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2017년 4월 2일 앙상블 스타즈 온리 이벤트 '개화! 앙상블 페스티벌' 에 낸 카게히라 미카 중심 소설회지 'Twin Tail Tales'의 웹공개 버전입니다.
커플링 요소는 옅습니다만 미카른(주로 슈미카, 나루미카)요소로 읽힐 수 있는 묘사가 일부 존재합니다.
주의사항
'여장'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가급적 피하려고 했습니다만, 남성으로 패싱되는 캐릭터가 일반적으로 여성복, 여성의 모습이라 간주되는 차림새를 하는 묘사가 존재합니다. 또한, 등장 캐릭터들의 젠더 정체성에 대한 독자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캐릭터간의 관계나 호칭에 대한 추측, 캐릭터의 과거나 심리상태 등 상당부분 날조 설정이 많습니다. 캐릭터 붕괴가 넘쳐납니다.
목을 간지럽힐 정도로 머리가 뻗었다.
세수를 하고 나오다 얼굴에 달라붙은 젖은 옆머리를 뒤로 넘기다 보니 머리가 길어진 것이 눈에 띄었다. 소년이 마지막으로 머리를 잘랐던 때를 향해 날짜를 거슬러 올라가니, 제 동거인이 머리를 잘라주지 않은 지 한 달은 족히 지났다. 얼핏 무질서하게 뻗친 검푸른 머리는 밀리미터 단위의 세공의 결과물이었고 항상 일정한 길이로 유지되고 있었다.
인형에게 자라는 것은 필요가 없었을 텐데. 집요할 정도로 완벽에 집착하던 동거인이, 자신의 유지보수를 빼먹는 일은 없었다. 자주 깜박 잊는 소년도 그에게 관리받는 날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 머리가 이렇게 길었었나? 안타깝게도 아직 인형의 작은 머리로는 그 이상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완전무결한 제 스승이 틀렸을 리는 없다고 믿었으므로, 그는 원래 이 정도 길이였겠거니 하고 결론을 내렸다.
목을 긁적이면 아래로 삐쳐 늘어진 머리가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역시 꽤나 길었다. 그 감촉이 신기해 몇 번 숱을 쥐었다 펴 본다. 이 정도면 묶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소년의 머릿속에 문득 예쁜 것들이 떠올랐다. 그 사람의 방에 있었던, 금발의 아름다운 인형 아가씨를 떠올린다. 그녀 뒤로 카탈로그에서나 보던 인형들의 머리칼이 나부꼈다. 결 좋은 인조 모발을 가지런한 양갈래로 동여매고 있던 리본과 장식들이 떠오른다. 상상은 손에 착착 감겨, 정신을 차렸을 때면 왼쪽 손이 머리를 쥐고 묶을 머리를 가늠하고 있었다. 한 움큼 묶을 정도의 숱이 모였으니, 이 정도면 묶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발끝을 세워 살금살금 자기 방으로 가, 서랍의 멋없는 검은 고무줄 두 개를 꺼냈다. 예쁘지는 않지만 연습삼아 쓰기엔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나는 손목에 감고, 하나는 입에 문다. 다시 왼쪽 머리를 쥐고 엄지와 검지에 건 고무줄을 휘휘 감는다. 오른쪽을 쥐고 또 묶는다. 세면대의 거울 앞에는 비뚤어진 양갈래 머리를 한 자신이 있었다. 고무줄 사이로 삐죽하게 몇 가닥의 잔머리가 삐져나온 것이 조금 거슬렸다. 아, 역시 나 혼자 묶으면 짝이 안 맞네. 하지만 왠지 묘한 쾌감이 들었다. 평소에 거울을 보면서 만족해본 적이 없었던 탓인가, 가슴에 들어차는 들뜬 기분이 생소했다. 하지만 그 기분은 중독성마저 있었을 정도로 좋았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스승님의 인형.
어떤 인형이 되고 싶은가.
그것은. 아름다운? 우아한? 예쁜? 아니면.
생각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답이, 처음으로 그의 머릿속에서 싹트려 하는 순간이었다. 그 단어를 규정하는 순간, 인형은 또 한 번 제 발로 설 힘이 생기리라.
'그런데, 그런 머리를 하는 아이들은...'
어디선가 그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소년에게 달라붙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뭇 인간 소년들에게 금제처럼 그 목소리는 찾아올 채비를 한다. 다만 그는 인형이었기에, 기왕 제 손으로 처음 시작한 꾸미기 놀이를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
카게히라 미카와 이츠키 슈, 두 사람의 집에서 아침식사는 중요한 루틴이다. 인형사의 갖은 노력으로 이젠 식사를 거르는 일을 겨우 면한 유기체 인형은 앞에 차려진 접시에 놓인 달걀 프라이의 노른자를 어떻게 하면 훼손하지 않고 입에 넣을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미카는 젓가락을 어색하게 놀리며 왼손에 쥔 숟가락 위로, 흰자를 해체하고 남은 둥근 노른자를 천천히 밀어올렸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헛놀리는 순간 한 쪽 젓가락이 푹 하고 노른자를 찔렀다.
"응아앗!"
찢겨나간 막 사이로 샛노란 것이 걸쭉하게 흘러내리니 상처에서 피라도 흐르는 듯 아프게 보였는지, 표정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갑자기 식탁에서 큰 소리를 치지 않아도 식사는 어디 안 간다."
"응아아... 미안타... 병아리씨! 미안타!"
이미 생명이 되기도 전에 뱃속으로 들어갈 운명은 마찬가지였던 계란 프라이에게 두 손 모아 사과하는 해학적인 모습에 슈는 평소처럼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입꼬리가 의뭉스럽게 올라가 있었다.
"으응... 스승님? 스승님도 병아리씨가 불쌍한 기가?"
"어차피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을. 자, 흘렀다고 남기지 말고 다 먹도록 하여라."
방정맞게 구는 미카의 행동을 여유롭게 받아넘기며 슈는 미카의 접시에 흐른 노른자 속을 숟가락으로 긁어, 아, 하는 소리에 맞춰 입을 벌린 미카에게 먹여주었다. 입가에 묻은 노른자위를 키친타월로 닦아주는 것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슈가 미카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머리에 손이 닿는 감촉에 미카가 흠칫 멈췄다. 머리를 쓰다듬으면 마냥 좋기만 하던 평소와는 달리 찡하고 피부 표면이 당기는 기분이었다.
"영양분이 생겼군."
"응? 무슨 소리고?"
"결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다. 역시 단백질을 늘리는 것이 도움이 된 모양이구나."
슈는 몇 번 미카의 머리를 쓰다듬다, 목 아래까지 덮인 끝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의아하게 그 손길을 바라보던 미카는 손이 떨어지고 침을 한 차례 삼켰다.
"스승님, 내 머리, 그..."
자를 때 되지 않았나. 그렇게 묻고 싶지만, 동시에 왜인가 물었다간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무엇이냐."
"내 머리, 멘테 안 해줘도 되나?"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늘 하고 있다만?"
"아, 그나. 그냥 쪼까 머리 느낌이 바뀐 거 같아서?" 길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고르지 않은 채 미카가 물었다.
"나는 그저 늘 하던대로 너를 조율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네 머리부터 사지의 끝까지, 내 손이 닿은 것에 오차가 있을 리가 없어. 네가 그렇게 느낀다면, 스스로의 몸이 좀 더 구색을 갖췄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겠지. 걱정하지 말거라."
"아... 마, 글쿠나. 아침 잘 먹었데이."
온화한 어조의 확인에 그제서야 역시, 이 길이는 스승님이 그대로 주신 길이가 맞구나, 하고 미카는 안도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만약에, 스승님이 허락한 길이가 아니었다면?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어쩐지 그것을 의심할 겨를을 주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미카의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떠오르곤 했다. 왠지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은 좀 더, 아직은 말로 쉬이 표현할 수 없는 자신만의 미학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슈가 좀전에 쓸어준 머리카락을 자기 손으로 한번 덧쓰고는, 그가 부르는 소리에 공상에서 돌아온 미카는 현관으로 향했다. 그의 손목에는 어제 머리를 묶었던 검은 고무줄 두 개가 걸려 있었다.
*
카게히라 미카가 소속된 2학년 B반 교실은 말하자면 유메노사키 학원에서 조금 버릇이 있는 아이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럼에도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라 서로의 기벽에 간섭을 하지 않는 분위기는, 의외로 타인을 어떻게든 존중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서 기묘한 단합력을 자아냈다. 가령 누군가가 종일 잠만 자거나, 옷소매에 구멍을 내서 다니거나, 웃는 얼굴과 정중한 말씨로 듣도 보도 못한 흉기의 이야기를 하거나, 자판기에서 뽑은 밀크티 같지도 않은 정체불명의 음료를 즐겨 마신다 해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한 사람이 조금 특이한 머리모양을 하고 등교한다고 해서 잠깐 술렁이다 마는 것 말고 달라지는 것은 없을 터였다.
"내 왔다!"
교실의 문이 열리면서 학생들을 맞이한 것은, 분명히 카게히라 미카 본인이었다. 코맹맹이 소리가 섞인 사투리 억양도, 학기 초에 비해 해맑아진 웃음도 분명 그였다. 단 하나, 엉성하게 양갈래로 묶인 머리를 빼면 말이다.
