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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 사탕통/팝핑 캔디

[슈미카] 인형병원과 오브제의 진단명

by 료밍 2019. 4. 29.

2019년 2월에 배포한 슈미카 재록본 'LOVE CONQUERS ALL'에 수록한 추가 원고. 공개 요청이 있어서 올립니다.

테디베어 스토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약 레오이즈, 아라안즈 요소가 있습니다. 전학생에게 독자적인 설정을 일부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 점 유의해주세요.





"닿고 싶어지는 것도, 인간성이라 할 수 있어?"

카게히라 미카는 며칠 전부터 가슴 한 구석이 욱신거린다고 했다. 아프다는 표현을 부러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그 상황에 아픔이란 말이 적절한 것인지는 그 자신도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원체 자신의 아픔에는 둔감한 아이었다. 무엇보다도 양호실이나 병원에 가서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것이라면 ‘아픔’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게 아닐까, 미카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가슴 속에서 부자연스럽게 쑤시는 무형의 감각은 ‘인형’의 영역에서의 결함이라기엔 너무 자라버렸다. 아니면 그 영역을 일탈하려는 데서 오는 죄악감이 너무나도 상냥한 가슴을 긁어오는 것일까. 그래도 이 상황에서 제일 적법한 조치가 무엇인지는 확실했다. 바로 역시 자신, 그리고 ‘인형’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아는 스승님에게 정비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말해야 되는 대상. 그럴 수 있는 사람. 그러나, 그러기에는 미카에게 가슴 속에서부터 밀려와 목에 먹먹하게 걸려오는 것이 있었다.



카게히라 미카, 그는 천사였다.
짝패 아닌 눈 색과 새까만 날개깃 같은 머리털을 갖고 지상에 왔다 해도, 천사의 이름을 따온 아이와 몇 마디 말만 나눠본다면 누구에게도 이견이 없는 평가였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선을 위해 내려온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그. 자신의 것을 나누는 데 거리낌이 없고, 어려운 이가 있으면 제 힘듦 – 그것조차 자신은 느끼지도 못하는 – 조차 내팽개치고 먼저 달려오는. 착한 아이의 표본, 모두의 형으로 자라서, 그 자리를 떠나고도 본성은 변하지 않은 채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인형’이 되기를 바라는 그.

그러나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성악설 위에 만들어졌고, 그곳에 성선설의 현신으로써 태어나는 것은 유일하고도 커다란 죄, 죄라 여기지 않아도 꼬투리 잡히기 쉬운 천성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비극은 그가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이가 성악설을 굳게 믿었다는 것이다.

그를 데리고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제 세계를 펼치고 싶던, 상처받은 영혼. 그의 이름 이츠키 슈.
신이 되고자 했던 자에게 카게히라 미카는 망가진 존재였다. 인간 되어서 마땅히 가져야 할 이기심도 악의도 하나 없는, 성악설의 세계에선 도태된 존재. 인간을 추악하다 믿는 그에게 천사란 있을 순 없었다. 도태된 자에게 신이 내리는 이름은 다름 아닌 ‘실패작’이었다.

그러나, 카게히라 미카는 틀림없는 천사였다.
완전히 독해할 순 없어도, 그가 선함을 타고났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실패작이라 이름붙인 자는 베푼다는 미덕의 영역에서만큼은 완벽을 넘어 초월한 상태였다. 그런 존재는 당연히 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고, 그렇기에 떠나간다는 것을 슈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증거가,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존경했던 사람의 모습이, 이데아가 되어 품에 안고 다녔던 인형 아가씨에게 깃들지 않았던가. 상냥함을 익히는 데선 걸음마 단계인 그에겐 닮아야 할 대스승. 그러나 쉬이 닮지 못해, 모사하는 데만 그쳤던 이상. 카게히라 미카를 이 세상의 존재로 분류하자면 ‘그녀’와 같은 범주에 분명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이데아와 실패작에는 하늘과 내핵만큼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차이라면 미카는 슈를 떠나지 않고, 오히려 자의로 제 곁에 있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불사르며 머무르는 날개. 태양은 만용을 부리는 인간의 날개를 태우지만, 천사는 외려 태양빛으로 날개를 축였기에 검은 날개의 까마귀 전령이 되었다. 카게히라 미카가 실패작의 이름을 그대로 등에 업은 것은 곁에 있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선하고, 악의의 자락 없이 선의만으로 움직이는 듯 보이는 존재가 악과 범속함이 도사리는 세계에서 존재할 수 있도록 택한 의태. 지선의 본성을 아낌없이 베풀기 위해 검게 물들어가는 것조차 무릅쓰는 데서 이츠키 슈가 처음으로 느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멍청함’이었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뒤늦게 자각했다고 믿은 지금, 그는 그런 카게히라 미카를, 숭고하고 사랑스럽다고 느끼고 있다.

그를 구성하는 모든 비대칭성이 - 헤실거리는 헤픈 웃음이, 날카로운 눈매를 스스로 휘어 짓는 살가운 표정이, 조금도 정련하지 않은 순박한 말씨가 언제부터인가 사랑스러워 보였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지켜주고 싶다. 소중히 하고 싶다. 말로 상처를 입히며 밀어낸 몫까지 사랑으로 되돌려주고 싶다. 천사를 모함하고 그 대가로 신의 자리에서 내려온 자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 걱정이 무용한 것으로 사그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슈는 계속 천과 바늘을 집어 손을 놀게 할 틈을 주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 들어온 식구는 몸집이 큰 아이였기에 꽤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얼마 전에도 미카는 헌옷수거함 옆에 버려진 인형을 주워왔었다. 평소에는 품에 쏙 들어가는 작은 아이들만 데려오던 미카는 이번에는 제 몸만한 하얀 곰인형을 데려왔었다. 흰 털에 먼지와 작은 낙엽들이 엉겨붙어 지저분했는데다가, 솜인형이라 해도 그 정도 크기가 되면 무겁고 거추장스러워 들고 오기도 힘든 것을 미카는 굳이 품에 안고서 집으로 향했다.

"카게히라, 그런 커다란 걸 들고 오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미카를 맞이하는 것은 잔소리일 줄 알았지만, 거기서 슈는 말을 멈췄다. 미카가 ‘커다란 것’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해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미카는 앞으로도 충분히 자랄 것이다. 미카의 성장을 부정하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부하를 줘왔는지 깨달은 만큼, 그를 사로잡고 있던 왜곡된 미의식을 부추기는 말은 삼가야만 했다. 무작정 임한 상냥함은, 그런 식으로 얼핏 카게히라 미카의 존재를 무한히 긍정하는 듯 보였다.

미카는 걱정어린 표정으로 자기만큼 큰 인형을 푸욱 끌어안았다. 예상대로 커다랗기 때문에 버려지는 것일까 하는 위기감이 내려간 눈꼬리에서 똑똑 떨어질 듯했다. 이번에도 해선 안 되는 말이 튀어나왔구나 싶어, 슈는 한숨을 쉬고는 미카가 방으로 들어가도록 비켜주었다.

"일단 ‘처치’가 다 끝나면, 빨래, 그러니까 목욕을 시키도록 하자꾸나."

