 손이 이마를 짚었다. 그래서, 그는 이 중에서 그나마 기호랄 게 확실해 보이는 초보자 쪽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카게히라는 뭐가 하고 싶지?"
"어... 내는, 이거 하고 싶다. 이게 제일 쉬운 거제?"

미카가 집어든 룰북은, 검은색 기조의 표지에 뱀 모습의 몬스터와 싸우는 용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정석적인 모험 판타지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룰북이었다.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TRPG 룰과, 각종 영화나 게임에서 많이 본 설정들을 간단한 규칙과 스토리텔링 위주로 풀어내, 초심자에게도 많이 권장되곤 하는 게임이었다. 나츠메는 이 룰이 임기응변을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별로 초보자에겐 추천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슈의 생각은 달랐다.

"무난한 선택이군. 뭘 해도 결말이 나오긴 한다는 게, 안정감 있지."
"응아아... 잘 부탁한데이. 내, 내는 이거 처음 하니까, 여관에 안 가구 그러면 안 된데이?"

그렇게 네 사람은 각자가 연기할 캐릭터를 정하고, 슈의 내레이션을 따라 모험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여명의 나라라는 평화로운 왕국이 있었다. 그곳은 인간과 갖가지 이종족들이 어울려 사는, 그야말로 낙원과도 같은 나라였다. 수많은 전쟁의 역사를 지나, 엘프도 드워프도, 그 밖의 다른 종족들도 공존하는 이 왕국은, 강력한 마력을 수호하는 왕과, 강대한 마법공학 기술, 서로의 마법과 기술을 공유하겠다는 이종족들의 조약 하에 공동으로 평화를 이룩해오고 있었다. 물론, 그 평화는 역사 속에서 지워진 이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졌다는 어두운 속사정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왕국에는 존재할 리 없었던, 지하에 산다고만 전해져 내려온 사악한 종족인 고블린들이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고블린들의 공격 이후로 마을의 마법공학 시설들이 하나둘씩 멈추기 시작하고, 왕국의 기반에도 타격이 오기 시작했다. 일행이 맡은 캐릭터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왕국이 모집한 모험가들이었던 것이다.

게임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초보자인 미카는 금세 역할에 몰입하고 규칙을 척척 익혀갔고, 숙련자인 나머지 세 선배들도 서로의 캐릭터가 가진 장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완해가며 순조롭게 전투를 진행했다. 얼핏 그들은, 초보자가 있는 것을 감안해서인지 정석적인 전개를 쭉 따르는 정도의 미덕도 보이는 듯했다. 돌발상황이 일어나지 않으니 게임마스터인 슈도 편했다.

이야기 속 일행은 여러 고비를 거쳐서 결국 지하 세계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진실은 참혹했다. 바로, 고블린들은 이름도 존재도 시민권도 지워진 채로, 왕국의 마법공학 시설들을 가동하기 위해 지하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진실이었다. 지금까지의 공격 역시 사악한 외세의 침략이 아니라, 이름을 잃어버린 이들의 봉기였던 것이다.

일행은 기로에 빠졌다. 어쨌든 모험가들은 왕국의 질서에 매여있고, 고국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다. 왕에게 충성을 바치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적 있는 성기사, 왕국이 아닌 타지에서는 받아들여지지 못하는데다 지켜야 할 일족이 있는 엘프 마법사, 그리고 왕국의 주신을 모시는 사제. 와타루와 레이, 카나타가 연기하는 캐릭터들 역시도 그런 설정들이었다. 조금 별난 것은, 보이지 않는 상상의 친구를 가진, 근본 없는 태생의 선술집 음유시인이었던 미카의 캐릭터 정도일까. 그러나 왕국은 명백하게 누군가를 착취하고 적으로 규정하여 평화와 번영을 성립시키고 있었다. 적당히 회유할 것인지, 고블린 반란군의 수장 목을 치고 무력진압을 할 것인지 갑론을박이 오고 있을 때,

"내는, 이런 거 용납 못 한데이! 혁명을 일으킬 기다!"

자신의 역할에 한껏 몰입한 미카는, 결국 이 사실에 분노해 선언했다.
그렇게 본래는 사악한 지하의 종족을 처단하기 위해 파견된 '용사'일 터였던 미카의 캐릭터는, 핍박받으며 역사 속에서 지워진 지하의 주민들을 지키는 혁명 투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슈는 이 일에 적잖게 당황했다. 슈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순간 침묵했다. 미카가 첫 플레이부터 저런 당돌한 선언을? 순식간에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날 위기였다. 더군다나, 이런 식으로 메인 시나리오에서 탈선할 경우, 플레이어의 의도를 아주 가로막지는 않으면서, 아득히 강력한 적과 싸우거나, 기적이 일어나야만 가능한 목적을 제시하는 식으로 선을 그으면서, 시나리오의 길을 찾아주는 것이 마스터의 도리였다. 그것은 곧 미카의 선언을 좌절시켜, 첫 플레이부터 상심을 남길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슈 자신도 왠지 모를 반발심이 일었다. 비록 시나리오 속의 적들에 불과하지만, 과연 여기에서 이대로, 단지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존재를 허용받지 못하는 이들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결국 슈는, 마음을 먹고 미카에게 말했다. 그만이 알 수 있는, 도전적인 눈빛을 미카에게 향하며.