"미카쨩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어머, 미카쨩 꽤나 귀여운 머리를 하고 있구나?"
귀엽다. 그 말을 처음으로 입에 낸 것은 미카의 영혼의 단짝인 나루카미 아라시였다. 밀크티라고 부르면 누구라도 반발할 유명한 유사 밀크티 상표의 병을 든 손에 익숙한 반지가 빛났다.
"그나? 고맙데이. 내 오늘은 쪼매 기분전환으로 해봤다 아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미카는 고개를 조금 까딱여 갈래머리를 흔들어보였다. 그 모습이 자랑스러운지, 아라시는 그의 눈만큼이나 색다른 비대칭의 양갈래를 한 친구를 껴안을 듯한 시늉을 한 번 하고는 팔을 어깨에 둘렀다. 거기에 떠밀리듯이 응아앗, 하고 뒤로 밀린 미카가 반사적으로 묶은 머리 근처로 손을 올렸다. 그렇게 밀면 풀릴지도 모른데이. 교실에 들어오기 전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몇 번 시행착오를 거듭한 그럴듯한 결과물이었으니.
"응앗, 나루쨩, 그거 오후의 홍차 아이가? 요즘 그거 마이 묵는구마."
"왠지 조오금 마시고 싶어졌달까? 본격적인 밀크티는 아니라도 그 알싸한 맛이 꽤나 버릇 될 거 같아서 말야. 미카쨩도 마실래?"
"아니, 됐다. 스승님이라면 그런 거 유사 밀크티라고 싫어할 끼고..."
"또 이츠키 선배의 이야기야? 정말이지 그 사람, 쓸데없는 데서 고리타분한 게 마음에 안 든다니까... 오후의 홍차는 새로운 음료수의 장르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그렇게 맛있나... 내는 모르겠데이. 내는 칼피스가 좋다." 미카는 손에 든 음료수가 성수라도 되는 듯 이야기하는 아라시를 보며 머리를 긁적이려다 묶은 머리가 또 삐칠까 신경쓰여 대신 교복 셔츠 아래로 길게 뻗은 검은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 카게히라 님, 좋은 아침... 꽤나 와일드한 머리를 하고 계시군요." 미카의 뒤에서 또 한 사람의 친구, 후시미 유즈루가 걸어와 인사를 건넸다.
"윳군도 좋은 아침. 머리가 심심해서 쪼까 꾸며봤다."
"꽤 괜찮은 센스로군요. 저라면 좀 더 오른쪽을 아래로 묶는 걸 권하겠지만. 그나저나 나루카미 님은 오늘도 유사 밀크티를 마시시다니..."
"유사 밀크티 아니라니깐?" 아라시는 소중한 밀크티 상표에 태연하게 모진 말을 내뱉는 유즈루에게 쏘아붙였다.
"그야, 제대로 찻잎을 우려내 시간을 들여 끓인 게 아니니까요."
"그런 거 상관없잖아! 홍차라고 쓰여 있으면 홍차인 거야!"
"흐아암, 응? 낫쨩, 또 그거 마시는구나." 취향에 대한 사소하지만은 않은 대립이 이루어지는 와중에, 건너편 책상에 엎어져 곤히 자고 있던 검은 머리의 소년, 사쿠마 리츠가 눈을 한 번 비비고는 한 마디 한다. 그 역시도 아라시가 들고 있는 밀크티 병을 슬쩍 흘겨보더니 "그거 진짜 홍차 아니니까." 하고 또 아픈 한 마디를 던진다.
"리츠쨩까지 그래? 너희 말이 심하다?"
"그거 향도 없잖아."
"뭐, 향을 더하는 것만이 중요한 건 아니죠. 저는 가향차 취향은 아니니까요. 역시 스트레이트인 편이... 뭐, 사쿠마 님이 좋아하는 부분도 이해는 합니다. 거기다, 적어도 홍차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아무리 유사 밀크티라고 음해당해도 나는 오후의 홍차 편이야! 그래, 향이든 정식 절차든 없을지 몰라. 하지만 여기, 이렇게 나는 홍차입니다, 라고 오후의 홍차가 말하고 있다고! 그걸 부정하면 홍차, 울어버려! 이 누나도 울어버려! 미카쨩은 알고 있지!"
오후의 홍차가 유사 밀크티냐 아니냐로 시작한 아침 수업 전의 이야기는 어느새 유사 밀크티 파인 아라시와 스트레이트 파인 유즈루, 그리고 평범한 얼 그레이 파인 리츠의 대립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이야기를 전혀 따라가지 못한 미카는,
"응아앗, 내는 칼피스가 좋다..."
라면서, 그저 그들을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과연 유사 밀크티와 정식 차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미카에게는 생각할수록 머리만 아픈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냥 자기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거 무면 안 되나...'
"어, 미카링, 거기 있었어?"
"아까부터 있었는데! 홍차 모른다고 없는 사람 취급이가!"
"홍차는 몰라도 미카링, 오늘 머리는 꽤 귀여우니까 특별히 선심 써서 끼워주는 걸로."
"응앗?!"
또 귀엽다는 말을 들어버렸다. 눈치채면 리츠가 슬쩍, 미카의 머리 끝을 쓰다듬고 있었다. 이렇게 가끔, 리츠는 극세사 담요 같다면서 미카의 머리를 만지곤 했었다.
"카게히라 님은 좀 더 자신을 가져도 좋으니까요. 귀여운 게 용서되는 사람이라는 건 굉장한 이득이니까, 좀 더 마음껏 써먹으셔도 좋다고 봅니다."
"응아앗?!" 이번엔 유즈루가 미카의 왼쪽 손을 정중하게 에스코트하듯 붙들었다.
"잠깐, 리츠쨩도 유즈루쨩도 미카쨩을 빼앗아갈 생각뿐이네. 욕심쟁이들. 안타깝지만 귀여운 미카쨩은 내가 가져버릴 거야. 나도 한 욕심쟁이 하거든."
"응아아앗?!" 이에 질세라, 아라시는 미카의 어깨 너머로 손을 잽싸게 집어넣고 미카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이렇게 열띤 홍차 토론회는 순식간에 카게히라 미카 쓰다듬기 모임으로 변질되어 사이좋게 막을 내렸다.
다른 때 들었다면 나는 그럴 리가 없다, 라며 부정했을 말들이 하나둘씩 미카에게로 모였다. 그렇지만 왠지 그런 말을 들어도 낯간지럽지가 않았다. 머릿속에서 조각난 그림이 하나둘씩, 가장자리부터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귀여워? 이런 머리모양, 귀여운 거...'
내가 되고 싶은 인형은 무엇인가. 미카는 다시 생각의 바다에 빠졌다.
'인형 같이' 라고 하면, 귀엽다는 말이 따라붙는 것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미카 자신조차도 쓰레기장이나 헌옷수거함 근처에서 여러 인형들을 주워오면서, 그들을 귀엽다고 생각하곤 했다. 귀여운 것을 보면 마음이 안정된다. 버려졌던 인형인 자신은, 귀여워지는 것으로 스승님의, 그리고 소중한 일상 속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으로 여태까지 입어온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그런 인형이 되고 싶은 것일까.
아니, 다르다.
그것보다는 조금 더 내놓고 자랑하고 싶은 감정이었다. 귀엽다는 말을 들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건 오히려 자기 쪽이었다. 간질간질하던 느낌이, 처음 머리를 묶었을 때처럼 또 가슴 가장자리까지 크게 확산되어 간다. 조금 더 귀엽다는 말이 듣고 싶었다. 나는 귀여워, 내가 귀여운 걸 봐줘. 그런 조금 주제넘은 감정. 귀엽다는 말로 존재가 증명되는 자신에 대한 확신. 이런 것을 가져도 될 것인가.
확실한 건, 미카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한 가지 미의 지표가 생겼다는 것이다. 자신은 귀여운 인형이 되고 싶은 거라고.
그것은 누구를 위해서. 그것까지는 자신조차도 아직 몰랐다. 하지만 응당 옳은 답은 적어도 지금 싹튼 것은 아닐 것만 같았다.
수업이 시작된 이후로도 미카의 머리는 꽤나 주목을 받았다. 한 시간 단위로 바뀌는 교사들이 꽤 특이한 취향이라며 몇 마디씩 하곤 했다. 다행이도 그들이 교칙이나 규범을 들어 미카를 저지하지는 않았고, 흔히 있는 반 아이들의 장난이겠거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때마다 미카는 왠지 장난 아니데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왜 그런지는 자신도 정확한 자각이 없었다. 귀여운 것은 진지하지 않은 것일까, 다만 그런 추측을 할 뿐이었다.