그렇게 말을 고쳐, 곰인형이 버려질 일은 없음을 알린다. 그러나 슈가 주의를 주든 말든, 미카에게 순간의 말실수로 그를 돌아서게 하든 말든, 미카는 인형이 길바닥에 쓰러져 있으면 어디라도 달려가는 구급차가 되어주었다. 차마 내버려둘 수 없었겠지. 새로운 식구가 오면 제일 먼저 그는 제 방 침대 자리를 내 주고, 집에 갖춰져 있던 청진기와 병원놀이 장난감을 가져와 어디가 아픈지를 물었다. 미카의 방은 그 날 하루는 인형들을 위한 병원이 되었다.

"인형 씨, 인형 씨, 어데가 아픈데?"

복슬복슬한 털로 덮인 가슴에 청진기를 푹 파묻고서, 들릴 리 없는 심장 소리를 듣는다. 인형에게도 마음은 있다. 미카 자신이 인형을 자처하고 있기에 더 잘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귀를 기울이면 미카에겐 인형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버려지는 것은 마음이 부서질 정도로 괴로운 일이지. 식구들이 하나하나 늘어갈 때마다 미카는 어디가 아팠는지를 물었다. 터진 데, 솜이 흘러나온 데가 있으면 기워주거나, 상처가 심하면 새 천을 덧대주고, 털이 어지럽혀져 있으면 가지런히 정리해 주었다.

"여기가 아야아야하나? 조금만 참아래이. 아픈거 아픈거 날아가라……"

파란색 플라스틱 손잡이가 달린 장난감 핀셋으로, 털 사이에 숨은 나뭇가지며 이파리들을 하나하나 골라내 간이 휴지통에 넣는다. 털 정리가 끝난 다음에는 한 번 깨끗하게 환부를 소독해야 할 것 같았다. 아까 말한 ‘목욕’의 시간이었다. 따뜻한 물에 바깥먼지와 함께 아픔도 흘려보내고, 방 안에서 꼭 끌어안아 상처난 가슴을 온기로 메워주고 나면, 어느새 정이 들어 식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침대의 반 이상을 채운 봉제인형 더미에는 그런 사연이 있었다.

요즘 미카의 방을 볼 때마다 슈에게는 드는 생각이 있었다. 미카에게 더 넓은 방을 주고 싶다고. 인형들 사이에 파묻혀 꼭 끌어안고 잘 때의 미카는 더없이 행복해 보였지만, 동시에 인형들이 바닥에 떨어질까 무서워 침대의 좁은 한편에서 새우잠을 자는 미카가 안쓰럽기도 했다. 점점 늘어나는 인형 식구들도 편안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를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생각하는 것도 꼭 그를 닮아가는 것 같았다만, 어찌됐든 요는 슈가 미카에게 ‘제 공간’의 개념을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의 천사가 날개를 거슬리지 않고 펼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라면, 무엇이든 마련해주고 싶었으니까.

"인형씨, 다 됐데이. 이제 소독할 차례제. 세탁실이 편하나? 아니면 목욕탕에서도 괘않나? 스승님, 좀 도와도?"

곰인형 돌보기를 끝낸 미카는 저를 가릴 정도로 큰 곰인형을 집어들고서 방에서 나와 슈를 불렀다. 인형의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저 큰 것을 혼자 씻는 건 어려울 테지. 세탁기에도 들어가지 않을 크기였다. 미카는 인형을 세탁할 때면 항상 손빨래를 선호했지만. 슈 역시도 아날로그를 향한 몇몇 고집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 그것이 결코 그가 문명의 이기들을 배척한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 그는 그것을 알 것 같았다. 세탁기에 넣었다가 자기가 볼 수 없는 동안에 상하는 게 걱정이었을 테지. 조목조목 뜯어보면 미카는 슈 자신과 닮은 면들도 적잖게 있었다.

세탁실로 인형을 데려와 팔다리를 걷고 한바탕 거품투성이가 되도록 씻고 나니, 커다란 인형은 물을 푹 먹은 채 건조대 하나를 독차지했다.

"인형 씨, 크니까 한동안은 같이 못 자겠네." 미카는 아쉬운 눈을 하며 말을 꺼낸다. 큰 것의 불편. 그것은 점점 자라는 자신의 몸이 더는 ‘인형’에 걸맞지 않게 되었음에 대한 걱정이기도 했다.
"말리는 데 시간은 걸리겠지만, 그만큼 네 따스함을 받아들일 면적도 크고, 너를 안아줄 수도 있는 식구가 생기는 것 아니겠느냐."
"으응. 그리고 침대에 같이 눕기엔 쪼매 좁을 거 같아서 걱정이데이. 그러다가 인형 씨가 떨어지면 우야노."
"그래서 너를 위해 더 큰 침대를 마련해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네 친구들도 함께할 수 있는 더 큰 방도. 너도 마음 놓고 인형들을 들일 수 있는. 어떻겠느냐, 카게히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의 운을 떼 본다. 지켜왔던 그의 천성을 내보이면서 자유로울 수 있는, 천사에게 바치는 좀 더 큰 안식처.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미카가 그 말을 듣자 잔잔하게 얼굴에 깔리던 웃음마저도 싹 가셨다.

"카게히라?"

이게 아닌데. 하지만 좋지 않은 안색을 보고서 이번엔 또 어느 부분이 말실수가 되었는가, 슈로서는 그저 곰곰이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공간 모자라나?"

그 때 미카의 마음속에서는 맴돌던 걱정의 전조가 점점 불거지고 있었다.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애써 얼굴 위로 떠올리며, 미카는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길게 삐져나온 검은 긴팔 셔츠의 소매를 만지작거리고 잡아당겼다. 그 불안, 자신의 존재를 필요없는 것으로 치부당하는 것. 그 때를 위해서 항상 상정했던 최악. ‘버려지는 것’을 예상해 그것을 순응할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그것조차 두려웠다.

그리고 슈는 그런 미카에게 무작정 상냥해지기를 택했다. 상냥함이 익숙지 않은 아이를 위한 ‘인간의 사랑법’. 천사를 저버린 신의 업보를 되갚는다면, 그것이 첫걸음이 되길 바라며, 슈는 미카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카게히라."

그 동작에 시간이 멈춘 듯 가만히 있는 미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는 천사다."

인간도, 인형도 아닌 천사.
오래 전부터 해주고 싶었지만 때를 늦어버린 말을 건넨다.

"나를 위해 천사가 내려오는 영광을 어찌 거절할 수 있으리. 앞으로도 내 곁에, 나의 천사로 있어다오."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미소를 짓고, 제일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며 끌어안는다. 그의 전부를 받아들일 듯이.

일련의 행동들을 미카는 그저 멀뚱히, 초점 흐린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눈가를 흐리는 것이 물기였는지, 아니면 순간의 망연함이었는지 자신도 모른 채로. 하지만 찌릿하게 가슴 속에서 이는 아픔과 함께, 단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있었다.
천사로 있을 수 있다면 버려지지 않는다.
그것을 기억하며 미카는 자신이 알던 세상을 천국으로 재구성해갈 준비를 한다. 먼지가 쌓였던 곰인형이 하얗게 돌아오듯 세탁실로 걸어들어가 검었던 날개를 하얗게 탈색할 준비를 한다. 일그러졌다고 생각한 자신은 일그러지지 않았다고, 그렇게 말하는 저만을 위한 신의 목소리. 그가 다시 선사하는 세계. 이대로 ‘천사’로 다시 태어나,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확신은 얼마나 무너지기 쉬웠던가.

