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15일 제3회 어나더 스테이지에서 낸 로젤리아 무료배포본 '아! 로젤리아 아시는구나!' 수록 단편.
갑자기 그리워져서 폴아웃 뉴베가스를 미나토 유키나 컨셉으로 재플레이하려다가 버그로 진행 막히고 쓴 것.
엘더스크롤 6 발매소식 덕분에 행복합니다.
"으아아아아아! 또 같은 데서 프리징이야!"
우다가와 아코는 머리를 싸매고서 컴퓨터 앞에서 우는 소리를 냈다. 유키나 씨를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의 패권을 쥔 최강자로 만들기 위한 초 초 초 초 원대한 계획(가칭)이 낡은 게임 엔진의 한계에 또 부딪히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메인 퀘스트 라인도 따라가지 않았는데, 초반에 거쳐가는 마을에 자리 잡은 카지노 구역에 들어서기만 하면 컴퓨터 화면이 정지하고 마는 것이었다. 아코가 지금 플레이하고 있는 것은 족히 8년은 된 게임으로,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방대한 세계관, 여러 사정을 가진 세력과 인물들의 첨예한 이해관계로 지금까지도 찬사받는 명작 포스트 아포칼립스 RPG였다. 하지만 게임 자체의 높은 완성도와는 별개로, 전자기기의 세대교체는 너무나도 빨랐다. 옛날 환경에 맞춰 만들어진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도 OS도 빠르게 업데이트되는 시대에 금세 충돌을 일으켰고, 특히나 그 당시 환경을 최대한 쥐어짜내서 최적화를 하는 게임이 되면 이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5년의 차이만 되어도 환경이 달라지는 판이었다.
"옛날 컴퓨터에서는 안 이랬는데……."
아코는 볼을 부풀리면서 말을 들을 리 없는 컴퓨터에 대고 투정을 부렸다. 비록 게이밍의 역사에 비하면 많이 어린 나이라 해도, 어린 시절을 함께한 추억을 놓아주는 슬픈 경험은 괴로웠다. 물론 이를 우회하기 위한 모드를 넷의 바다를 돌면 어렵지 않게 내려받을 수 있었지만, 게임 이야기가 되면 아코는 항상 고집이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유키나 씨는 초 초 초 초 최강이니까 모드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황무지를 제패할 수 있어!"
최대한 순도 높은 세계를, 오로지 자신의 힘과 근성, 애정만으로 체험하고 제패해나간다. 아코의 게임 제1철칙은 그랬다. 물론 아코에게 중요한 건 역할놀이였기 때문에 한때는 컨셉에 어울리는 모드 정도는 다운받아 즐기곤 했다. 그러나 자칭 최강 타천사 마왕 아코는 욕심이 많았고, 어느새 멋있거나 재밌어 보이는 모드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게임 용량은 불어나고 오류는 많아지고, 아코가 사랑했던 게임의 원래 세계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거실의 공용 컴퓨터에 이것저것 깔다보니 결국 언니에게 혼나고 말았다. 그 이후로 아코는 세계를 해치는 강함이 아닌, 그 세계에 녹아들 수 있는 강함을 찾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아무리 초 초 초 초 강력한 최강 타천사 마왕이라도 결국은 통치해야 할 세계를 완전히 부수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본래 세계를 구현하는 것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아코는 너무 답답해서 드럼스틱으로 컴퓨터 본체를 몇 번 때려주고 싶었지만 그러다가는 또 언니에게 혼날 것 같아서 애써 참았다. 이번에야말로 존경하는 로젤리아의 보컬 미나토 유키나를 구현한 캐릭터로 포스트 아포칼립스 황무지의 최강자가 되고 싶었는데.
몇 번이고 컴퓨터를 재시작하고, 같은 세이브 파일을 불러와도 게임은 먹통이었다.
그 때, 딩동, 하고 집의 초인종이 울렸다. 그녀의 잘생기고 멋진 언니, 우다가와 토모에가 밴드 연습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앗! 언니 왔다! 이거 빨리 고쳐야 하는데……. 화면이 게임 로딩스크린이니까 숙제하다가 컴퓨터가 다운됐다고 말할 수도 없어!"