"당신이 반란을 일으켜야 할 이유를 설명해주세요. 그것을 당신의 동료들과 게임마스터가 납득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 눈길은 확실했고, 제안을 던지는 슈의 입은 웃고 있었다. 그러자 미카는 그 시선을 보고 도로 눈을 깜박여 화답했다. 그리고, 자신의 캐릭터 설정을 적극 활용해 회상 장면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음유시인의 보이지 않는 친구는 사실 고블린이었고, 그는 동족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지하에서 도망쳐나와 음유시인에게 제 이야기를 전달해주었다. 음유시인은 처음에는 그것을 먹고 살기 위한 흥미로운 이야깃감 삼아 노래로 만들어 불렀지만, 점점 고블린의 처지에 깊이 슬퍼해 도울 길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여명의 나라의 법에서 고블린은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지하에 미지의 존재가 산다는 뜬소문 같은 노래로 우회적으로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괴담처럼 퍼지고 퍼질수록 친구의 동포들은 악명으로 세상에 알려지겠지만, 적어도 사람들은 지하에도 누가 산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왕국은 당신들에게선, 정말로 앗아간 것이 없나요? 왕국의 평화를 위해서, 당신들은 어떤 소중한 것을 희생하거나, 또는 희생당했나요?"

미카의 절절한 구연이 끝나자, 세 사람에게도 슈의 단호한 질문이 돌아왔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곰곰이 생각했다. 듣고보니, 자신이 만든 캐릭터들도 왕국에 매여있을 뿐 왕국에 충성할 입장은 아니었던 것이다. 충직한 기사는 기사단의 기강이 허용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다 왕국에게 연인을 잃었다. 엘프 마법사는 왕국에서 받아들여진 대신에 옛 언어와 풍습을 말살당했고, 그의 일족은 그 말과 풍습을 비밀스레 전승하는 이들이었다. 왕국 주신의 사제는 본래 개종당한 이교도의 후손이었으며, 신전에서 온갖 정보를 차단당한 채 비인간적으로 키워져 왕국 밖의 세상을 몰랐다. 왕국은 그들의 존재를 허용했지만,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박탈한 것이다.

잠시간의 상의가 끝나고, 와타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원래대로라면 악역은 쓰러지는 게 정답이지요. 하지만 영웅도 악역도 결국 역사가 정한 것. 이면의 이야기는 항상 흥미를 끌어왔고, 이야기를 만드는 놀이에서 배역의 운명은 만들기 나름. 카게히라 군은 초심자지만 많은 가능성을 가진 것 같으니, 한번쯤 이 아이와 이 아이가 굴릴 주사위의 말을 들어보지 않겠습니까?"

그에 뒤이어, 레이도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미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예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구만. 사실 나는 혼돈 성향 플레이도 괜찮다네."

그 어조는 마치 정말로 세상을 멸망시킬 마왕과도 같은 패기가 느껴지는 연기였다.

그런 둘의 반응을 본 카나타는 조금 놀란 듯 뜸을 들이다가, 어느새 부드럽지만 곧 거세질 파도의 전조마냥 살벌하게 웃으면서, 

"그러게요. 전부 바다의 '쓰레기'로 만들어버려요."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시나리오의 의도대로는 아니지만, 어떻게 단합이 되긴 했다. 슈는 이 가능성을 보면서, 점점 어조에 흥이 실리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자신은 이 모든 이야기를 관조하고 행동에 따른 결과를 낭독할 뿐인, 게임판 밖의 이야기꾼이지만, 이렇게 벅찰 수가 없었다. 

"아아, 그렇게, 일행은 이 시점에서, 이들을 품어준, 그러나 이들에게서 소중한 것을 앗아간 나라에 반기를 들기로 했습니다. 혁명이다, 혁명! 빨강! 분노한 자들의 피! 검정! 어두운 옛 시대!"

이쯤 되면 오히려 슈가 더 신난 듯했다. 그렇게 슈가 미카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서사시를 읽듯이 위풍당당하면서도 절조 있게 이야기의 내레이션을 몇 번 더 읊고, 똑또그르르, 하고 몇 번 주사위가 구르자, 왕국의 운명은 결정지어졌다.