그리고 약 사흘 후, 카게히라 미카는 집을 뛰쳐나갔다.



발단은 지극히 사소한 일이었다.
천사. 그 말을 들었을 때 미카는 가슴이 크게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분명 찬사일 텐데. 사랑하는 사람이 최고의 찬사를 제게 하사하며, 곁에 있어달라는 말까지 했었다. 가슴이 아픈 것은 하늘을 날아갈 듯이 기쁘기 때문일까? 너무 기쁘면 다른 감정도 북받쳐오기 마련이랬다. 그런데 지금 미카에게 엄습해오는 불안은 기쁨을 웃돌았다. 왜? 스승님의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평소에도 슈의 기대치는 높았다. 이제 와서는 그에 임하지 못할 자신도 아니고, 거기에 부흥하는 것은 자랑이기도 했다. 오히려, 천사라고까지 불러줬다는 것은 초과달성이 아니었는가?

슈는 오늘은 잔업 때문에 늦을 예정이었다. 그 동안의 외로움. 말하고 싶은 많은 것들이 입천장 아래서 맴돌았다. 전할 수 없는 이유는 물리적인 거리와 마음의 거리. 그 대신으로 미카가 말을 털어놓기로 정한 대상은, 슈가 어릴 때부터 애지중지해온 곰인형이었다. 세월의 풍파로 털색도 빛이 바랬지만 소중히 간직되어온, 손때 묻은 인형. 동시에 점점 공간만 차지하도록 커 버리는 자신과는 달리 손바닥 크기로 쭉 존재하는 인형. 그렇게 작고 편리하게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인형 씨, 가르쳐 도. 내는 어떻게 하면 천사답게 있을 수 있나?"

미카는 인형의 손을 꼭 쥔 채 기도하듯 물어봤다. 참사가 일어난 건 그때였다. 역시 세월은 견디지 못했는지, 투둑, 하고 인형의 팔이 뜯어진 것이다. 미카는 경악으로 두 눈을 홉떴다.

스승님이 소중히 간직해온 물건을, 불출한 내가 망가뜨려버렸다.

남의 물건에 손을 되면 안 된다는 것은 어릴 때부터 배워온 착한 아이의 덕목이었다. 미카에게 많은 물건은 남의 물건이었다. 왜냐면 양보하고 사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행동규범이었으니까. 제 스승은 미카에게 많은 것을 주었지만, 공유는 온전한 소유를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기본적인 덕목은 선의 표상인 천사라면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무엇보다도, 천사로 있을 수 없다면, 제게는 슈의 곁에 있을 자격 역시도 없을 것이다.

아플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급격히 뛰는 심장은 안 하던 짓을 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미카는 황급히 손에 제일 먼저 잡히는 천으로 팔이 뜯겨나간 곰인형을 감싸 숨기고는, 쫓기듯 집을 나왔다. 불안 때문에 속이 또 배배 꼬여 며칠을 잘 먹지 못한 몸에 머리가 핑 돌았다.

내 주제에 무언가를 고친다니, 교만도 따로 없지. 나는 부수기만 한다. 그것은 내가 처음부터 부서진 실패작이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천사일 리가 없지 않은가. 배은망덕하게도 나는 나를 고쳐주고 내게 가치를, 이름을 부여해준 사람에게조차 소중한 것을 부수는 방식으로밖에 닿지 못하는 것이다.

뛰다가 힘이 빠져 미카는 터덜터덜 걸었다. 눈물이 났다. 걸려 넘어졌을 때는 눈앞이 아찔해져 일어날 힘도 없었다.


노을 진 저녁, 슈가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익숙한 활기가 없는 것을 깨달았다. 당장에 돌아오면 생글생글 웃으며 스승님 왔나, 하고 달려올 아이가 없다. 이제 데려온 하얀 곰인형도 다 말랐겠다, 새로운 옷을 지어 놀래켜줄 작정. 그것이 슈가 말한 잔업의 실체였다. 평소대로 아르바이트를 늘렸나? 연락을 취해보려 하면 집 안에서 휴대폰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휴대폰도 놔두고 나갔다니. 칠칠치 못하구나. 없는 사람에게 잔소리를 한다고 해서 그 칠칠찮은 대답이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잠시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안심담요를 찾았다. 없었다. 짜증이 치밀어왔지만 그것이 카게히라를 향하지 않도록 하면서, 슈는 대신 수건 하나를 걸쳐 머리를 식히고 있을 수 있는 가능성들을 생각해봤다. 요즘은 친한 친구들도 많아졌으니, 그들과 놀러 다니고 있을 지도 모른다. 제일 긍정적인 가능성이었다. 슈는 미카의 휴대폰을 집어 주소록을 뒤졌다. ‘나루쨩’이라는, 자신도 많이 들어 익숙한 애칭이 하트 모양 이모지와 함께 저장되어 있었다. 슈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래, 평소에도 카게히라를 잘 챙겨주는 아이였으니 같이 있겠지. 예상대로 ‘나루쨩’, 나루카미 아라시가 전화를 받는 속도는 빨랐다.

"카게히라와 같이 있는가?"
"어라? 선배가 전화할 줄은 몰랐어. 미카쨩 휴대폰도 놔두고 갔나보네. 근데 유감이야. 미카쨩은 지금 같이 있지 않은데. 왜?"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평소대로의 경쾌함을 잃지 않았지만, 상대가 상대라서 그런지 날이 서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로부터 슬슬 미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슈의 마음을 먹구름처럼 덮었다.

"카게히라는 무사히 있는 것이지?"
"무사하고말고. 내가 그러지 않게 놔둘 줄 알았어?"
"지금 장난할 때가 아닌 것이다. 카게히라는 어디 있지?"
"왕님이랑 같이 있어."

하필 하고 많은 사람 중에서도 연락처도 잘 알려주지 않고 소재지를 알기도 힘든 그 녀석이라니. 일이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하니 슈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너는 츠키나가의 연락처가 있을 것이다. 그 녀석에게 연락해서 카게히라를 바꿔 주면……"
"안 돼."

단호한 거절. 그만큼 그녀는 자신을 불신하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잠시간 뜸을 들이고,

"미카쨩에게도 시간을 줘."

침착함을 되찾고 들려온 목소리는 그 후에도 잠시간의 공백을 유지했다. 슈는 그런 상황에서도 아라시에게 따질 수 없었다. 자신 못지않게 미카를 걱정하고 있는 사람이었고, 서로의 방법론에는 이견이 있었을지언정 소중한 이에게 꼭 필요한 사람으로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보다도 미카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미카쨩이 없는 동안 외로우면 나라도 이야기 상대가 되어줄까? 좀 상의하고 싶은 것도 있고 말이야. 내일은 안즈쨩이랑 데이트라 일찍 돌아가겠지만 오늘 하루 정도는 선배랑 같이 이야기할 수 있어."
"…알았다."
"스위츠 팔러, 위치 알지? 거기로 나와."
"그래."

전화를 끊자마자 슈는 아라시가 말한 디저트 가게로 발걸음을 향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4인석 테이블을 혼자서 점거하고 있는 인영을 발견하고 슈는 그 자리에 앉았다. 아라시는 언짢은 표정으로 슈를 맞이했다.