집단생활인 이상 2학년 B반에서도 정상성에 집착하는 무리는 있기 마련이기에, 쉬는 시간마다 미카의 머리를 두고 수군대는 사람들도 몇 명 정도는 있었다. 그때마다 미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의 과보호 기질 많은 단짝 아라시가 끼어들거나, 반장인 이사라 마오의 중재가 이루어져 잠잠해졌지만, 잊을 만하면 또 누군가는 미카에게 시비를 걸 틈을 노리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 소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주변엔 관심이 없이 잠만 자던 리츠가 성가신 듯 한 마디 했기 때문이었다. 마-군도 머리에 핀을 꽂고, 임금님도 머리를 묶는데, 고작 한 갈래가 두 갈래가 됐다고 왜 그리들 소란이냐고.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정도면 어지간히도 민폐라는 것을, 소란을 시작한 본인들도 아는 법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미카는 주변이 왜 그렇게 소란인지 알지 못했다. 자신은 그저 귀여운 머리를 했을 뿐인데. 단지 자기 때문에 시끄러워지는 건 미안하니까, 미카는 오늘 점심은 옥상에서 스승님과 같이 먹기로 하고 점심 종이 울리자마자 교실을 떠났다.
'그런 머리를 하는 건 ...밖에 없어.'
소년에게만 찾아오는 금제가, 다시 한 번 상식에 둔한 인형을 노리고 있었다.
*
3학년 A반 교실의 앞에서 쭈뼛거리며 미카는 제 스승을 기다렸다. 별 일 없는 이상 하급생이 상급생을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고, 특히나 A반은 학생회의 관계자들이 있어서인가 쉽게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에 동급생이 아니면 발길도 잘 들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오로지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꾸준히 방문하는 건 미카 정도였다.
"이츠키네 걔 올 때 됐네... 아, 너, 지금 이츠키는 없어."
교실 문이 열리고, 눈높이 차이가 그리 나지 않는 은발의 상급생이 귀찮은 것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미카에게 말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의 눈도 미카의 양갈래 머리로 갔다.
"너..."
평소라면 조금 신경쓰이는 것을 향해 어떤 말이든 쏘아붙일 위인이었던 세나 이즈미도, 이 상황에는 할 말을 잃은 듯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고생이 많구나." 몇 초간 말을 고르고 결국 그는 그 정도로 해 두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그의 후배가 조금 특이한 모습을 하고 나타나도, 꽤나 마음 맞는 친구에 대해서 험담을 하는 것은 그 이즈미라도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에예. 세나 선배도 울 스승님 마이 챙겨줘서 고맙습니더."
"그나저나 그런 쓸데없이 귀여운 모습으로 여기 있는 건 좀 곤란할 거야. 우리 반 애 중에 그, 이런 걸 보면 귀찮게 반응하는 애가 있어서. 이츠키도 걔를 별로 달가워하진 않지만. 혹시 엇갈렸으면 빨리 돌아가라고. 너희 반 앞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즈미는 교실 안의 눈치를 보며 어서 가라는 듯 미카에게 손짓을 했다.
"그, 그건 우예 아는..."
"얘도 진짜 둔해서... 이래선 고생이 많은 건 오히려 이츠키 쪽이겠군. 자, 어서 가. 귀찮은 일 생기기 전에. 하카제가 널 보면 그냥은 끝나지 않을 거라고."
"으, 누군진 모르겠지만 조심할게예. 그럼..."
미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계단으로 달려갔다. 역시나 이즈미의 말대로, 내려가는 도중에 슈와 마주치게 되었다. 가끔 이렇게 서로를 만나러 가다가 엇갈리는 일이 생기곤 했기에, 큰 일탈은 아니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와 달리 미카의 머리가 앙증맞은 양갈래로 묶여있었던 것만 빼면.
"스승님 어데 갔었노? 내 찾으러 갔는데 반에 없었다 아이가."
"너야말로 어디 갔었느냐. 뭐, 보아하니 날 찾으러 갔던 모양인데... 잠깐만."
"응아아?"
"너, 머리가 그게 무슨 꼴이냐."
생각해보니 머리를 풀지도 않고 스승님과 마주친 것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감을 느낀 미카는 순식간에 슈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응아아아아아! 스승님, 미안타... 내, 스승님이 멘테해준 머리, 멋대로 이리 만들었데이. 내는 역시 스승님 말도 안 듣고 도움도 안 되는 실패작이고..."
"그런 싸구려 고무줄로 머리를 묶으면 기껏 영양액까지 바른 머리가 상하지 않느냐. 그리고 머리숱이 삐져나와 있는 것이다."
"어?"
의외의 반응에 미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슈에게 말도 안하고 멋대로 이런 머리를 하고 돌아다녔는데, 그걸 가리켜 화내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럼 무엇에 화가 난 것인가 하니, 애초에 화가 나지도 않았는지 지극히 평온한 표정으로 미카를 제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닌가.
"이리 오거라. 내가 제대로 묶어줄 테니까."
슈는 미카의 머리를 묶은 고무줄을 조심스럽게 당겨 머리를 풀었다. 고무줄에 머리가 엉켜 몇 가닥이 빠져나와 미카가 가벼운 비명을 지르자, 쯧쯧, 하고 혀를 몇 번 찼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붉은 리본을 꺼내, 미카의 머리를 단정하게 묶어주었다. 슈가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에 미카의 표정이 흐물하게 풀렸다.
"마음에 드느냐."
"스승님이 그렇게 묻는데 내가 어케 딴 대답을 할 거 같나?"
"바보같은 것. 마음에 드냐고 물었으면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는다고 대답하란 것이다."
"으응, 마음에 꼭 든다."
어차피 미카의 대답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오늘따라 슈는 거슬렸다. 평소에도 생각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듯 보였지만, 유난히 자기 일만 되면 미카는 절대적인 긍정 이외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답답했다. 한때야 말 잘 듣는 인형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태도의 해악을 깨달은 것도 있고, 무엇보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유메노사키를 떠났을 때가 곤란하다. 당연히 1년 정도 떨어진다고 발키리가 해산할 일은 없지만, 유메노사키 학원 안에서 미카가 혼자 활동해야 하는 기간은 피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한 대비를 지금부터라도 철저히 시켜둬야만 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할 이야기가 있다."
"뭐꼬?"
"발키리의 향후 방향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다."
*
"라이브하우스에 자리를 잡은 건 장기적으로 봤을 땐 잘 된 일이지. 교내의 시스템에 얽매여 인기몰이에만 급급하지 않아도 되어서 여유가 있어. 요는 교내에서는 할 수 없는 실험적인 공연을 시도해볼 기회가 많다는 거다."
"응아앗, 실험? 내는 스승님이 하는 거라면 반박 안 한데이. 스승님은 최강이니까, 뭘 해도 다 알고 하는 기고."
그 말에 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큰 마음 먹고 내린 결정을 미카에게 전했다.
"이번 라이브의 테마는 네게 맡기겠다."
"응아아아아앗?!"
돌발적인 선언에 미카는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세간의 말대로, 변화를 포기해서는 그저 구시대의 유물이 될 뿐이다. 물론 유행에 편승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말이지, 나는 너와 내가 일군 청춘을 풍화하게 내버려둘 정도로 무른 인간은 아닌 게야. 그렇기 때문에"
"으응, 어려운 말은 그만하래이. 내, 그렇게 말하면 못 알아듣는다."
"역시 요점만 말하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는구나. 몸이 자란 만큼 머리도 좀 더 키우는 게 어떻겠느냐. 말 그대로의 의미다. 의상 디자인도, 무대의 연출도, 네게 맡기겠다. 그러면 거기 맞춰 내가 곡을 쓰도록 하지."
"그, 그치만 내 같은 실패작이 해봤자 실패작뿐이 안 나올 거 아이가? 그래도 괘않나? 역시 스승님이 만든 무대가 아니면 내는 힘들데이."
미카가 주눅들며 뒷걸음질치자, 슈는 미카의 어깨를 양 손으로 탁 하고 붙잡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건 보지 않고는 모르는 법이지. 요컨대, 네가 네 자신만의 미학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지 시험해보겠다는 거다. 너도 이젠 단순한 백댄서가 아니라 앞에서 노래하는 어엿한 주역의 자리에 익숙해졌을 테니 말이다. 올해 봄, 지하 라이브하우스에서 처음으로 라이브 했을 때를 기억하느냐?"
너는 스스로가 만든 기적에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좋은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좀 더 솔직하게 그 뜻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단순히 개인의 오점을 재고하는 그 이상으로 원대한 계획이 제왕 이츠키 슈의 머릿속에서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저녁, 미카는 방 침대 위에서 봉제인형들에게 파묻혀, 말 나온 김에 두 사람이서 유닛 활동을 하게 된 이후의 첫 라이브를 상기하고 있었다. 포스터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 함께 했던 네 명의 인형 동료들도 함께였다. 그 중에서 앞자리를 장식했던, 단추 눈을 지닌 보라색 토끼 인형을 꼭 끌어안은 채로, 그 무대의 미련을 떠올렸다.
종전까지의 공연에서 입던, 짙은 색 위주의 절제된 색감과는 다른, 선명한 원색의 의상. 장난감 상자를 모티프로 한 아기자기한 무대 위에서, 태엽소리 같은 드럼라인과 간질간질한 서브멜로디를 곁들인 론도에 맞춰,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인형의 언어 – 그 정체는 일본어 가사를 역재생한 것을 그대로 발음한 것이었다 – 를 불렀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끊은 두 사람의 새 시작은 결과만 놓고 보면 호평이었다. 대중성의 결여가 크나큰 약점이었던 발키리였지만, 부드러운 색감의 무대 연출과 그냥 들어선 뜻을 모를 가사의 신비성이 입소문을 모아, 작은 라이브하우스 치고는 성황이었다. 그러나 본래 노선에서 탈선하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부담을 지는 것이었으니, 한편으로는 그 의외성 넘치는 컨셉을 가리켜 '아첨한다'라고 부르는 무리도 있었다.