결국 모험가 일행의 칼날은 본래의 임무와는 달리 왕의 목을 향했고, 왕국의 조약 역시 깨지고 말았다. 왕을 잃어버리고 한순간에 왕국이 무너지게 생기자 국민들은 비탄에 빠졌다. 그 탓인지, 새로 왕위에 오른 자들도 얼마 못 가 끌어내려졌다. 공통의 이해를 잃은 이종족들은 나라에 은연중에 존재했던 차별들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지하의 주민들이 하나둘씩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많은 다툼이 있었다. 하지만 왕국은 멸망하지는 않고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혼란스러웠던 나라에서는 왕 대신에 국민들의 지지를 얻은 지도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고, 모든 국민들이 조금씩 마력을 분담하여서 이 땅의 기반을 재정립하기 시작했다. 고블린들 역시 그들의 마법기계에 대한 조예를 살려 성공적으로 나라에 정착하고, 나아가 다른 종족들과 같이 시민권과 투표권을 얻게 되었다. 그렇게 여명의 나라는 삐걱거리면서 또다른 여명을 맞이하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렸다. 
슈는 노곤한 한숨을 쉬면서 룰북을 덮었다. 뿌듯한 얼굴이었다.

"다들 수고 많았다. 모처럼 게임마스터를 맡는 보람이 있었단 게야."
"완전한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해피엔딩이 주어지지 않을 이들에게도 나쁘지 않은 결말이 주어진다는 건 꽤나 감동적이네요. 그죠, 슈?"
"이츠키 군의 구연, 꽤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군. 모처럼 세상을 삼켜 태울 듯이 굴어볼 수 있어서 나도 그리운 기분이었지. 그리고 나도 카게히라 군의 활약상, 굉장히 마음에 들었네." 
"응아아, 사쿠마 선배, 내 처음 해가 마이 헤맸는데 괘않았나?"
"그런 패기가 신참에겐 중요하고 말고."
"미-씨, 잘 해줬으니까 착한아이, 착한아이 해 줄게요."
"신카이 선배, 너무 쓰다듬으면 스승님이 자기도 쓰다듬을라 칸데이."
"카게히라, 무슨 소리를. 내가 아무리 카게히라를 쓰다듬는 걸 좋아하고, 네가 기뻐하는 걸 보면 나도 기쁘다 해도, 네가 만인에게 사랑받는 것까지 막고 싶은 건 아니야. 너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아이니까."
"사랑받는 데 자격이 필요하나?"
"...아무튼, 고마워요. 슈. '영웅'은 아니지만, '용기' 있는 자가 될 수 있게 해 줘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도 그들은 서로의 연기와 활약에서 좋은 점들을 찾아가며, 그 자리에서 화기애애한 이야기꽃을 피웠다. 건너편의 나츠메네 팀에서도 박수 소리가 나는 걸 봐서 비슷한 시간에 게임이 끝난 것 같았다.

"수고 많았'어'. 이쪽은 깔끔하게 전원 사망 엔'딩'. 그쪽'은'?"
"이걸... 해피엔딩이라 캐야 하나? 뭐, 크게 뒤엎고 왔데이."

다들 상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나츠메는 저 멤버를 갖고 어떻게든 이야기의 결말을 매듭지은 게 용하다 싶어, 슈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슈 형... 엄청 수고 많았어."
"별로 고생은 안 했어. 카게히라도 빨리 적응했고."
"나츠메 당신이 이 결말을 봤어야 하는데요."
"...됐어, 와타루 형, 굳이 안 알려줘도 '돼'."

나츠메는 뭔가 귀찮은 이야기가 될 것 같다는 듯이 와타루의 말을 잘랐다. 때마침 나츠메의 노트북에서는, 멀지 않은 과거에 다섯 친구들이 만들어 부른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와타루는 싱긋 웃으면서 굳이 더 말하지 않았다.

단지, 이런 놀이에서나 허용받을 '이면의 이들'의 행복을 꿋꿋히 빌고 - 그것조차도 대의도 이타심도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 자신만의 작지만 큰 혁명을 계속해오던 제 벗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것은 아마, 슈와 함께 한때 '기인'의 이름을 공유했던 이들이 같으리라.