"빨리 왔네."
"카게히라는 츠키나가와 있다고 했었지."

서로가 아무리 상성이 안 맞다 해도 공통의 관심사는 꽤 있었을 텐데, 둘이서 만날 때면 제일 먼저 꺼내는 이야기는 미카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아무래도 그 일이 아니면 서로는 마주치기를 거부하는 관계이기 때문이었을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었지만.

"그래서 이츠키 선배, 미카쨩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다는 거다."
"그럼 걔가 울면서 집을 나갔을 리가 없잖아. 왕님도 그랬어. 애가 하도 울어서 진정시키느라 진 빠진다고."

집을 나갔다. 이제야 상황이 머리에 들어오는 슈였다. 슈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그 대신 아라시를 빤히 쳐다봤다. 미카가 울고 있을 때라면 제일 먼저 곁에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여기에 있는 것이 의아했는지. 그 시선을 눈치 채고 아라시는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끼어들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해서 빠져있는 것뿐이야. 지금 상황에 난 선배 욕밖에 안 할 테니까. 미카쨩도 그걸 바라지 않고, 왕님은 그런 데선 예리하니까. 미카쨩네 동아리 선배랑 아도니스쨩도 있으니까 왕님이 말실수를 해도 안심은 할 수 있을 거고."

아라시는 시켜뒀던 캐러멜 마끼아또를 테이블 한편으로 잠시 밀어두고 나머지 한 사람분의 아이스 밀크티를 슈에게 건넸다. 카게히라라면 여기에서 딸기라떼를 시켰겠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도 잘 모르겠다는 게야. 상황이 잘 돌아갈 거라고 믿었는데."
"선배가 모르면 어떡해."
"최근에는 상냥하게 대해주려고 했던 것이다. 특별히 잘 해주려고 했다기보다는, 원래 했어야 하는데 못해준 것들을 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 아이의 말에 좀 더 귀 기울이고, 무대에 설 때도 그 아이가 원하는 대로 구상하게 해 줬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어. 함께하는 시간을 더 많이 만들어주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도 잘 해나갈 수 있도록 준비도 해 주고."
"없는 동안의 준비라면?"
"내가 유학을 떠나고 나서, 그 아이가 혼자서도 생활할 수 있을만한 집을 알아보고 있었다는 거다. 물론 돌아오면 나도 같이 지낼 곳으로. 카게히라에게도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운을 떼보려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할 때의 카게히라는 잠깐이지만 굉장히 불안해 보였어."
"같이 살 거라고 이야기는 했어?"
"당연히 그러리라고 생각했던 게야. 나도, 그 아이도 이제는 서로에게 없어선 안 될 존재임을 자각은 하고 있으니까."

낯간지러운 표현들이 자각 없이 말 중간중간에 섞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라시는 천천히 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들으면 들을수록, 이 사람 참 서투르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선배 평소 행동 생각하면, 갑자기 잘해주면 나도 놀라겠다."
"그 정도로 나답지 않았단 거군."
"왜 있잖아, 엄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갑자기 너그러워지면 자길 포기한 줄 안다고. 그런 불안 아냐? 선배도 미카쨩에게 부모 노릇 비슷한 걸 했고, 엄했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예술이니 뭐니 읊어대니까, 걘 자기가 기대를 저버렸다고 믿었을지도 몰라."

알 것도 같았다. 결코 유한 편은 아니던 집안에서, 슈 자신이 절망했던 시기에 가족들은 등을 돌렸었다. 내버려 두라는 말이 오가는 것은 자유의 상징만은 아니었다. 그나마 너그러웠던 형제자매들의 동정심에는 오히려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이야말로 추락한 제게는 바라는 것이 없다는 증거인 것만 같았으니까. 그러나 슈는, 기대를 받을 수 있다는 것 역시도 사치임을 알았다. 왜냐하면 카게히라 미카는.

"그 상황에서 이사 이야기까지 꺼내니까 자길 내쫓을 거라고 믿어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리고 이제 좀 상냥해졌다고 착각하지 말았으면 하는데, 이츠키 선배, 계속 미카쨩한테 심한 말 했잖아."
"인정하지."

소중한 아이의 친우의 입에서, 결코 달갑지 않은 말의 쇄도가 철창 모양이 되어 제 죄를 알렸다. 그 모든 게 명백한 진실임을 회피할 길은 없었다. 그럼에도 슈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이기심일지라도.

"그렇지만, 그 아이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를 선택해줬어. 나는 그 마음까지 꺾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비탄에 가까울 정도가 된 목소리도 슬슬 메이기 시작했다. 아라시는 사랑에 고개를 숙인 남자의 고해를 묵묵히 듣다가, 그의 본심을 제 입으로 고하게 할 질문 한 가지를 던졌다.

"선배는 미카쨩을 좋아해?"
"물론, 아끼고 있다는 거다. 늦지 않았다면 제대로 전하고 싶어."
"그러면 진작에 좀 더 상냥하게, 좀 더 솔직하게 대해도 됐잖아?"
"나는 세상에 천사는 없다고 믿었다."

그 말이 내포하는 것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 그것은 짐작뿐이지만 상대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기에 – 다만 상처입지 않기 위해서 취한 방식이 달랐을 뿐. 가시를 세우느냐,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느냐로 – 잠시간의 침묵 외에는 별다른 대꾸도 없었다. 그래도.

"그 아이는 하늘이 내게 내려준 천사인 게야."

곁에 있어주기를 택한 그 아이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면, 완벽하게 제 말을 듣는 인형도, 추악하고 속물적인 인간도 아닌, 아름다운 사람에게 어울리는 찬사라면, 분명 그것을 뛰어넘어 전해질 마음이라고 믿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라고는."

그러나 그 대답을 들은, 이츠키 슈와는 다른 곳에서 카게히라 미카라는 ‘인간’을 지켜봤던 나루카미 아라시는,

"선배가 그런 말을 하는 게 미카쨩을 기만하는 거야."

이를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탁 트인 유메노사키 학원 궁도장은 어두워지면 별을 볼 수 있었다. 부활동도 없는 날이겠다 느지막한 시간이겠다, 네 사람이 야외 바비큐 세트를 펴고 고기를 구워먹고 있었다.

"미카 군은 성장기니까 좀 더 먹어도 돼요."
"하지만 츠키나가 선배가 무겁다고 했데이."
"키가 크고 근육이 붙었다는 신호니 좋게 받아들이면 된다. 자, 고기를 먹어라."
"응아앗, 그래도 며칠간 아무것도 안 먹었으니 내 무께……."

양쪽에서 권유하는 고기의 유혹을, 미카의 꼬르륵거리는 배는 결코 넘어가주지 않았다. 더군다나 주는 사람들도 믿을만한 아이들이니 심리적인 문제도 없었다. 상냥한 선배 아오바 츠무기와, 마찬가지로 상냥한 나루쨩의 부활동 친구 오토가리 아도니스. 두 사람이 주는 게 이상할 이유는 없었다. 이제는 자라는 것도 은혜를 입는 것도 조금 덜 무서워졌으니, 고기 한두 점 얻어먹는 것도 슬슬 괜찮은 시기여도 좋을까. 잠깐이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 곧이어 생각난 사람 때문에 갈팡질팡했지만.