물론, 물러서지 않고 아첨하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 신조였던 발키리로서는 그런 평가에 굴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비난에는 당연히 화가 나기 마련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카는 그것이 스승님과 그가 만든 세계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정작 슈는 미카가 구상한 무대를 가리켜 한 마디도 모진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엄격한 스승님의 눈에, 적어도 실패작에게서 파생된 것이 마냥 실패작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따지고 보면, 무대 위에서 그런 말을 들을 법한 서투르고 어울리지 않는 세계를 만든 것은 자신이었다. 격식과 정열로 첨예하게 조율된, 우아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천국 대신에, 어린아이들이 크레용으로 그린 듯 조잡한 세계를 무대에 세운 자신이야말로 비난을 몸소 받아야 한다고 머리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으론 어쩐지, 발키리도, 스승님도 아닌, 카게히라 미카라는 개인이 모욕당한 기분이었다.
그 응어리의 좌표를 깨달은 것은 가을이 되어서였다.
어째서 귀여운 것은, 가벼운 것, 아첨으로 취급받아야만 하는가.
자신의 옛 동료이자 스승님의 최고 걸작이었던 그 사람을 떠올린다. 그는 인형을 졸업해 인간이 된 이후엔 본격적으로 귀여운 노선을 추구하고 있었다. 미카가 추구하는 조금 소름끼치는 귀여움에 비하면 좀 더 친근한 방향이었고, 오롯이 그것으로 사랑받았다. 귀엽다는 말은 싫다고 하면서도, 그는 귀여움에 담긴 힘을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조금 얄밉고 조금 질투나긴 해도, 그것은 아첨이 아니라고 미카는 감히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귀여움을 추구하던 그의 유닛이 과격한 '나쁜 남자'의 이미지를 들고 나섰을 때, 팬들의 평가는 한 순간에 바뀌었다. 물론 반응은 전에 없을 정도로 열광적이었다. 하지만 얼핏 신생 유닛의 새로운 발전을 축복하는 호평들이, 미카의 눈에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말들이었다. '귀엽기만 하던' 아기토끼들이 '멋진' 짐승남으로 '성장'했다. 스승님도 가르쳤듯이, 변화는 언제나 환영할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어떤 미의식은 다른 미의식보다 미성숙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인가. 종전까지만 해도 그 귀여움에 열광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그것을 좀 더 '성숙한' 이미지와 비교하고 있었다. 마치 예전의 무대는 장난이었다는 듯이.
미카에게는 귀여운 모습도 멋진 모습도, 전부 소중한 성취였고 응원할 일이었는데. 그제서야 미카는 라이브하우스 첫 무대에서, 비록 비율로 따지자면 10할 중의 2할 정도였을지언정, 혹평을 듣고 일었던 분노가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카게히라 미카에게 귀여움은 정의였다. 귀여운 것을 보면 행복해졌다. 조금 무섭게 어레인지된 것이 취향이긴 하지만, 마음을 꽉 채우는 사랑스러운 것을 봤을 때, 미카는 그것이 줄 수 있는 정신적 포만감에 압도당하곤 했다. 말하자면 온 몸의 근육이 꽉 껴안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몸부림치는 감각이었다. 얄팍한 기호성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확고한, 신념에 가까운 감정임을 알았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제 손으로 만들어낸 무대가 무시당한 것이 분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제 머리가 나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부수적인 문제였다.
듣자하니, 귀여운 것에는 압도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만약에 미학을 반박당한 것이 미카가 아닌 슈였다면, 당연히 코웃음 치면서 조목조목 되돌려주었을 범속한 자의 잡평이었을 터. 하지만 미카에게 그런 오만할 정도의 자긍심이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그는 언제나처럼 자기 머리가 나빠서라면서 스스로를 탓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이젠 끝이다.
미카는 책상 서랍에서 연습장을 꺼내, 내던지듯이 책상 위에 폈다. 아동용 방송에 나올 법한 모습을 하고서 스플래터 영화 못지 않게 잔혹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난도질당한 동물 캐릭터들의 그림을 몇 장 넘겨, 빈 페이지를 찾자마자 뚫어지게 쳐다본다. 오기와, 그 이상의 자긍심을 담아,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워야 할 옷과 무대를 그려나간다. 자신이 상상한 첫 무대의 증인인 보랏빛 토끼 인형은, 이번에도 미카의 무릎에 앉아 새로운 역사가 쓰이는 순간을 단춧구멍 눈에 새기게 된 것이다.
"내는 아첨 같은 거 안 한다."
귀여운 건 정의라는 새로운 법이, 인형이 꾸는 꿈이, 언젠가 작은 제왕이 될 자에 의해, 발키리의 역사에 쓰이는 순간을.
*
며칠간 미카는 쭉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채 등교했다. 몇 차례 슈가 머리 묶는 방법을 가르쳐준 결과, 이제 혼자서도 능숙하게 머리카락의 비율을 맞출 수 있게 되어, 제법 구색 갖춘 양갈래를 만들었다. 조금 튀는 풍경도 일상이 되자 뭐라고 하는 소리도 잠잠해졌다. 무엇보다 그 변화에는 미카의 당당한 태도도 한 몫 했다.
"미카쨩은 날이 갈수록 귀여워진다니까. 미카쨩이 자기 귀여운 걸 아니까 이 누나는 기뻐."
"고맙데이, 나루쨩. 내, 있제, 좀 더 귀여워지고 싶다! 더 귀여워져가 세상을 귀여움으로 채우고 싶데이!"
"어머어머어머! 미카쨩이 그런 소리도 다 하고! 이리 와, 참 잘했어요 도장 찍어줄 테니까!" 며칠 사이에 있던 친구의 변화에 아라시는 꽤나 놀라는 눈치였다. 주눅든 채로 늘 자신을 비하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미카는 저를 향하는 칭찬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엽다는 말을 제 스스로 입에 담고 있었다.
"미카쨩, 오늘 시간 나면 학교 끝나고 시내 나갈래? 머리 꾸밀 것도 좀 사고. 머리만으로도 귀엽지만 약간 포인트라고나 할까."
"그치만 스승님이 허락해줄지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2학년 B반 교실의 창문 너머로, 익숙한 초록 눈의 인형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 뒤로 어쩐지 익숙한 교복 셔츠의 풍성한 프릴이 슬쩍 보인 것 같았다. 미카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 아라시는 재빨리 그쪽을 향해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보냈다.
"응앗? 뭐꼬? 또 일이가?"
"비밀."
"치사하데이."
"아무튼 오늘은 이 누나랑 데이트야. 거절은 받지 않겠어."
"언제 그래 정한긴데?"
"이츠키 선배도 네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싫어하진 않을 거라구?"
"응아아? 무슨 소리고?"
"우후후, 당연히, 난 미카쨩이 열심히 하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괜히 내가 열심히 하는 아이를 좋아하겠니? 나만 믿으렴.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아이로 만들어줄 테니까!"
왠지 평소 이상으로 의욕이 앞선 친구의 모습이 새삼 다르게 느껴지는 미카였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평소에도 적당주의였던 그 나루카미 아라시가 여기까지 불타오르는 것인가. 자신의 죄라면 그저 며칠간 머리를 묶고 다닌 것밖에 없었는데. 아, 그리고 생산적인 일을 하느라 연습장에 기괴한 그림을 그리지 않은 것도 있었다. 윳군한테 다음 편 보여주려고 했는데 아쉽다. 미카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대의를 위해 잠시 뒤틀린 취향의 발산을 접어두고 최대한 슈가 준 과제에 집중해왔던 것이다. 내 잘했제. 잘했으면 칭찬해도. 그렇게 말하고 싶을 정도로 성실히 임했다. 그런데 사람이, 것도 매일 보는 사람들이 이렇게 달라지면 아무래도 위화감이 드는 것이다.
'요즘 스승님도, 나루쨩도 이상하데이. 내 뭐 이상한 짓 했나?'
하지만, 카게히라 미카 자신이야말로 무언가 더 엄청난 편린에 눈을 떠버렸다는 자각은, 세상이 망하고 다시 만들어져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가을의 시내는 꽤나 붐볐다. 옷가게가 늘어선 상가는 슬슬 가을 신상을 내놓기 시작했다. 여름옷에 비하면 꽤나 점잖은 색들이 단풍 들듯 옷걸이를 물들이고 있었다. 미카는 색채감 없는 그 옷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지,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미카가 모르는 브랜드의 이름들을 외우며 잔뜩 들뜬 마음으로 미카를 끌고 다니던 아라시가, 한 가게 앞에서 멈춰섰다.
"여기."
"아, 여가."
"내 취향은 아닌데 미카쨩이 좋아할 거 같아서? 꼭 데려오고 싶었어."
"응아아... 내는 봐도 잘 모르겠데이."
