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토 유키나 생일 축전 글. 자유형식 산문...에 가까운지도.
고고한 정점님 유키나씨 생일 축하드립니다.
먼 계기가 있었다.
음표로 수놓인 오선보는 꼭 네가 내게 처음으로 만들어준 화관 같았다.
화관을 나누어 머리에 쓰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그 날, 에코와 리버브에 푹 젖은 마이크의 울림에 의존해 부르던, 아직 한참 서툴렀던 첫 노래는, 조용했던 나의 유일하게 시끄러웠던 목청을 타고 옆집 사는 네게 들렸다.
"유키나 노래 잘한다! 멋있어!"
창문 하나를 두고서 너는 내 첫 관객이 되어주었다. 오페라 홀의 발코니석에서 무대의 주역 되는 자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것만 같이, 너는 그 자리에 있었다. 내 노래를 듣는 사람은 항상 한 명은 있었고, 그때부터 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즐겁다고 생각했다. 그 때도 네 옆에서 말주변이 없었던 나는, 늘 내게 먼저 말을 걸어주는 네게 매일매일 가사를 지어 부르는 것으로 대답했다. 공을 던지고 받듯이 목소리와 표정을 서로 나누던 나는, 네 옆에서 꽤나 다양한 표정을 지었던 모양이었다. 그것이 단절의 틈새 너머에 있는 우리들의 원점이었고, 그 시절은 우리가 온전히 공유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었으니,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너를 가족처럼 여겼다. 우리 집과 너희 집은 사이가 좋았고, 내 노래와 아버지의 기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너도 머지 않아 우리들의 이 작은 무대의 일원이 되겠다 하였다.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좀 더 셌던 너는 무거운 베이스를 잘도 들고서 두꺼운 현 네 개를 손가락으로 몇 번 퉁겨보곤 했다. 둥둥 울리는 저음에 매료되었던 너는, 항상 아이들 무리의 중심에 있어왔었던 너답지 않게 받쳐주는 소리를 택했다. 그래야 유키나의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으니까. 나는 소리로 유키나의 무대를 만들어줄래. 마냥 그 말이 기뻤다.
먼지 탄 오선보는 벽에 걸었다 시들어버린 화관 같았다.
어느날처럼 밖에서 너와 놀다가 돌아왔을 때, 집에 있던 악기며 음향기기들이 싸그리 치워진 것을 봤다. 아버지는 어느때처럼 인자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지만, 미적지근해진 분위기는 따스한 낙원보다는 건조한 황무지와 같은 온도였다. 아버지는 더 큰 무대로 갈 것이니, 앞으로 더 많이 노래를 부르자고 약속했었는데, 그 약속이 자리할 곳은 무대 위가 아니라 벽장 속이었다. 안식처가 무너지는 게 무엇인지 나는 처음으로 알았고.
유일한 관객이자 내 계기였던 너는 야속하게도 나를 위해서 다른 안식처를 찾아주려고 했다. 아버지에게 내가 어딨냐고, 혹은 베이스가 어딨냐고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자, 너는 너대로 슬퍼하다가도 이내 몇 번이고 같은 대답이라 단념했겠지. 그 상황에서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 했을 것이다. 자주 어울리던 친구 무리에게 나를 소개해주기도 하고, 네가 좋아하는 머리장식이나 옷 등을 내게 건네보기도 했다. 잘 되지는 않았다. 나와 너는 많이 달랐고, 그런 우리 둘을 한 가족처럼 묶었던 것은 음악이었다.
너를 잃기 싫었던 나는, 안식처를 되찾기 위해서,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무대를, 누구의 손으로도 끌어내릴 수 없는 꼭대기에 세워보이기로 했다.
시들어버릴 화관 대신에 영원한 왕관을 머리에 쓸 수 있을 때까지는 나부터가 무너지지 않아야 했으니까, 애정을 심는 것은 좀 더 나중으로, 먼 나중으로. 필요한 것이 갖춰질 때까지. 미루고 미루는 동안에 너의 애정도 밀려났지만, 높은 곳을 바라봐도 넓게 보지는 못했던 나는, 그 가까움에서 역설적으로 네가 내게서 멀어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너덜너덜한 악보 위의 오선보는, 내가 처음 만든 서투른 화관 같기도 했다.