"와하! 잘 구워졌다! 역시 합숙 하면 바비큐 파티지. 정갈해야 할 궁도장에서 고기파티라니 인스피레이션이 차올라. 미카엘, 너도 좀 더 먹어."

그리고 미카를 궁도장으로 데려온 장본인인 츠키나가 레오는 궁도장이 자기 집 앞마당이라도 되는 양 지글거리는 고기를 뒤집으면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그, 그런 별명으로 부르는 건 쪼매 그만해도……."
"알았어 알았어. 너무 부담되는 이름이지. 그럼 미카."
"응아아, 그래두 역시 이름보다는 성이 편해서…"

미카는 플라스틱 접시에 자기 몫의 고기를 두 점 정도 얹은 채로 깨작깨작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사실상 자신을 위해 마련된 자리임에도 – 미카가 하도 울자 분위기를 쇄신하겠다며 레오가 합숙을 하겠다고 했고, 이에 잘 됐다는 듯이 아도니스가 고기에 야외용 그릴과 이불까지 챙겨오는 바람에 성사된 자리였다 – 쉽사리 손은 가지 않았다. 그래도 고기는 맛있었다.

"스오는 참 기특한 애야. 궁도장에 이렇게 별의별 게 다 있는 것도 걔 덕분이니까."
"그러니까 그거 기특하다기보다는 츠키나가 군한테 휘둘려서……."
"시끄러. 즐거우면 됐잖아."

갑자기 신이 난 듯 후배 자랑을 하는 레오에게 츠무기가 태클을 걸려고 했지만, 들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들은 미카는 또 괜스레 쭈그러들어버렸다. 아마 레오가 말하는 것은, 여름방학 때 아라시를 위해 승마장 라이브 – 순간의 실수였지만 – 를 하러 갔을 때 많이 신세를 졌던 단정한 인상의 후배였을 것이다.

"내도 스승님한텐 기특한 아가 되고 싶데이. 어디 내놓아도 자랑할 수 있는. 내는 그런 아가 되지 못해서……."
"아, 또 유탄 튀었다! 미안미안. 내가 가끔 좀 생각없이 말이 튀어나와. 그래도 조심할게. 옆의 둘도 내가 조심하게 도와주라."
"도와주더라도 들을 생각이 없는 게 아니었나요."
"소란은 그만, 즐겁기 위해 모인 자리다."

작은 실랑이가 일 것 같은 분위기 속, 아도니스는 풀 죽은 미카의 접시에 방금 구운 고기 몇 점을 더 얹어주면서 미카의 어깨를 토닥였다.

"오토가리 군은 내가 자라는 게 좋나?"
"자라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닌가. 성장을 하면 시야도 높고 넓어지는 법이다. 그걸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나? 오히려 두려워할 것이 줄어들지."
"하지만 인형이 너무 커 버리면 인형의 집에는 안 들어간데이. 큰 인형은 들고 다니기도 거추장스럽구."

울상이 되려는 미카를 어느새 옆에서 츠무기도 달래고 있었다.

"더 큰 집을 마련해줄 수는 있잖아요? 슈 군도 미카 군이 혼자서도 건강하게 있을 수 있기를 바라니까 미카 군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응아아… 응아응아아아응아아아아……"

그러나 미카의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은 채, 몸은 웅크린 채였다.

"아, 정말 답답해서 못 봐주겠네. 미카엘, 너 잠시 좀 보자."

그것을 보다 못한 갑자기 레오가 고기를 굽다 말고 몸을 웅크린 채인 미카의 어깨를 탁 쳤다.

"응아앗!"

미카는 화들짝 놀라 접시를 던질 뻔 했다. 그 옆에서 츠무기가 조심조심, 하고 작게 말하며 접시를 잡아주었다.

"앗, 너무 세게 쳤나.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 뭐 나쁜 짓 하려는 것도 아니고, 잠깐…… 널 가만히 내버려두기가 힘들어서 그런 거야. 괜찮다면 이야기 좀 하자. 응?"
"이야기?"
"나루도 걱정 많이 하고 있어. 객관성을 보장할 수 없어서 끼어드는 건 막았지만, 어쩌면 지금 슈랑 한창 이야기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근데 지금 당장 너한테는 시간이 필요해."

두 어깨를 붙잡고 시선을 피하지 않는 레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미카는 옆에 있던 츠무기와 아도니스를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그러나 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깐 솔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때도 필요할 거예요, 미카 군. 이렇게 피하고 혼자 앓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요. 제가 모자라서 들어주는 것 말고는 할 줄 모르지만,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 기댈 데가 있는 건 좋은 것이니까. 접시 잊어버리지 말고."

그렇게 말했다. 레오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카를 일으켜세워, 궁도장 마루에 자리를 잡고는 옆에 앉도록 탁탁 바닥을 쳤다. 미카는 담요에 감싼 테디베어를 꼭 쥐고서 얌전히 그 옆에 앉았다. 이제 보니 슈의 안심담요였다.

"그래서, 너는 슈가 널 제대로 봐주지 않아서 불안해서 집을 나왔다, 그랬지?"

미카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기하네. 넌 분명 슈가 좋아하는 애인데 왜 그럴까."
"스승님이 나쁜 건 아이다. 분명 내한테 따뜻하게 해 주려고 노력도 마이 하고 있다. 그게 내는 무섭고, 또 걱정되지만……"
"따뜻하게 대해주면 좋은 거잖아. 근데 무서운 부분이라면?"
"그게 말이제……."

미카는 뜸을 들이다가, 마음속을 찌르고 있던 날카로운 단어 몇 개를 말로써 집어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츠키나가 선배는 내 어디가 천사 같다고 생각했는데?"
"일단 이름이."
"이름 말고."

미카의 말을 듣자마자 레오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넌 참 재밌는 애네! 짜증날 정도로 착해 빠졌는데, 아, 이러니까 꼭 세나랑 똑같이 말하는 거 같다. 이름이 천사라고 자기가 진짜 천사인 줄 알아."
"내 뭐 잘못했나?"
"잘못한 건 아닌데, 네가 잘못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있을까?"
"그치만 스승님은 내가 천사라고 캤다."
"슈가 그랬어? 그럼 슈가 잘못했네."

너무나도 간단하게 레오는 단정지어 버렸다.

"스승님은 잘못 없다! 스승님의 기대에 못 차는 내가 잘못한 기다. 내를 좋게 말해주는데 스승님 물건에 함부로 손 대고 망가뜨린 내가 잘못이다."

미카는 홧김에 외쳐버렸다. 자신에게 존재를 부여한 사람을 부정당하는 것은, 여전히 자신을 부정하는 것만큼 아픈 일이었기 때문에.

"내도 알고 있다. 이제 스승님의 예술의 방향은 바뀌었다는 거. 모든 것을 증오할 듯이 예술을 하던 스승님은, 그만큼 내를 사랑하는 걸로 새로운 걸 만들어내고 싶은 기다. 스승님은 내를 보고 천사라고 해 줬다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하는 미카의 얼굴에는 잠깐이지만 환희가 엿보였다.

"그건 좋은 말인데, 분명 칭찬인데, 자꾸 그 말만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에 손을 대면서 미카는 말했다. "여가 계속 아프다. 꾸욱꾸욱 쥐어짜는 것 같데이. 온 몸이 내는 그게 아이라고 말하는 거 같다."