출입문에 달린 자그마한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둘은 가게에 들어왔다. 오색찬란한 파스텔 톤의 진열대 위로 색색의 액세서리들이 놓여 있었다. 동물 캐릭터를 본딴 머리핀이나 사탕 모양 머리방울, 둥근 이니셜 비즈로 사이사이에 포인트를 준 수공예 구슬 팔찌 등, 한눈에 봐도 귀엽다는 말이 나올 물건들이었다.
"우와, 이런 데 있으면 진작에 알려줬음 됐다 아이가?"
"그러게. 미카쨩이 하도 아무데나 괜찮다 하니까, 누나가 일일이 떠먹여줘야 하나 싶어서 고생 좀 했다고. 근데 좋아해주니까 굉장히 기쁜걸!"
"그... 그건... 내, 돈이 모자라가..."
"어머 얘도 진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니까! 뭣하면 내가 사주면 되고, 가끔은 사치품에도 돈을 쓰란 말야. 아니, 아름다워지기 위한 건 사치품이 아니라 생필품이라고."
"응아아, 그나. 왠지 나루쨩, 스승님 같은 말 한데이."
"그 사람이랑 비교당하는 건 사양이야. 난 적어도 그런 펄럭펄럭 프릴투성이 취향보단 좀 더 세련되었으니까."
"니 뭐라카노, 스승님만큼 옷 보는 눈 있는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을 끼다."
"뭐, 미카쨩은 나랑 취향이 많이 다르니까. 난 그런 점까지 좋아하지만 말야.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소중한 미덕이거든. 그런 점에서라면 조금은 그 선배를 인정할 수는 있겠네."
별 거 아닌 대화를 나누면서, 미카는 전시된 거울을 보며 진열대의 핀이며 머리끈을 하나하나 집어서 머리에 댔다. 처음에는 아라시가 골라주는 것들부터 시도해보다, 점점 자기가 고르게 되었다. 문득, 미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나저나 나루쨩은 이런 거 할 생각 없나?"
"응? 그건 왜?"
"나루쨩, 그... 이런 거, 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싶어서."
"미카쨩답지 않게 그런 소릴 하네. 머리를 묶기 위해 기르는 남자아이가 있다면, 머리를 안 기르길 선택하는 여자아이도 있는 법이야. 뭐, 그래도 드레스 같은 건 좀 입어보고 싶지만."
"아."
그 말에 순간, 미카의 머릿속에서 방아쇠를 당기는 듯한 반동이 엄습해왔다.
'그런 머리를 하는 건... 그 옷은... ...라면 귀여운 거 말고...'
소년을 찾아오는 망령이, 금제를 쥔 손길을 뻗는다.
인형이 되기로 결정하기 전, 자신이 단지 소년일 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시절, 한 번 홀렸던. 이해할 수 없는 소리로 머리를 아프게 하던.
나는 이해할 수 없어. 왜 그러면 안 돼?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있어?
방금 전까지 똘망똘망하게 빛나던 이색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모서리들이 단단한 머리 껍데기에 부딪히며 요동쳤다.
"...찮아?"
"응앗?"
"미카쨩, 괜찮아? 어디 아파?"
"괘, 괜찮데이! 걱정 안해도 된다! 내 쌩쌩하다! 메, 멘테 받았으니까!"
정신을 차리면 미카의 눈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제 단짝의 보랏빛 눈동자가 제일 먼저 들어왔다. 다음으로는 그 손에 들린 분홍색의 소용돌이가 새겨진 사탕 모양 머리끈이 미카의 눈을 사로잡았다.
"앗, 그거..."
"이거면 미카쨩에게 딱이다 싶어서 골라 봤어."
"나루쨩이 어울린다 카면 어울리겠지."
미카는 씨익 웃으며 머리끈을 머리 양쪽에 대어봤다. 너무 크지 않은 사탕 장식이 작은 양갈래머리와 조화를 이뤘다. 아, 이거다. 이거면 난 귀여울 수 있어. 하고 느낌이 온 미카는 당장에 계산대로 달려가서 직원 앞에 머리끈을 내밀었다.
"이거 주세예."
"자, 잠깐만 미카쨩, 너무 성급하잖아."
아라시가 미카를 따라가면 이미 머리끈은 계산대 위에서 포장되고 있었다.
"잠깐만요, 계산 취소해주세요. 제 돈으로 낼 테니까. 미카쨩, 이건 내가 살게."
"아니 거기까지는 안 해도."
"내가 사고 싶으니까야. 말했잖아. 아름다운 걸 위해 돈 쓰는 건 사치가 아니라 생필품에 돈 쓰는 거라고."
"응아앗? 나루쨩 지금..."
"응. 들리는 대로야. 아니, 넌 귀엽다는 말 쪽이 더 좋은 거지? 귀엽단 말 하면 왠지 미카쨩, 되게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어." 아라시는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방금 포장한 것이 무색하게 바로 종이포장에서 머리끈을 꺼내 미카의 머리에 매어주었다.
"그나." 그 말과 웃음에 미카도 미소로 답했다. 그 모습을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옆에서 지켜보던 아라시는, 속으로 친구 몰래 했었던 약속을 상기해냈다.
'그리고 나, 그 사람이랑 거래한 게 있으니까. 미카쨩 너를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서.'
그날 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미카는 화장실 문 앞에 걸린 원피스 잠옷을 몸에 걸치고, 다리 아래로 늘어진 치맛자락의 프릴을 지그시 바라봤다. 드레스를 입고 싶다. 나루쨩은 그렇게 말했지. 입으면 그만인 문제다. 미카에겐 그 정도로 단순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에겐 그런 문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가 항상 예쁜 옷을 찾으면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홍차라고 쓰여 있으면 홍차인 거야.'
나루쨩은 어째서 그렇게 오후의 홍차가 홍차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역시, 미카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세상이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믿는 것부터가 오만이었다.
알고 있다. 귀여운 것은 가볍다고들 생각하는 것을.
알고 있다. 여자아이가 아니니까 머리를 양갈래로 묶는 것도 치마를 입는 것도 용서받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들의 눈에 여자아이의 모습이나 남자아이의 모습 같은 건 정해져있다는 것을.
머리로 알고는 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그럴 필요가 있나?
귀여운 것이 좋다. 귀여운 내 모습이 좋다. 귀엽다는 말을 들으면 기쁘고, 보기 싫은 거울도 보고 싶어진다. 이렇게나 벅차오를 정도로 기쁜데. 귀여울 때의 나는 천국만큼이나 높은 곳에 있는데, 사람들은 귀여운 것을 내려다보지 못해서 안달이 난 것 같다.
치마를 입고 싶다. 펄럭이는 예쁜 원피스를 입고 싶다. 하지만 치마를 입고 싶다 해서 항상 여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다. 예쁜 걸 입어도 예쁘다고 말해주지 않는 것이 싫다. 단지 입은 사람이 남자기 때문에 예쁘다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 되는 것이 싫다.
여자 같은 이름이 콤플렉스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남자 같은 이름이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냥 어딘가에 나를 매어두는 이름이 싫었다. 어떤 이름도 되는 이름이 좋다. 남자이고 싶을 때, 여자이고 싶을 때, 아무것도 아니고 싶을 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좋다. 우리 학교 선배들 중엔 그런 이름이 꽤 많았다. 사실 아무것도 아니어도 되잖아. 나는 인형이니까.
솔직히 여자아이 같은 게 뭔지도 나는 모르겠다. 남자아이 같은 건 뭘까. 그것도 모르겠다. 귀엽다는 것이 뭘까. 귀여운 건 여자아이 같은 걸까. 귀엽다는 말을 들으면 화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여자아이 같은 건 나쁜 건가. 귀여운 것이 나쁜 건 아닌데. 머리아파. 아냐. 이게 아냐. 다시. 다시 처음부터 세어보자.
어릴 때, 주변에는 여자애들이 많았다. 다들 귀여운 옷을 입고 있었고, 인형을 가진 아이들도 있었다. 인형들도 마찬가지로 귀여운 옷을 입었다. 나도 그런 옷이 입고 싶다고 하면, 어른들은 나는 안 된다고 했다. 나는 남자아이니까. 왜 남자아이는 그런 걸 입으면 안 되나요. 왜 남자아이는 귀여우면 안 되나요. 내가 남자아이이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안 그러고 싶을 때도 있을 텐데, 그땐 어쩔 건데요. 물어도 모를 대답뿐이라 머리가 아팠다. 머리를 아프게 하는 목소리들은, 인간 소년에게만 달라붙는 망령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인형이 되고 싶었다. 인형은 예쁜 옷이기만 하다면 뭐든 입어도 되었다. 여자아이도 남자아이도 사람도 고양이도 토끼도.
그러다가 그 사람을 만났다. 예쁜 옷을 입혀주었다. 인형이 되게 해 주었다. 날 더러 남자아이는 이래야 한다고 말하지도, 치마를 입으면 안 된다고 말하지도 않아서 기뻤다. 여자애 옷인데 괜찮냐고 묻는 나한테 그 사람은 화를 냈다.
아름다운 것을 입는 데에 그런 건 상관없다고. 누가 내 작은 머리에 그런 생각을 넣었냐고.