다급한 마음으로 아코는 키보드의 강제종료 단축키를 연타하다가, 그래도 벗어나지 않는 화면에 큰마음 먹고 재시작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도 세이브를 날리게 생겼지만, 어차피 이때까지의 시행으로 그 구간을 넘어갈 수 없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다.
"언니! 곧 문 열어줄게!"
아코는 결국 재부팅되는 컴퓨터를 내버려두고서 현관문을 열러 도도도도 달려나갔다.
"아코, 다녀왔어."
토모에를 보자마자 아까까지만 해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듯한 아코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진다.
"아코, 또 숙제 안 하고 게임하고 있었어?"
"아, 아니야! 오늘은……. 별로 게임할 기분이 안 났어."
"그치만 거실 컴퓨터는 켜져 있는데?"
사람 좋은 토모에는 동생을 딱히 심하게 나무라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코는 토모에 앞에서는 언니를 본받아 말썽도 피우지 않는 의젓한 동생으로 있고 싶었기에, 토모에가 보는데서 말썽을 지적받으면 한없이 부끄러웠다.
"으, 그건 조사 숙제 하려고……."
쭈뼛거리며 변명하는 아코를 보고도 토모에는 그저 시원스럽게 씨익 하고 웃으며, 아코의 묶은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게 앞머리만을 조금 쓰다듬어 주었다.
"알았어, 아코. 가끔은 놀 때도 필요하지. 하지만 숙제 다 끝내기 전엔 적당히 하고, 숙제 다 끝낸 다음에 열심히 해야 한다?"
"응. 힘낼게, 언니."
아코의 말소리는 조금 아쉬운 기색으로 끝이 내려갔다. 토모에는 그것을 눈치채고 아코에게 물었다.
"아코, 무슨 일 있었어?"
그래도 게임이 안 돌아가서 그렇다고 언니에게 말하기엔 자신이 조금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코에게 게임은 중요한 취미지만, 개구쟁이 동생의 이미지를 너무 언니에게 선보이는 것도 이제는 조금씩 졸업해나가야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지금은 멋진 디바 유키나 씨와 함께 밴드도 하고 있으니까 좀 더 신경쓰고 싶었다.
"정말로 존경하는 사람을 좀 더 멋있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어."
"그랬구나."
적당히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을까? 아코는 최대한 유명한 고뇌하는 석상의 모습을 흉내내며 토모에에게 나름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분위기를 어필하려 했다.
"아코는 아코대로 멋있으니까, 다른 사람을 빛내려고만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이 언니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런가? 하지만 아코가 멋있어지려고 마냥 따라하기만 하는 것도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사요 씨도 말했으니까, 부담되게 멋있어지기보다는 멋있는 사람들이 부담되지 않게 빛내려고 하는 건 어떨까 하고."
"글세? 그게 아코가 멋있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당장에 아코가 멋있다고 하는 나랑 아코도 다르잖아? 난 그게 전혀 방해되지 않는걸. 오히려 아코가 날 뛰어넘어주면 정말 멋질 것 같은데."
변명삼아 되는대로 말했는데 어느새 진지한 이야기가 되어버려서 아코는 당황했다. 단순히 게임하다가 컴퓨터가 다운되었다고 말하는 게 나았나? 언니도 사뭇 진지한 답변을 해주는 바람에 자기도 어느새 고민의 나선에 빠져들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무안해져서 아코는 숙제를 하러 들어가겠다고 토모에에게 말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물론 이런 기분으로 숙제가 될 리가 만무했기에, 아코는 자신의 소중한 게임 친구이자 밴드의 동료인 시로카네 린코에게 스마트폰의 메신저로 연락을 취했다.
"린린, 뭐해?"
"아코쨩이 안 들어와서 혼자 NFO 레벨 올리고 있었어. 그래도 스팀에는 로그인 되어 있더라. 계속 게임 중이라 떴다가 온라인이라고만 떴다가 해서, 잘 안 풀리는 게 있나 걱정했지만."