느긋하게 분위기를 조금씩 띄우면서 이야기를 들을 작정이었던 레오도 미카의 그런 말을 듣고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내는 천사가 되어야만 한다. 스승님의 세계에 잡티 하나 섞어선 안 된다. 스승님이 바라는 완벽한 인형이 될 수는 없지만 천사는 될 수 있데이. 그치만 내는 내게 은혜를 준 스승님한테, 이런 식으로밖에 못하고……."

망가진 곰인형의 터진 솜 위로 눈물이 한두 방울 떨어졌다. 그 뒤에는 훌쩍이는 소리만이 이어졌다. 어릴 때부터 착한 아이가 되라고 가르침 받았지만, 해도 해도 자신은 모자랐다. 양보하는 것도, 베푸는 것도 당연한 것처럼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던 시절이 스쳐지나간다. 미카는 담요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담요를 적셔갔다.

미카의 등을 잠시 토닥이며, 하늘에 뜨기 시작한 달을 쳐다보다 레오는 이내 입을 열었다.

"미카엘, 아니 미카, 네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말야, 기껏 애가 인간미가 있게 돼서 좋은데 슈가 굳이 그런 건 둘째 치고, 네가 변해야 하는 부분도 있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네가 되고 싶은 건 ‘천사’가 아니야."

자조를 말에 섞으며, 레오는 미카에게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오랜 후회와, 예전에 자신이 소중한 사람에게 부여한 주박의 정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 나아가기 위한 실마리는 옆의 아이만이 아니라 제게도 필요한 것이었겠지.

"네가 되고 싶은 건 결국 천사상, 오브제야. 그렇게 되면 슬픈 일이야."

그 말에 미카는 의아함을 표했다. 천사상? 오브제? 그것도 결국에는 천사 형태의 인형이라고 하면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인가?

"얘기가 좀 길어질 거 같은데, 안 졸 자신 있어? 슬슬 잘 시간인데. 피곤하면 누워서 들어도 돼."
"내는 괘안타. 이야기 듣는 건 자신 있고."
"그래. 그런 점은 확실히 좋은 점이네. 그럼 난 실례."

레오는 자기가 말을 꺼내놓고는 자기가 궁도장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그러나 그의 눈만큼은 밤이 내려온 하늘 아래서 쨍하게 살아있었다. 미카는 자신도 드러누울까 했지만 그랬다간 이불도 있고 진짜로 잠들어버릴 지도 몰라서 쭉 앉아있기로 결심했다.

"자는 거 아니야. 난 쌩쌩해. 그냥 누우면 편해서."
"선배는 야행성이네. 내는 야맹증이 있어가 밤에는 잘 몬 다니겠던데."
"밤은 인스피레이션의 보고니까. 아, 말 나온 김에, 너 예술 하는 사람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게 뭔 줄 알아? 뭐 나도 남 말할 얘기가 아니지만."
"그기 뭐꼬?"
"절대 사람을 뮤즈 삼지 말 것. 아니 뭐 창작 한다면 다들 흔하게 하는 일이지만, 적어도 나는 안 그러기로 했어."
"꼭 선배도 그랬던 적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있으니까 말하지. 남 이야기 하는 거 아냐. 내 이야기고, 슈의 이야기야. 그리고 너의 그 ‘스승님을 위해서’도 까딱하면 위험해질 수 있고 말이야."
"내는… 내는 그래도 무대 하는 게 즐겁고, 스승님을 위해서 무대 하는 것도 기쁜데. 그래가 하는 건데 그것도 안 되나?"
"그 정도는 괜찮아. 너, 일단 즐겁잖아. 그리고 ‘같이’ 하는 게 즐거운 거잖아? 그치."

‘같이’ 부분에서 레오는 양손 두 손가락으로 따옴표를 만들며 강조를 했다. 마치 그것이 큰 차이를 만든다는 듯이.

"으, 응. 스승님이랑 같이." 미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속에서도 ‘같이’라는 말에서 미카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던 것처럼 보인 건 착각이었을까.

"스승님이 기뻐하는 모습, 스승님의 무대 위 모습, 전부 내가 노래하고 춤추는 원동력이데이. 선배 말대로라면 내한테 영감을 주는 그런 기다."

무대 이야기가 나오자, 시종일관 울상이었던 미카의 얼굴에도 드디어 웃음꽃이 피었다. 레오도 그 모습을 보고 따라서 미소짓다가, 쭉 자신에게 묻고 싶었던 것을 미카에게 물었다.

"근데 예술에 영감을 준 사람이라면 왜 꼭 뮤즈여야 할까? 같이 예술을 하는 친구 정도면 왜 안 될까?"
"그것보다 특별한 사이니까?" 당연한 듯이 미카가 내뱉었다.
"친구는 안 특별해? 너랑 나루는 안 특별한 사이라고 말할 수 있어? 우리 애들이 도와줬던 그 라이브를 움직인 것도 네 영감이잖아."
"당연히 특별한 거 아이가. 그리고 그 땐 윽수로 즐겁구 기뻤다. 스승님이랑 라이브할 때도 그렇게 기뻤데이."

이제 슬슬 안정이 되는지 조금씩 기쁜 이야기를 하는 미카였다. 즐거웠던 여름방학 때의 일, 유성제 때 축제 음악에 맞춰 후배들과 노래했던 것, 거기에 이어서 할로윈 때, 처음으로 Valkyrie의 이름을 내걸고 무대의 중심이 되어서 가슴을 펴고 즐겁다고 온 천하에 외칠 수 있었던 때.

"그래. 거기에는 즐거움이랑 기쁨이 있어. 상생도 창작에는 중요한 리소스지. 근데 뮤즈가 된다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누군가의 예술을 위해서 인간 자원이 되어서 좀먹히는 거야. 그리고 너는 지금, 슈의 뮤즈가 되려고 하는 거지?"
"스승님을 위해서라면……."
"또또또또 그런다. 그러지 말고 네 기분을 말해봐."

레오는 혀를 차면서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미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카는 뜸을 들이다가 담요를 꼭 끌어안으면서 가슴 깊은 곳에 있었던 마음을 끄집어냈다.

"내는 스승님이 좋다. 스승님이랑 쭉 함께 있고 싶데이. 스승님이 상냥하게 내를 대해주는 것도 좋고, 더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그치만 내가 너무 어리광만 부리다가 그게 스승님 발목을 잡는 건 싫다. 근데 솔직히 말하자면, 스승님을 떠나게 되는 건, 그리고 혹시라도 스승님이 내를 버리게 된다면, 그건 더 싫을 기다.
"하지만 스승님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는 스승님을 위해 인형으로 있을라 캤다. 그건 스승님의 꿈을 지켜주기 위한 거기도 했데이. 내가 스승님의 꿈을 가로막으면 버려지는 것도 각오했는데."

"그런 거였구나. 많이 힘들었겠네. 근데 말야, 슈랑 이걸로 이야기는 해 봤어? 걘 네가 이런 생각 하는 거 알아?"

당연히 스승님은 뭐든지, 거기까지 말하려다가 미카는 멈췄다. 생각해보니 슈는 자신이 애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에 대해서 미카 자신이 느끼는 바를 말한 적은 여태까지 없었다. 자신도 스승님의 뜻대로를 늘 입에 달고 살았지만, 막상 그의 본심을 직접 물어보는 것은 주저하고 있었다.