그 말을 들은 순간, 오랫동안 나를 짓누르고 있던 두통이 사라졌다. 스승님은 내가 아니라 내게 붙은 망령에게 화를 냈다. 스승님이 입혀준 옷은 망령의 소리로부터 나를 지키는 갑옷이고 무장이었다. 그 후에도 몇 번, 스승님은 내게 옷을 만들어주었다. 나한테 원피스 잠옷을 만들어주는 것도, 머리를 길러도, 머리를 리본으로 묶어도 된다고 해주는 것도 당신이 처음이었으니까. 스승님은 내가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늘상 말하겠지만, 나는 스승님이랑 있으면 머리가 아프지 않아서 좋다. 머리아픈 생각을 하지 않아도 좋다.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것을 위해서 머리를 비틀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머리 나쁘고 남들이 다 아는 것도 모르는 실패작이더라도.
그래도 잘못된 건 내가 아니라면.
나 같은 아이들에게, 잘못되지 않았다고 말해줄 수 있는 내가 된다면.
"토끼씨, 내, 왜 내가 아이돌을 하고 싶은지 알게 됐데이. 물론 스승님 때문이지만, 이건 내 때문이기도 하다."
무릎 위에 보라색 토끼를 얹고, 미카는 연습장을 폈다. 이것만 마무리지으면 된다.
*
"정말로 이 디자인으로 괜찮겠느냐."
여태까지 온화했던 것이 꿈이었던 것마냥, 슈는 평소의 냉엄한 눈으로 미카의 연습장을 보고 있었다. 정식 도안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컨셉아트였기 때문에 비율도 정해지지 않은 삐뚤빼뚤한 그림은, 예술가의 눈으로 첨예하게 분석되고 머릿속에 그려진다. 엄한 스승님이야말로 익숙한 모습이기에, 지금 눈앞에서 긴장하고 있는 미카의 불안감에서 슈의 태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었다. 대부분의 불안은 눈앞의 고아한 예술가에게 낱낱이 평가받는 자신의 도안에서 오는 것이었다.
여태까지 폭주하느라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미의식이 슈의, 나아가 발키리의 미의식과 꽤 차이를 보인다는 자각은 충분히 있었다. 하물며 그것이 격식, 절제, 우아 등의 단어와는 거리가 먼 총천연색의 귀여움 일변도이니, 제 스승이 허락하지 않아도 미카는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이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감히 실패작 인형 주제에 어디서 인형사의 미학을 거스르려 하는 것인가.
여기서 번복하면 된다. 어차피 실패작인 게 마찬가지라면 조금 더 말 잘 듣는 인형이 되어, 우는 소리를 내며 스승님의 세계엔 못 미치겠다고 백기를 들면 탈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애초에 슈는 미카를 신뢰했기 때문에 다음 무대의 방향을 미카에게 맡긴 것이었다. 여기에서 물러나면 아무것도 못 하는 진짜 실패작이 될 뿐이었다. 같은 실패작이라도 아무것도 안 하는 실패작과 실패작이라도 창조해내는 실패작은 격이 다른 법이다. 후자가 아마 극세사 담요의 극세사 한 가닥만큼은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미카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스승님을 위해서라면 저지르고 보는 성질이었기에 여기서 후퇴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발키리 강령 첫 번째, 물러서지 않는다. 첫 번째다. 그것조차 잊어버려서는 제게 세계를 선사한 이 사람 앞에 얼굴 들고 설 수 없다.
두 번째, 아첨하지 않는다. 제왕 이츠키 슈는 비굴한 자를 싫어했다. 설령 상대가 위대한 스승이라 하더라도 비위나 맞추기 급급하다면, 제왕의 인형으로 있을 자격이 없다.
세 번째, 뒤돌아보지 않는다. 이미 이만큼 달려왔다. 봄에 있었던 무대의, 그리고 그보다 더 어린 시절 머리를 아프게 한 금제의 망령을 향한 설욕전을 반드시 해 내야 한다. 자신이 믿는 정의를 뼛속까지 새겨줘야 한다. 숙적의 술수에 무너지고도 포기하지 않고 이듬해 여름 화려하게 반격한, 유일한 주인이자 인형사이자 제왕의 모습은, 그 옆에서 목 놓아 노래한 미카가 제일 잘 아는 것 아니었는가. 제대로 보고 배웠다면 자신도 응당 그렇게 해야만 했다.
"물러서지 않는다. 아첨하지 않는다. 뒤돌아보지 않는다."
엄격한 자수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미카는 나지막이 의지를 입에 담았다.
"좋은 대답이다."
그리고 그의 세계를 엿본 제왕은 노력하는 인형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는, 올해 들어선 드물었던 호탕한 웃음을 한 번 터뜨려내는 것이었다. 그 위풍당당한 표정과 따스한 손에, 미카는 너무 기쁜 나머지 제게 심장이 있다는 사실에 몇 번째인지 모를 감사를 했다. 자신도 믿기지 않아 크게 뜬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주말에는 천을 사러 가자. 평소에 안 쓰는 재료가 들어가니까 그것도 사야겠지. 물론, 네 재료 고르는 안목도 제대로 봐 두겠다."
"아, 맞다, 스승님아."
"왜 그러느냐."
"옷이랑 무대 컨셉만 째가고 연습장은 돌려주면 안 되나? 울 반 아들한테 그리던 거 다음 편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아이가."
슈는 무슨 말인지 싶어 무대 구상이 그려진 페이지를 거꾸로 넘겼다. 그 자리에는 미카의 주옥같은 걸작들이 그려져 있었다. 커다란 눈을 한 2등신의 토끼며 곰이며 고양이가 덫에 다리를 잃고 피를 흘리거나 튀어나온 내장으로 줄넘기를 하는 등, 발랄한지 끔찍한지 알 수 없는 슬랩스틱함의 향연이었다.
"농! 너는 틈만 나면 이런 흉물스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단 말인가!"
말은 그렇게 해도 슈가 미카에게 연습장을 돌려주는 손짓은, 소중한 것을 다루듯 정중했다.
무대의 이미지가 확정된 이후의 준비는 순조로웠다. 슈는 미카의 몫과 자기 몫의 의상을 훌륭하게 만들어냈고, 그에 맞춰 신곡을 썼다. 이런 것이 인스피레이션인가. 즉흥적인 영감을 위해 기행도 마다하지 않던 또 다른 예술가 동료의 말이 떠올랐다. 뭐든지 계획대로 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았던 그였지만, 이런 의외성은 오히려 환영이었다. 잘 사용하지 않던 악기의 음색을 넣고, 주로 기합을 넣는 멜로디와는 다른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완성된 곡은 평소에 지향하는 현악기 위주의 웅장한 소리와는 많이 달랐다. 한때 자신과 함께 '기인'이라 불린, 전자음악을 하는 후배에게 몇 수 배운 것을 응용해보았다. 그러고보면 다섯이서 모일 때면 항상 서로는 서로의 스승이었다. 무언가 한 가지씩 자기 재주를 가르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지금 슈의 슬하에는 자신을 스승이라 부르는, 힘내는 인형이 있다. 배워 성장하는 인형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나저나, 아무리 미카에게 상식의 테두리가 없다고 해도, 정말로 무대의상으로 미니드레스를 제안할 줄은 슈 자신조차도 예측하지 못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런 옷을 자주 입히거나 만들어주곤 했으니 익숙한 추억으로 남았다 쳐도, 일단은 무대에서 치마를 입는 것은 그 나름대로 리스크가 컸다. 옷의 질감과 동세를 살리도록 안무도 다르게 짜야 했고,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문제도 있었다. 게다가 연습장에 정리한 내용을 본 바로는, 치마를 입는다고 해서 동작의 규모가 줄어드는 것은 미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타협 하나 없이 올곧게 추진한다. 그 부분에서 슈는 미카의 고집이 어디를 향하는지가 보여, 흐뭇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 인형사에 그 인형이다.
그 아이에게는 앞으로도 가르칠 것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가르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친 후에는, 모자랄 일 없는 제일 소중한 것을 가르치기로 했다. 자기 몸보다 치수가 작은 드레스의 풍성한 치맛자락에 마지막으로 딸기 장식을 달고는 그는 본 적 없는 무대의 꿈을 꿨다.
*
대망의 라이브 당일, 무대 뒤 대기실에서 둘은 무구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었다.
"응아앗, 진짜 내가 그린 거 그대로 만들 줄은 몰랐데이." 미카가 한 바퀴 돌면 겹겹의 프릴로 이루어진 치마가 피어난 꽃잎처럼 위로 퍼졌다. 옷에 달린 과일이나 과자 장식도 짤랑이는 소리를 내며 덩달아 흔들렸다. 크림을 듬뿍 얹은 딸기 쇼트케이크를 이미지로 크림마냥 소매며 밑단이며 프릴이 부풀어오른 분홍색의 미니드레스는, 소위 아마이 로리타 계열의 양복에 데코라 스타일을 접목시킨, 장식과 로망의 중무장이었다.