오프라인에서 보면 말을 꺼내려 할 때마다 더듬거리던 친구는 전자기기를 사이에 두면 특유의 빠른 타자 속도로 속사포처럼 장문을 전한다. 아코는 바로 방금 게임하면서 겪은 일을 린코에게 전했다.
"응. 옛날에 했던 게임 오랜만에 생각나서 하는데, 새 컴퓨터에서는 자꾸 같은 데서 튕기는 거야. 그래서 거기서 저장한 세이브 파일을 불러왔더니 컴퓨터가 다운되어서." 최대한 알아듣기 쉬운 말로, 문제를 설명한다.
"아코쨩, 새 컴퓨터의 램이랑 CPU 사양은 16기가에 쿼드코어랬지?"
"그럴 거야."
"옛날 게임 엔진이라 기본값으론 멀티스레드나 일정 이상의 램은 지원 못 할 거야. 32비트 기반이라 늘리는 데 제한도 있고. 혹시 옵션 파일은 수정해봤어?"
"아 그거? 검색해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도 계속 같은 데서 다운돼."
"모드는 찾아 봤어? 아코쨩은 모드 없이 플레이하고 싶겠지만, 웬만큼 오래된 게임이면 가용 램이나 코어를 늘리는 모드나 버그픽스 모드 정도는 찾아서 하는 게 좋을 거야. 그 정도라면 세이브파일을 오염시키지도 않고 용량도 얼마 차지하지 않으니까."
게임에 능숙한 린코답게 게임에 오류가 난 상황에서도 경험을 살려 침착하게 대답을 해 나간다. 그 의연함과 연륜에서는 본인이 각종 버그투성이 게임들을 직접 헤쳐 나가면서 몸에 쌓인 사리가 엿보이는 듯했다.
"근데 그렇게 해도 로딩이 안 되면?"
"그러면 세이브파일이 충돌하거나 깨졌을 수도 있어."
"그러면 이제 더 이상 유키나 씨를 최강으로 만들 수 없어? 나 세이브 하나에 계속 저장했는데. 아직 초반이라서 그 정도는 다시 따라잡을 수 있지만, 커스터마이징부터 다시 하기는 힘들어. 프리셋 저장도 안 되고. 이상적인 유키나 씨를 기껏 커스터마이징해 놨는데!"
"유키나 씨여야 하는 이유가 있어?"
타이핑하는 문자에서도 상심한 기색이 역력한 아코를 신경써주는 조곤조곤한 말씨는, 갑자기 방향을 바꿔 아코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유키나 씨는 초 초 초 초 멋있으니까? 그래서 황무지의 패권을 장악하는 세기말 최강으로 한번 만들어 주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어."
물론 본인에게 이야기한다면 그런 걸 할 시간에 연습이나 더 하라고 꾸지람을 들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아코가 동경하는 사람을 빛나게 해주고 싶은 순수한 마음만은 그 공들인 은발의 캐릭터 - 비록 커스터마이징 옵션의 한계로 게임 속에선 단발이 되었지만 - 에게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아코쨩은 항상 주변 사람들의 좋은 면을 보고 그걸 빛나게 해주고 싶어 하는구나. 나도 항상 아코쨩을 본받고 싶었어."
"린린은 굳이 아코를 닮지 않아도 이미 피아노도 잘 치고, 키보드도 잘 치고……. 사요 씨한테 혼나지도 않고. 그리고 닮으려고 한다면 아코보다는 유키나 씨 쪽이 더 멋있지 않아? 아코는 늘 유키나 씨한테 혼나기만 해서 아직 유키나 씨처럼 되긴 부족해."
그 대목을 타이핑하면서 아코는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어떻게 하면 유키나 씨처럼 멋있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로젤리아의 멋에 보탬이 될 수 있을까. 무엇인가 멋있어 보이는 것이 있다면 제일 먼저 제안하는 것도 아코였지만, 그 의견은 로젤리아의 의사결정권을 꽉 잡고 있는 스토익한 보컬리스트와 기타리스트 두 사람에게 항상 퇴짜 맞기 일쑤였다.