나의 노랫소리는 어느새 관객들을 많이 모으기 시작했다. 최초의 관객만은 빠져있는 그 무대 속에서, 하나둘씩 나와 함께하고 싶다는 새로운 인연들이 생겨났다. 너도 함께 돌아왔다. 그 모양새는, 어쩐지 새로운 안식처 같기도 했다. 하지만 바람 불어도 흔들릴 곳이라면 안식이 아니니까. 절대로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도 않는 꼭대기가 아니라면 마음을 놓을 수 없으니까.
"전부를 걸 수 있어?"
실은 끝까지 함께해달라는 말이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그 의중조차 똑바로 전달하지 못했다. 실패하고 모든 것을 잃을 바에야, 위기감을 전염시켜서라도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고 믿었을 터다. 단지 그러기에 너는, 그리고 너희는 애정이 너무 깊었다. 너희들에게서 새어나오는 애정은 가혹한 여정길의 순간순간을 안식처처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방심을 부르고, 내게 다시 상처가 될까봐, 다시 내 세계를 부술까봐, 나는 너희들 위에서 군림하려고 했고 너희는 따랐다. 내가 억누르려고 했던 저마다의 이유, 그리고 거기에 서린 애정. 그것을 합쳐 엮어가며 날카롭게 솟아가는 작은 왕국을 따스하게 감싸고 또 넓혀나갔다. 그럼에도 나는 제일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보고 거머쥐어야 안심이 되었는데. 너희가 정상이 아닌 곳으로 향해가는 것이 못마땅했다고 말했지만, 실은 나와 멀어질까 두려웠던 게 지배적인 감정이었을 터다.
넓어지는 왕국의 가장자리에서 세상을 엮는 너희들을 쭉 눈에 담으려던 나는, 결국 혼자 너무 높이 올라간 나머지 발을 헛디뎌 떨어지고 말았다.
그 때 나를 다치지 않게 받아주었던 것이, 너희가 도톰하게 짜낸 운명의 영역들이었다. 너희가 발견한 가능성이었다.
상처입더라도, 쓰러지더라도 여기에 있다고. 언제라도 앞을 향할 수 있게 문을 열어두겠다고.
그리고 그 사이로, 끝까지 나를 앞도 위도 아닌 옆에서 지탱해주었던, 붉은 장미를 한아름 안은 네가. 장미 가시에 잔뜩 손을 찔리며, 나를 위해 제일 예쁜 정원을 가꾸며 기다려오던 네가. 높이 오르는 건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면서, 이 공중정원에 누구보다도 열심히 물을 주던 네가. 그럼에도 피워낸 꽃들의 줄기는 단절되었던 옛 안식처를 향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내가 여기에.
그래도, 되찾기 위해 옛날로 돌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겠지. 계기가 있다면 얼마든지 꽃은 다시 피울 수 있다고. 손을 모아서, 화관 대신에 씨앗을 건네는 너희가 있었다. 이걸로 다시 한 번, 무대를 피워내자고.
안식처는 폐쇄된 모형정원이 아니라, 언제라도 자라고 뻗어나갈 수 있는 하늘정원이었으니.
높은 탑을 둘러싼 공중정원은 장미가 한아름 피어있다. 가시로 가득해서 화관으로 삼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미, 시들어버린 화관을 그릴 필요는 없게 되었을지 모른다. 너희들과 함께 가꾼 이 세상은 그 자체로 커다란 화관이고, 애정이 순환하는 터전이었다. 어울리고 서로 나눌 말을 찾는 이상, 안식처는 부서지지도 멀리 떨어지지도 않는 것이었다. 너희들이 나를 그렇게 붙잡고 있어주었으니까.
너희들이 소리로 엮어낸 무대, 둘러싸듯 핀 푸른 장미꽃들 사이에 서서 노랫말을 자아냈다. 꽃의 생일은 내가 또 다시 태어난 날.
내가 품에 안은 푸른 기적은 너희들을 향한 속죄이면서, 너희들을 향한 감사이면서,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계기였다.
시간을 유영하는 공중정원 위에서, 멸하지 않는 노랫소리에 사랑을 담으며, 앞으로. 앞으로.
어느새 씨앗도 하늘을 날아, 탑 꼭대기에는 푸른 장미 다섯 송이.
(그리고 그리운 바람을 타고서 날아온 보랏빛과 붉은빛의 꽃잎 두 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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