"말했잖느냐, 이 무대의 의사결정권은 전부 네게 위임했다고." 네 겹을 넘어가는 뒷자락의 프릴이 바닥에 끌릴 듯 말 듯 한 하얀 정장 롱코트를 채도 낮은 연분홍색의 양복 위에 걸쳐입으며 슈가 말했다. 롱코트의 안에 갖춰입은 셔츠의 앞단을 중심으로 프릴이 물결치듯 퍼지고, 그 사이로 선홍색의 리본들이 일렬로 장식되어 있었다. 흰색의 바지 옆선에도 붉은 리본이 수놓여 있었다. 이쪽의 이미지는 슈의 기억이 맞다면 크랜베리 시럽과 휘핑크림을 얹고 우유가 들어간 캐러멜 드링크였을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설탕시럽이 입에 감돌 듯 달았다. 뭐, 카페라도 갈 때면 각종 시럽을 설탕을 토할 정도로 끼얹어달라고 하는 미카는 어렵지 않게 상상이 가는 풍경이었으니.
"그래도 꿈만 같구... 내가 상상한 거 내가 그대로 입으니까."
기대에 들떠 안절부절 못하는 미카는 길다란 소매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프릴이 펄럭이는 게 꽤 재밌는지 하도 멈추지를 않아서, 난잡하다며 슈가 미카를 저지했다.
"메이크업도 끝났으니 마지막으로 머리를 손보도록 하지."
슈는 미카를 거울 앞에 앉히고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때 미카가 의자 옆에 놓인 제 몫의 가방을 주섬주섬 뒤져, 안에서 분홍색의 무언가를 꺼냈다.
"머리는 이걸로 하고 싶데이." 그것은 전에 아라시와 시내의 액세서리점에 가서 샀던 사탕 모양 머리끈이었다.
"흠, 그 녀석, 꽤 그럴듯한 걸 골라줬구나."
"응?"
"아니다. 그저, 네 옷이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이제 와선 딱히 계략을 들켜도 상관없지만, 끝까지 인형의 성취를 지켜보는 것이 인형사 된 도리이므로, 슈는 미카가 포착한 혼잣말을 그대로 묻어버리곤 그저 그의 머리를 묶어주었다. 내려 묶을까 올려 묶을까 고민하다가, 일부러 왼쪽은 조금 위, 오른쪽은 조금 아래를 향하도록 비대칭으로 묶었다. 잘 관리되어 윤기 있는 검은 머리 위로 분홍색 소용돌이 사탕이 눈길을 끌었다. 머리를 한 번 눈으로 훑고, 재차 옷매무새와 화장을 확인한 다음, 마지막으로 묻는다.
"준비는 됐느냐."
"응!"
서로 한 번 마주보고, 대기실을 나서 둘은 인형의 꿈이 기다리는 무대로 향했다. 노이즈를 섞은 재즈풍의 전주가 흐르고, 1초의 정적 후 조밀한 드럼라인과 베이스라인이 그 사이로 파고들자 조명이 켜졌다.
달콤한 꿈의 포화.
양갈래 머리에 사탕 같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흑발의 소년이, 사탕과자와 케이크로 만든 드레스를 차려입은 채로, 넓적한 케이크 조각 구조물에 앉아있다. 그 옆으로, 분홍빛 머리의 소년이 한 다리를 바닥의 체리 모양 덩어리에 걸친 채 멋들어진 자세로 서 있었다. 그 풍경은 몇 초 되지 않아 강렬한 동세로 바뀌었다.
사랑스러운 멜로디를 하고선 밀도 높고 질긴 소리들로 속이 꽉 찬 드럼 앤 베이스 곡조는, 레드 벨벳 케이크와도 같은 달콤하지만 깊은 미학의 무대를 다진다. 시럽을 끼얹듯 그 위로 둘의 목소리를 얹는다. 그 음색에 어우러지며, 사랑스러운 양갈래의 소년과, 레이스 베일을 단 미니햇이 인상적인 소년은 힘을 실은 율동을 선보인다. 눈에 편한 파스텔톤의 무대라고 해서 얌전하게 지켜지기만 하는 관상용의 미가 아님을, 치맛자락과 코트자락이 펄럭이며 교차되는 격한 움직임으로 증명한다.
소년들은 설탕과 향신료와 온갖 좋은 것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고 누가 정했는가. 미카는 식탁 위에 차려진 모조 봉제 케이크를 집어들어 베어무는 시늉을 하고는 뒤로 내던진다. 그리고 관객석을 똑바로 쳐다보며 자신있는 윙크를 한다. 드러나는 눈은 꿀 같은 황금색 눈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 옆에서는 슈가 건너편 식탁의 찻잔을 들어 끝에 입맞추더니, 순간 돌변해 팔을 휘두르며 찻잔에 담긴 것을 흩뿌렸다. 차와는 다른 천연색의 물감이 무대의 바닥을 무질서하게 덮었다.
언제나 그들은 전복을 거듭해왔다. 그들은 몇 번이고 굴레에 부딪혀왔지만, 항상 그것을 뒤집어 치열하게 자신의 무대로 만들어온 것이다. 그들의 격식은 부수고 재조립해 만든 독창적인 법칙이요, 그들의 정열은 많은 것을 풍화시키는 시간에 굴하지 않는 고집스런 미학이었다. 이번에 그들이 도전한 것은 귀여움에 대한 상식이었다. 모두가 잘 알고 모두가 좋아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러나 누군가에겐 절대 얕지만은 않았던 미의 한 범주를 들고 일어나, 극채색의 반란을 꾀한다.
"좀 더 칭송하거라!"
간주가 시작되고 인형사의 뽐내는 듯한 외침에, 인형은 잠시 넋을 놓았지만, 자신도 뭔가 말해야 할 거 같다는 생각에 이윽고,
"사탕도 좋지만 좀 더 귀엽다고 해도 안 잡아먹으니까!"
그런 의미 불명의 대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표정은 기세등등하게 유지하면서. 카게히라 미카가 생각하는 압도적인, 마음을 채우는 귀여움이 무엇인지를 선보일 작정으로.
귀여움은 정의다. 그리고 정의는 아첨하지 않는다. 그 뜻을 똑바로 전할 수 있도록.
마침내 포화되었던 소리와 색이 가라앉고, 두 사람이 관객석을 향해 인사를 건네면, 그 반응이 터져나갈 듯 열광적인 것을 확인한다. 막이 내린 무대, 조명이 꺼져 내린 어둠 속에서 미카는 손으로 V자를 만들어보였다. 완벽하게 해낸, 온전히 자신의 손에서 만들어진 자신만의 무대. 작은 제왕의 씨앗은 또 한 송이의 이형의 꽃이 되어, 이미 일구어져 낙원으로 변모하는 폐허의 흙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대기실로 돌아가 공연의 열기를 식히고 있으면 익숙한 목소리가 미카를 불렀다. 미카가 고개를 돌리면, 대기실의 사물함 앞에서 한 손에 그렇게 변호하던 오후의 홍차 대신에 미카도 잘 아는 음료를 들고, 다른 한 손에 선물이 담긴 종이봉투를 든 아라시가 미카를 맞이했다.
"미카쨩 무대 봤어!"
"응앗? 나루쨩도 왔었나? 미안타 내, 무대에 너무 열중해서 왔는 줄도 몰랐다."
"그 정도면 정말 열심히 했나보네. 이리 와. 안아보자."
꽤나 복잡한 의상을 입고 무대 위에서 이리저리 방방 뛰어다니느라 땀을 꽤 흘렸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카를 끌어안으려는 아라시였지만, 늘 이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던 미카가 웬일로 포옹을 적극적으로 되돌려주는 모양새에 오히려 자기가 더 놀라게 되었다.
"어머 얘도 참, 미카쨩도 꽤 적극적이 됐잖아?"
"충전중인 거데이. 못 봤으니까 여서라도 계속 보면 좋구?"
"미카쨩 그런 말도 할 줄 알았어? 얘가 변해도 한참 변했네."
변했다고 말해도, 미카 본인은 역시 모르는 투였다. 본래도 타인의 변화엔 민감했지만 스스로의 변화에는 둔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귀여워도 용서되는 날인 것만 같아서, 미카는 늘 신세지는 듯 미안해하던 마음을 홀가분하게 던져버리고 영혼의 단짝에게 조금 애교를 부려보려 한 것이다.
"맞다, 미카쨩은 칼피스지?"
"어, 응. 내는 칼피스다."
"미카쨩은 칼피스."
"응. 나루쨩은 홍차고."
'유사'라는 말은 일부러 쓰지 않았다. 홍차라고 쓰여 있으면 홍차니까.
그것이 단순한 음료수의 이야기를 넘어, 자기주장의 이야기처럼 느껴진 것은 양쪽 다에게 착각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이츠키 선배는 이쪽일려나. 오면 전해줘."
아라시는 종이봉투 안에서 빵봉투를 꺼내 미카에게 건넸다. 그 안에는 갓 구워서 아직까지 따끈한 크로와상이 들어 있었다. 때 맞춰 옷을 다 갈아입은 슈가 가방을 손에 든 채 미카를 찾아왔다.
"카게히라, 슬슬 그만 노닥거리고 짐 정리를 하거라."
"아, 알았데이."
"그럼 나도 이만 가볼게. 슬슬 이쪽도 촬영 일정 있어서 말야. 미카쨩, 오늘 정말 귀여웠으니까!"
"응아아?!"