"아코쨩은 유키나 씨랑은 다른 멋이 있는데, 멋있어지고 싶다고 하면서 자꾸 자기 자신의 멋을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아."
린코의 말 역시도 언니가 물은 것과 비슷한 결의 말이었다.
"그래? 언니도 그런 비슷한 말 했어. 아코는 로젤리아에 들어오면서 아코가 좋아하는 멋을 찾았다고 생각했는걸. 그러니까 로젤리아에 맞추기 시작하면 아코도 팍 하고 오는 정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렇게만 하면 로젤리아만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사라질 거야."
"린린?"
"다섯이서 낼 수 있는 소리를 내려면, 다섯 명 전부가 살아있어야 해."
그 말과 함께, 메신저 화면에는 대화를 입력중이라는 점 표시가 꾸준히 떠 있었다. 빠른 타자로 보통은 짧게짧게 연락하고 마는 메신저 화면을 꽉 채울 정도의 긴 말을 잘만 써 내는 린코도 꽤나 고민을 하고 있는지, 쉽사리 다음 메시지가 보일 기색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코는 침착하게 린코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를 기다리면서 타이핑을 멈췄다. 그리고 마침내 한 무더기의 메시지가 화면에 쏟아졌다.
"우리가 게임할 때도 그렇잖아? 우리는 워낙 닳고 닳아서 두 명이서도 레이드 보스를 잡지만, 보통 네 명이서 잡는다고 하면 딜러나 탱커, 힐러 같은 역할이 있잖아. 거기에서 각자가 자기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서 목표를 달성하는 거야. 그 중에 공대장은 있겠지. 하지만, 예를 들어 딜러가 공대장이니까 딜러를 따라서 힐러도 딜을 해야 한다, 그러면 불합리하지?"
"힐러나 보조직한테 딜 하라고 하는 애들은 공대장 하면 안 돼."
"그러니까 나도 안 그러려고 하고 있어. 아코쨩도 그러지 않고. 그렇다면 아코쨩은 왜 로젤리아 안에서 유키나 씨를 뒤따르려고만 하는 거야?"
근본적인 물음. 예전에도 아코와 린코는 서로 밴드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밴드와 온라인 게임의 유사점에 주목한 적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린코와, 그리고 NFO에서 스쳐지나간 사람들과 함께 온라인 게임의 보스를 공략할 때면, 다들 각자의 역할을 맡아 활약을 했었다. 어느 입장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특별히 잘 하는 사람은 있었어도 승리는 모두가 나누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밴드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다 같이 멋진 소리를 내기 위해, 정점에 오르기 위해 노력하기 위해 모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뜻을 주도하는 것은 유키나였고, 마냥 엄격하기만 했던 유키나가 조금씩 밴드에 정을 붙이기 시작한 지금도 유키나 중심의 수직적인 분위기는 잔해로 남아있었다. 특히 우러러보는 것에 유달리 익숙한데다 밴드의 막내였던 아코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자연스레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두 살 연상의 친구. 생각해보면 학교도 다르고 나이 터울이 있는데도, 아코에게 밴드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린코는 유독 친하게 느껴졌다. 린코가 유키나처럼 멋있고 매력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단지, 동경하는 마음도 친근하게 여기는 마음도 서로 주고받으면서 지내왔기 때문에 조금 더 편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 차이는 왜?
"유키나 씨는 밴드의 리더지만, 아코쨩은 유키나 씨와 나, 그리고 로젤리아의 동료기도 하잖아? 동료로서 자신의 역할도 입장도 뚜렷하게 할 수 없으면, 그건 동료가 아니라 단순한 추종자, 아코쨩의 말을 빌리자면 사역마 같은 것에 불과해. 유키나 씨도 그런 마음으로 우리를 대하고 싶진 않을 거야. 이마이 씨가 연습을 쉬었을 때 기억나지?"