어느덧 생일 파티도 무르익고, 밤이 찾아왔다. 오늘 밤새도록 눌러앉겠다는 게 빈말은 아닌지, 새벽 첫 차 이야기가 잠깐 오갔다. 금요일 밤이니, 열기가 끊이지 않을 수밖에. 모인 이들은 자신이 가져온 과자나 음료수, 게임 콘솔이나 자랑거리 등을 즐기며 제각각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주역부터가 괴짜였던 탓인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말해도 그 광경 속에서는 공존을 이뤘다. 카나타가 바다 생물에 대한 지식을 피력하면 거기에 이어 이즈미가 이탈리아의 해산물 요리 이야기를 했고, 거기에서 레오가 피렌체에서 진짜로 있었던 괴상한 체험담들을 끼얹으면, 레이가 옛날 이야기를 하듯이 괴담들을 꺼내오고, 이에 질세라 미카는 B급 호러 영화의 클리셰를 신난 듯 나열하기 시작했다. 저마다 관심사도 반응도 다른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떻게 성립했다. 이야기에 굳이 끼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나츠메는 잠시 혼자 뭐 좀 하겠다며 노트북에 파묻혀 있었고, 쿠로는 조금 전에 바람 좀 쐬러 나가겠다며 실내를 떠났다. 와타루는 어디로 갔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만, 좀 있으면 사람 깜짝 놀라게 하면서 나타나겠지.

존재도 부재도 합해, 그 하나하나의 이질성이 조화되어 만드는 기묘한 어우러짐을 슈는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잘 놀고 있으니 다행이군. 그야, 다행인 일이었다. 취미도 성격도, 그 밖의 피치못할 '어떤' 것들도 다른 이들. 그들의 공존. 만약 제게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자신이 지금만큼 비틀린 인간이 되지는 않았을, 바라 마다않았던 순간이다. 거기다, 자신을 매개로 모인 자리에서, 가까운 친우들이 가지는 행복이 나쁠 이유가 있나. 
행복? 나를 주역으로 해서?
또다시 찾아오는, 찬바람처럼 엄습해 온기의 세상으로부터 그를 떼어놓는 감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그에게 걸맞지 않다고 말하는, 기억 속의 망령들. 자신이 이미 죽이고 또 죽인 제 마음 내부의 목소리들이 이명이 되어, 잠시 눈을 감고 가슴을 움켜쥐게 만들었다. 잠깐 마실 것 좀 사러 가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자유롭게 말하도록. 저를 홀리는 삿된 생각을 씹어삼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꾸며내며, 슈는 허공에 이끌리는 것처럼 하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슈가 바람을 쐬러 별채 밖으로 나가면, 본인 말대로 쿠로가 먼저 선수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밤이 어두워 그늘진 동안에도 키는 커서 확실히 누군지 잘 알아볼 수 있었다. 

"이츠키, 분위기는 마음에 들어?"

쿠로가 슈 쪽을 돌아보면 슈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그 옆에 와 섰다. 파리보다는 덜 추웠지만 그래도 밤바람은 꽤나 쌀쌀했다.

"썩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것 치고는 꽤나 즐기고 있던걸."
"칫. 굳이 분위기 좋은데 초 치는 취미는 없단 게야."
"이럴 거면 작년 생일때처럼 헹가래라도 해줄 걸 그랬나?"
"그렇게까지는 됐어. 뭐, 졸업하기 전에 생일날 하루라도 좋은 추억을 만들어준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도... 새삼 그립네. 너희 집에서 맞이하는 네 생일이라니, 역시 옛날 생각 나고."

쿠로는 그 말을 하고는 아차, 하는 듯이 슈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슈는 딱히 거기에 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무리하지 마. 옛날 이야기를 해서 어차피 상처받는건 너도 나도 마찬가지인데, 나도 그 정도의 섬세함은 있으니까." 

슈는 의연하게 제 친구의 배려를, 강한 척 대신 저도 이제야 조금씩 익힌 서투른 배려로 받았다. 

"...이제는." 그리고 찔리는 게 있는지 슈는 정정했다.
"뭐, 우리가 많이 변한 건 맞으니까. 너도 고등학교 다닐 때랑은 또 변했고. 좋은 쪽으로."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추억 속의 두 사내가 선 느즈막한 밤 정경은, 흡사 담배라도 한 대 태우면 분위기 있는 그림이 될 듯했으나, 둘 다 흡연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조금 쌀쌀한 날씨에서 다른 태울 것을 찾아야 했다. 이를테면, 타고 남은 잿더미로밖에 남지 않은 어릴 적 사진들 사이에 서린, 불완전연소된 응어리들이라든가.

"말은 그렇게 해 놓고 뜬금없는 소리지만, 미안하다. 지금까지의 일들."

슈의 말에 쿠로는 사뭇 놀란 듯이 음? 하고 소리를 냈다.

"별로 그럴 필요는 없어. 나는 그럴 만한 인간이니까..."
"정말, 언제까지 그럴 셈이야. 오히려, 그건 내가 할 말 아닌가. 스스로의 고통에 매몰되어, 나의 우군일 이들조차 등지고, 아무것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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