머리를 묶은 이후 귀엽다는 말을 하루 단위로 들어오던 미카도 여전히 기습에는 약했는지 모처럼 예전의 그 재밌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게 또 귀여워서 한번 더 눈에 새긴다. 그리고,
"선배도 그거 잊지 말고!" 슈에게 한 번 윙크를 날리고 아라시는 대기실 밖으로 나섰다.
"응아? 스승님이랑 나루쨩 뭔 일 있었나?"
미카는 그저 의아해할 뿐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악의는 없고 오히려 애정과 아주 조금의 흥미본위로 이루어진 음모의 전말을 모른 채...
*
파격적으로 귀여운 라이브가 대성황에 끝난 후, 세계에는 작은 이변이 일어났다. 양갈래 머리를 한 미카가 지속적으로 눈에 들어온 탓인지, 조금씩 유메노사키 학생들의 드레스 코드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교복의 형태만 알아볼 수 있다면 개조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음에도, 아이돌과는 기본적으로 남학교나 다름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상식이 복장에 배어 있었다. 그 와중에 한두 명씩, 머리를 길러서 밋밋한 고무줄이 아닌 리본으로 묶거나 장식이 달린 머리띠를 쓰는 학생들이 나타나더니, 급기야는 치마 교복을 입고 싶다는 남학생도 나오기에 이르렀다. 학교 바깥에서도 발키리의 이번 공연은 상당한 화제를 모았는데, 각종 SNS에서 자유로운 복장을 한 사진들이 발키리의 신곡 제목을 내걸고 게시되고 있었다. 남성들이 치마를 입거나 머리를 장식품으로 꾸미는 모습이 주를 이뤘지만, 성별이나 나이대를 불문하고 다양한 복장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 밖에 성소수자 집단에게도 화제가 되어, 연대의 메시지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도 그저 묵묵히, 슈는 자기 할 일에 착수하고 있었다. 평소 두 사람(과 이따금 한 명의 유령부원)이 있던 수예부실의 풍경에서, 재봉이 조금 서투른 한 사람이 빠지고, 대신에 그 자리에는 익숙한 공범자의 모습이 있었다.
"수고 많았어, 이츠키 선배. 그래서 약속대로 드레스는 만들어주는 거지?"
"나는 신뢰를 배반하는 짓은 하지 않아. 그나저나 아무리 카게히라라고 해도, 조금 밀어준 것만으로 거기까지 달려갈 줄은..."
"정말, 이츠키 선배는 미카쨩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카게히라 미카가 양갈래로 머리를 묶기 시작한 때 쯤, 이츠키 슈와 나루카미 아라시는 거래를 했다. 그 내용인 즉슨, 슈가 아라시에게 드레스를 만들어주는 대가로, 아라시는 미카를 유메노사키 차기 제왕으로 만들되 현 제왕의 열화 카피로는 남게 하지 않으려는 슈의 '원대한 계획'의 첫걸음에 협조하는 것이었다.
거창한 이름 치고는 꽤나 단순한 일이었다. 첫째, 매일 미카에게 귀엽다고 말해줄 것. 둘째, 수예부 활동을 제외한 비는 평일에는 되도록 미카를 데리고 시간을 보낼 것. 셋째, 미카가 라이브 계획을 세우는 것을 지켜보고 응원하되,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그 사안에만은 일절 간섭하지 말 것. 미카를 과잉보호하는 슈는 그것이 미카를 발키리나 제왕 이츠키 슈와 별개의 단독자로 만들기 위한 방침이라 생각한 모양이었고, 그것이 꽤나 난이도 있는 일이라는 판단을 내린 듯했지만, 아라시는 슈가 자신에겐 일상과도 같은 일들을 조건으로 내세우는 걸 보고 웃음이 나오는 걸 넘어 오히려 무보수로 드레스를 뜯어내는 것 같아 미안했다.
"이러니까 내가 죄 짓는 것 같다고. 아니면 이츠키 선배는 나한테 빚을 만들어둘 생각?"
"아름다운 것에 들이는 자원은 사치도 부채도 아닌 법이야. 거래가 아니었다 해도 애초에 이쪽이 손해보는 일은 하나도 없어."
"그거 내 대사잖아? 그래도 내가 아름다운 걸 알아준다니 미카쨩 말대로 보는 눈은 있는 사람이구나, 선배는. 생각만큼 꽉 막히지도 않았고. 아, 프릴은 너무 달지 않았으면 해. 난 의외로 실용파거든."
"말하지 않아도 부탁받은 일에 무리하게 내 미학을 강요할 생각은 없는 것이다. 무릇 사람에겐 사람마다의 아름다움이 있는 법이니."
슈의 말대로, 그가 지금 그리고 있는 옷의 도안은 본인의 취향과는 꽤 동떨어진, 직선적인 라인에 포인트만 준 이브닝 드레스였다.
두 사람은 수예부실의 작업용 책상에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와중에 문득, 둘은 서로가 꽤나 닮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맞닿았다. 오만하고도 섬세한 보랏빛의 눈동자가 교차한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을 사연들의 궤적을 마음 속에서 혼자 가늠해본다.
양쪽 다, 상식이 남기고 간 상처를 어딘가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치열하게 아름다운 것을 찾으며 살아갔다. 비록 추구하는 방향은 달랐지만, 아름다움이 곧 생존방식이라는 것은 둘에게 매한가지였다. 상식을 굴복시킬 수 있을 정도로, 저마다에게 달라붙는 망령을 퇴치할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고 고고한 아름다움을 무기 삼아.
그리고 그들에게, 상식이 부재하는 카게히라 미카라는 존재는 필히 구원이었으리라. 자각 없이도 살아 숨쉬듯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날것의 아름다움이었다. 그 점에는 슈도 아라시도 동의하고 있었다.
"나루카미." 정적을 깨고, 슈가 말을 걸었다.
"응?"
"지지 말아라."
그것이 비단 상대에게 하는 말만은 아니라는 것은, 슈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아마 반대쪽에서 먼저 이야기했어도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자기연민 따위는 진작 하지 않게 된 둘이라고 하더라도.
"뭐야, 마치 내가 진 적이라도 있다는 듯이 말하네. 난 임금님이랑 이즈미쨩이 졸업하고 나면 유메노사키의 여왕님이 될 거니까. 이츠키 선배도 미카쨩도 각오해두는 게 좋아."
거기에 예정된 듯, 아라시는 평소의 그 얄미울 정도로 오만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과시해보이며 대답한다. 그런 모습이 묘하게도 슈에게는 신뢰를 주는 것이었다. 역시 비굴하지 않은 인간을 좋아하는 탓이었다. 한편으로는, 지키는 입장에 서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 슈로서는 신선한 체험이기도 했다. 낮게 웃으며 슈는 말을 이었다.
"좋은 포부다. 역시 카게히라의 친우답군. 그리고 너와 마주하는 것도 내가 키워낸... 아니다, 나와는 다르지. 어쨌든 너야말로 제왕과 마주하게 될 것이니 각오를 단단히 해 두는 게 좋을 게야."
"후후, 제왕님이 된 미카쨩이라... 상상만 해도 두근거리네. 선배가 생각하기에도 역시 미카쨩은 귀엽지?"
"너도 답이 정해져 있는 걸 말하는 게 취미인 모양이군. 나는 그게 꽤나 악취미라고 생각하지만 말야. 만물이 내 예상대로 흘러가는 걸 보는 것은 즐겁지만, 예정조화는 딱히 달갑지만은 않으니까."
"그쪽이야말로 어려운 말 하는 게 재밌나보네. 그건 됐고, 어쨌든 미카쨩이 소중하다면 미카쨩한테 잘 해."
"뭣..."
서로 안정감 있으면서도 가끔 변화구를 던져가는 대화를 이어가는 도중에, 수예부실의 문이 열렸다. 바로 그 카게히라 미카였다.
"스승님아 내 왔다! 응아아, 나루쨩도 있었나?"
"미카쨩 어서와. 잠깐 선배한테 부탁한 일이 있어서 말이지?"
"어서 오렴, 카게히라. 때마침 네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인데 좋은 시간에 와 주었구나."
"응아? 내 뭐 잘못했나?"
"잘못? 뭐... 그래, 아주 큰 잘못을 했어. 바로 미카쨩이 너무 귀엽다는 거야! 유죄! 확실히 유죄!"
"호오, 과연 그렇군. 카게히라의 귀여움은 전인류를 위협할 정도로군. 인간을 전부 천국으로 인도해 천국이 또다른 지옥이 되어버릴 정도의 규모인 것이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기고? 내 그런 말 들으면 못 알아듣..."
미카가 둘의 분위기의 변화를 눈치채고 뒤로 물러나려 하면, 눈 앞의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한 번, 자애로운 보랏빛의 눈을 미카에게 향하며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었다.
"미카쨩 귀여워!"
"카게히라는 귀엽구나!"
그 순간, 다시 미카의 마음 속에 있던 스위치가 딸깍, 하고 올라갔다.
"내 앞으로도 더 귀여워져서, 진짜로 세상 모두가 귀여운 걸 좋아하게 만들어뿔 끼다!"
세계에 사랑을 전하면서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은 이제 갓 배운 인형은, 배우자마자 바로 그것을 실험해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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