"응. 그렇지만 리사 언니는 나랑 달리 어른스럽고, 연습도 열심히 하고, 또 이것저것 잘하는 것도 많잖아."
"아코쨩이 연습에 나오지 않아도 똑같을 거야. 우리 모두 유키나 씨에게 반해서 밴드를 시작한 건 맞지만, 지금은 유키나 씨와 무대 위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파트너들이라는 자각도 가졌으면 좋겠어. 비록 내가 말하는 것이 유키나 씨의 모든 뜻을 대변하진 않으니까, 이 말들은 주제넘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코쨩이 혼자만 주눅들어 있는 걸 보면 나도 가슴이 아파."
별로 주눅들었다고 아코 스스로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린코의 말을 듣고 보니 밴드 활동을 시작한 이래로 혼자 튀는 면에 대해 조금 걱정하기 시작했었던 게 떠올랐다. 특히 처음 밴드가 삐걱거렸을 때 유키나에게 끊임없이 지적받았던 것이나 사요에게 한 소리 들었던 것이 밴드에서 임하는 마음가짐에 꽤 큰 영향을 준 것 같았다. 지금의 두 사람은 그때에 비하면 덜 엄격하게 구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기대에서 자신이 벗어나는 것을 아코는 알게 모르게 신경쓰게 되었다. 그런 나머지, 단순히 본받고 싶은 정도에서 그친 ‘멋있는 사람들’을 반드시 닮아야 할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면 내가 유키나 씨가 추구하는 멋을 해치지 않으면서, 내가 멋있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그냥 아코쨩이 원하는 대로 멋있어지면 되지 않을까? 유키나 씨 옆에 서도 숨겨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 아코쨩만의 멋을 내면 되는 거야. 자기만의 멋을 담당하는 다섯 명이 나란히 무대에 서서 소리를 내면, 그게 모여서 로젤리아만의 특색이 될 거야."
나만의 멋. 로젤리아만의 특색. 알 것 같았다.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어둠이 벼린 쌍검을 휘두르는 타천사 마왕 아코, 이 자리에서 마계의 장미 꽃봉오리들 - 데몬스폰 - 과 어깨를 나란히 하노라! 이런 거 무대에서 막 외쳐도 되고?"
평소에 자주 입에 담던 역할놀이 대사를 린코에게 선보이니 왠지 신이 나는 아코였다. 역시, 이러고 있을 때가 제일 기쁘고, 해방감이 느껴졌다. 다음에 무대에 설 때면 꽤 적극적으로 써먹어봐야 할 것 같았다.
"응. 아코쨩은 아코쨩답게 있어줘. 나는 그게 제일 좋아."
멀리서 웃고 있을 자신의 친구이자 모니터 속 이계의 동료가 메시지만으로도 눈앞에 선해서, 아코는 가슴 안쪽에서부터 강한 의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새로운 세이브 파일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유키나 씨의 굉장히 높은 재현도를 자랑하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상상한 모습을 자유롭게 만들어나가보고 싶었다. 그 전에,
"린린, 지금 바로 레이드 갈래?"
"아코쨩, 다른 게임 할 생각 아니었어?"
"지금은 린린이 보고 싶어졌어! 마왕의 현신 네크로맨서 아코의 파트너는 연옥의 화염술사 린린 단 한 사람뿐이니까!"
"그럼 들어와, 전에 만났던 마을에서 대기하고 있을까?"
"응. 곧 들어올게! 맞다, 언니한테는 숙제하러 들어간다고 말해놨으니까 대충 문제집 답만 쓰고 바로 올게!"
"고마워, 아코쨩. 난 그동안 장비 수리랑 거래소 확인 좀 하고."
그 말과 함께 꿈 많은 아이는 모니터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최강의 마계의 현신으로 탈바꿈할 채비를 하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그저 뒤따를 뿐이 아닌, 나란히 어깨를 맞댈 동료로 전장에 나설 앞날이 그 앞에 펼쳐졌다.