"난 그걸 몰랐어. 그래서 세나한테도 참아주게 만들었어. 좋아한다 좋아한다 말은 하면서, 걔를 내 영감의 원천 삼는 게 최고의 칭찬인 줄 알았지 뭐야. 슈도 몰랐었다가 이제 알아가려고 하는 거지. 근데 걘 말투도 꼭 고상하게 하면서 정작 솔직하게 말할 줄은 몰라. 거기에 너도 세나처럼 참고 애꿎은 데에서 원인을 찾는 데 익숙하고. 이젠 너네 둘 다 꽤나 인간미를 찾아서 가족 같고 좋은 줄 알았는데, 표현은 여전히 그때 그 방식.
"너희 둘 다 그래선 안 돼. 그래도 슈가 변하려고 한다면, 그 꼬장꼬장한 완벽주의자 녀석이 잘못을 해가면서라도 너랑 잘해보고 싶어한다면, 너도 변하는 걸 두려워하지 마. 좋아한다고 말해. ‘스승님만을 위한 노래의 천사’ 같은 게 될 생각 하지 말고, 눈을 맞추고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하고 가끔 투정도 부려. 잘못해도 괜찮아. 너도 사람이잖아. 마음이 없고 예쁘기만 한 오브제가 아니라."

쉴 새 없는 말을 마치고 레오는 미카를 살폈다. 미카는 담요에 얼굴을 묻은 채였다. 너무 내 이야기만 해서 잠들었나? 했지만, 어깨가 조금씩 움직이고 흐느끼는 소리가 나는 걸 봐서는 아직 깨어있는 것 같았다.

"내, 스승님한테 전부터 말하고 싶은 게 있었다. 먼저 여기 가슴이 계속 욱신거린다고, 이야기할 기다."
"그래. 그것부터 시작해 봐."

레오는 미카가 가지고 있던 담요를 받아 미카의 어깨에 살며시 덮어주었다. 분명 슈의 물건이었을 텐데 순순히 남의 손에 건네주는 게 신기했다. 이것도 모종의 신뢰라고 생각하면 뿌듯한 기분이었다. 어느새 다른 두 사람도 미카의 곁에 와서 미카에게 따뜻한 말을 건넬 준비를 했다.

"미카 군은 좋은 사람이에요. 좋은 사람이지만, 사람이니까 모자란 곳도 있게 느껴질 거예요. 하지만 그걸 계기로 또 바꿔갈 수 있어요. 저 같은 결여된 인간조차도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마법을 상상할 수 있도록 배워가니까요. 미카 군, 인형을 솜씨 좋게 잘 고쳤었죠? 바느질 상자도 같이 가져왔으니까, 슈 군의 인형에게도 미카 군의 따뜻한 손길을 줘 봐요. 그걸로 전해질 거예요."

"너는 약한 자에게도 늘 도움의 손길을 뻗기를 주저하지 않지. 거기다 손을 뻗으면서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데서 진정한 강함이 느껴져. 그렇기에 너를 신뢰하는 사람들도 많아. 여기에 무릇 사람이라면 너 스스로를 지켜야 할 때 무방비해지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네게 사람들이 주는 애정도, 너 스스로에게 네가 주는 애정도 소중히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라는 것을 두려워 마라."

미카의 옆에 바느질 도구 상자와 새로 구운 고기가 담긴 접시가 놓인다. 눈물을 닦고서, 미카는 근심을 조금이나마 흘려보낸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웃음으로 화답한다.

"응. 츠무쨩선배, 오토가리 군, 고맙데이. 그리고 츠키나가 선배도. 아까는 내를 위해서 준비해준 자린데도 제대로 못 즐겨서 미안했다. 그래두 남은 시간은 즐겁게 지내고 싶다. 스승님한테도 즐거웠다고 말하고."
"와하하! 미카가 기운 차렸다! 그래그래, 오늘은 실컷 놀고 가. 아직 고기도 남았고 너도 내 이야기 들어주느라 잠 다 달아난 거 같은데."
"내일은 노는 날이니까, 미카 군이랑 같이 인형가게라도 가요."
"그거 좋지. 다들 찬성?"
"나는 찬성이다."
"내, 내도 가고 싶다. 어쩌면 새로운 식구가 늘 지도 모르고."
"좋아, 그렇게 하나둘씩 데려와서 대가족이 되면 즐겁지!"

깊어가는 밤은 다시 시끌벅적한 활기를 되찾았다. 나중에 다른 궁도부원들에게 혼나게 될 일은 당장 생각할 것이 아니기에, 바비큐 파티를 곁들인 합숙은 계속되었다.



"안즈쨩은 문어 인형이 좋다고?"
"문어가 아니라 신화생물이야."
"안즈쨩 말만 들어보면 어마무시하게 무서운 거 같은데, 이렇게 귀여우면 그냥 문어나 좀 귀여운 외계인 같아."
"무서운 것도 뭐든지 귀엽고 친숙하게 만들어버리는 게 봉제인형이니까. 생소한 이야기도 그런 식으로 눈에 익힐 수 있어. 거기다 방심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고. 혹시라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광기를 얻을지도 모르지."
"어머, 안즈쨩은 언니 놀래키기가 취미지? 그치?"
"정말로 놀래켜줄 생각도 있는데. 언니는 TRPG 해봤어?"

화사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인형 가게 안에서 두 사람이 조금 이질적인 생김새의 인형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조금 엉뚱한 대화가 취미 – 사실 그 정도의 엉뚱함을 가졌으니까 유메노사키 학원의 특이한 사람들과 대화가 성립하는 거였겠지만 – 인 프로듀스과 학생, 안즈는 유난히 그 인형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라시에게 인형의 비화를 절찬리에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 때 맞은편에서는 같은 학교 교복 차림의 네 사람이 각자 몫의 곰인형을 들고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곰이라고 하면 곧 맹수일 텐데, 이렇게 친숙한 인형의 상징이 되다니 참으로 신기하군."
"아, 그런 거였데이! 오토가리 군. 내 이제 알 거 같다. 커다란 맹수도 귀여워질 수 있는 게 인형인 거제. 울 집에도 얼마 전에 엄청 큰 곰인형 씨가 왔는데 윽수로 귀엽다 안 카나."

공명한 것처럼 두 일행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인형의 힘이었던 것일까. 그 때 네 사람 쪽 일행 중 한 명이 소리를 높여 반대편 일행을 불렀다.

"앗, 나루쨩이랑 안즈쨩이다!"
"어? 미카쨩? 아도니스쨩이랑 왕님도?"

아라시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보면, 영혼의 단짝과 함께 낯익은 얼굴들의 일행이 보였다. 여기서 마주치게 될 줄이야, 하는 기분이 반가웠지만 그것보다 아라시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미카의 안부를 물었다.

"미카쨩, 기분은 좀 괜찮아? 왕님이 이상한 소리는 안 했고?"
"아이다. 별 일 없었다. 오히려 기운을 북돋아줬다."
"나루도 별 걸 걱정하네. 우리 애들도 그 정도로 걱정해봐."
"내가 걱정하면 그 이상으로 이즈미쨩이 참견하고 있으니까."
"아, 그래, 그랬지."