다음날, 주말 아침, 라이브하우스 CiRCLE에 딸린 연습실에 아코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어김없이 사요와 유키나의 잔소리를 예상하고 고개 숙여 사과하려던 찰나, 옆에 키보드 케이스를 들고 선 린코가 아코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 했다. 아코는 그 신호에 힘입어 목을 가다듬고 큰 소리로 말했다.
"유키나 씨, 어젯밤에는… 밤새도록 곡을 구상했을 뿐이에요!"
진실은 린코와 함께 2인 레이드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어찌어찌 비공식 버그 패치를 다운받아 꿈에도 그리던 황무지 모험을 한창 즐기느라 바빴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아코의 머릿속에는 분명 한 장대한 이야기의 줄거리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을 로젤리아의 음악 세계관으로 표현해낸다면 좋을 것만 같았다.
"아코."
어조의 변화 없는, 엄격함을 소리로 빚은 듯한 저음. 그 소리에 조금 압도당해 침을 삼켰지만, 포기하지 않고.
"유키나 씨가 좋아하는 고양이 수인의 이야기도 있어요!"
"뭐?!"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방사능 황무지에 노출되어 고양이 수인으로 변이한 고양이가, 내전 중인 땅을 습격한 거대악의 화신인 용을 물리치고 영혼을 흡수하면서 살아있는 신화가 되는 대서사시에요!"
다른 게임의 설정까지 섞어서 튀어나오고 말았지만, 대충 어떤 노래를 만들고 싶은지, 그 컨셉은 전해졌을 것이다. 환상의 세계에서의 모험. 영웅담. 그것을 그린 웅장한 노래. 아코는 평소에 꿈꿔왔던 것들을 하나하나 이야기 보따리마냥 풀어놓는다.
"이런 노래를 로젤리아가 같이 연주한다면 분명 멋있겠지요? 관객들도 압도당할 거예요! 오케스트라 풍으로 해서, 제목은 황무지의 오페라 어때요?"
아코의 제안이 끝나자 연습실은 조금 웅성거렸다. 어쩌면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코는 이 이야기를 전한 것만으로도 속이 후련했다. 그 때,
"아코, 좋은 거 생각했는데? 한 번 해볼 만하지 않아?" 리사가 먼저 아코의 말을 거들어 주었다.
"여태까지 시도해본 적 없는 스타일을 밴드 음악으로 선보인다면, 새로운 도전이 되지 않을까요? 미나토 씨도 뮤지컬에 관심이 있다고 했으니, 그런 스타일을 차용해서." 평소 같으면 아코의 터무니없는 의견에 제일 반대했을 사요도.
"아코쨩… 많이…… 노력했어요. 로젤리아만이 선보일 수 있는… 세계관을 위해서… 밤 새 가면서 곡을… 구상했어요." 늘 아코 곁에서 서로 세계관을 나누며 모험하던 동료, 린코도.
모두가 아코의 의견을 곁에서 응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엄격한 리더, 유키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을 전했다.
"좋아." 그래도 그 말끝에는 조금의 미소가 걸려있는 듯도 같았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해냈다! 하고 두 팔을 들고 환호하는 아코의 모습을, 로젤리아의 나머지 멤버들도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어엿한 동료를 인정하는 눈. 그것이 뿌듯해서 아코는 가슴을 펴고 선언한다.
"아코는 로젤리아를 최강의 밴드로 만들어주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아코가 최강의 타천사 마왕이 되어야겠죠? 그럼 오늘도 힘내서 연습하겠어요!"
금방 가방에서 드럼스틱을 꺼내서, 비록 다섯 중에서 제일 늦게 왔지만, 악기가 차려진 간이 무대에는 제일 먼저 달려가 앉고는 의욕을 선보인다. 오늘따라 연습실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그 활기 속에서 점점 갖춰져 가는 웅장한 소리가, 그들이 갈 여정의 이야기를 점차 꽃피우고 있었다.
"그나저나 우다가와 씨, 그 게임 CERO Z일 텐데요?"
"에이, 사요 씨, 영웅이 되는 데 나이는 상관없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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