두 일행이 한데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쯤에, 안즈가 아라시의 어깨를 찌르며 불렀다.

"뭔데, 안즈쨩?"
"언니, 재밌는 거 보고 싶지 않아?"

분명 둘은 동갑이었을 텐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아라시를 언니라고 부르는 안즈였다. 안즈는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아라시에게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츠키나가한테 연락해서 카게히라한테 바꿔달라고 할 수 있나'
'그렇잖아도 지금 만났는데요'
'그쪽으로 가겠다. 지금 어디지'

그 짧은 메시지의 끝에는 지금 있는 인형 가게의 GPS 정보가 전송되어 있었다. 그 이후로 메시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역시 프로듀스과의 전학생은 모두의 비상연락망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을 정도의 준비성이었다.

"재밌는 거라니, 이츠키 선배를 여기서까지 보고 싶진 않은데."
"기다려 봐. 언니는 이런 사랑 이야기 좋아하잖아."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인형 가게의 문이 확 열리면서,

"카게히라! 여기에 있느냐!"

크게 이름을 부르며 황급히 이쪽으로 달려오는 분홍머리의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이에 질세라,

"스승님!"

미카 역시도 그를 부르면서 달려나가는 것이었다.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 진한 포옹을 했다. 소란스러운 재회에 인형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이 전부 슈와 미카 두 사람을 쳐다봤다.

"정말 빨리 왔네."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아연실색하면서도, 아라시는 무심코 풋 하고 웃어버렸다. 사랑이 사람을 바꾼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한 것 같았다.

"그러게. 정말 빨리 왔네." 안즈도 그 옆에서 거들었다. 늘 프로듀서로서 아이돌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말해왔기도 하지만, 실은 학교에서 툭하면 일어나는 이런 돌발 상황들을 지켜보고 또 거기에 휘말리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자신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역시 너희 둘, 정말 가족 같구나! 좋았어. 이걸로 오늘분 인스피레이션은 떠올랐어! 오랜만에 안 쓰던 사랑노래를 써 줄게. 너희들 헌정곡으로!"
"츠키나가, 시끄럽다는 거다. 다들 우릴 쳐다보고 있지 않느냐."

한 손으로는 미카의 등을 매만지면서, 갑자기 목소리가 커진 레오를 저지하는 슈였다. 그러나 이 광경에서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은 유독 시끄러운 이 녀석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슈 군, 미카 군, 정말 다행이에요. 앞으로는 서로 잘 이야기하면서 지내기에요?" 안경 너머로 눈물을 닦으며 그들을 축복해주는 츠무기,

"아오바, 너마저?"

"잘 된 일이다, 소중히 해라, 그 마음." 그리고 묵묵히 그들을 지켜보며 응원의 말을 건네는 아도니스.

"어떻게 다들 한 술 더 뜰 수가 있는 것이지……."

물론 그들이 전부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짝짝짝, 박수 소리가 하나둘씩 겹쳐지기 시작했다. 경사났네 경사났어 하며, 같은 학교 학생들은 물론이고 가게 안의 사람들, 점원들까지도 슈와 미카를 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슈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져 이 소란에서 벗어날 방법을 재빨리 떠올리려 했지만, 미카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슈에게 꼭 달라붙어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스승님, 스승님… 내 스승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그래, 카게히라, 집에 가면 전부 들려주지 않겠니."
"응. 스승님, 그리고 내 정비해도."

눈물 맺힌 눈으로 올려다보는 미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보였다. 슈는 그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미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기만 하면 주변의 시선은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자, 그럼 우리 집으로 돌아갈까."
"응. 그러자. 츠키나가 선배, 그리고 다들 고마웠데이."

미카는 허리를 꾸벅 하며 인사를 하고는, 슈의 손을 잡고 새로 데려간 곰인형을 꼭 안은 채 가게를 나갔다.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따뜻한 시선들이 배웅해주고 있었다. "앞으로 미카쨩에게 잘해" 같은 말들이 따라붙은 것 같지만, 그 걱정은 이제부터는 조금 덜어도 되겠지.



아늑한 집, 인형들로 둘러싸여 있던 침대에 오늘은 미카만이 누워있다. 인형 친구들도 자신을 아껴준 인형병원의 의사 선생님의 마음이 빨리 낫기를 바라며 조용히 자리를 비켜줬다. 얼마 전에 데려왔던 커다란 곰인형, 그리고 결국은 다시 고쳐진 슈의 옛 곰인형과 인형가게에서 새로 온 곰인형이 마치 가족사진처럼 크기 순서대로 옷장 앞에 앉아 있었다.

와이셔츠만을 입고 편한 자세로 누웠지만,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가슴 속의 욱신거림이 간격을 좁히며 미카를 괴롭혀왔다. 깨끗이 씻고 편한 마음으로 있으렴, 하는 그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르는 것은, 미카의 방이 인형병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인형으로서 마음을 치료받는 일, 오늘은 제 스승에게 자신이 부탁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제 방 문이 열리면서 기다렸던 사람이 의사 가운을 입고 목에 청진기를 두른 채 찾아왔다. 평소 미카를 정비할 때 쓰던 갖가지 화장품들이나 도구들 역시도 상자에 넣어서 미카의 침대 옆에 두었다. 슈는 미카를 일으켜 앉히고 그 앞에 앉았다.

"오늘은 내가 너를 정비할 차례구나."
"응. 잘 부탁한데이."

얌전히 앉은 채로, 미카는 와이셔츠 앞의 단추를 조금씩 풀어갔다. 살짝 열린 셔츠의 앞섶 사이로 방금 씻어 뽀송한 살결이 보였다. 조금은 자라서 다져진 가슴 안쪽으로는 계속해서 심장이 뛰었다.

"그럼 어디가 아픈지 말해보거라."
"가슴이 계속 뛰고, 가슴 안쪽이 꾸욱 한데이."
"그렇구나. 그럼,"

슈는 미카의 가슴팍에 청진기를 대었다. 차가운 감촉에 미카가 몸을 옅게 떨었다. 청진기를 타고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소중한 이의 심장소리를 이렇게 크게 들어본 적이 있던가. 몇 번이고 끌어안으면서 귀를 기울인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니 아플 정도라는 게 체감되었다. 자신과 같이 있을 때마다 이렇게 가슴 뛰는 채로 있었는가. 긴장한 손은 떠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너는 나를 생각할 때마다 이런 상태였던 건가."

슈가 그렇게 묻자, 미카는 대답 없이 청진기를 든 슈의 오른손 위로 제 두 손을 포갰다. 천천히, 제 가슴팍에 대고 슈의 손을 누르는 미카였다.

"응, 스승님, 소리 들리제?"
"물론 귀 기울이고 있다는 거다."
"더 들어도. 내가 스승님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

미카의 목소리는 어제 많이 울었던 탓인지 잠겨 있었다. 슈는 미카가 제 앞에서 소리 내어 우는 것을 본 적이 얼마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카를 아직 ‘인형’이라고 간주하던 시절에는 그의 마음을 헤아릴 마음의 여유도 없었거니와, 격식을 위해서 많은 표정들을 무대 뒤편으로 치워놓았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천사 같은 미소. 허나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좀처럼 마음이 맞는 일이 없었던 제 동료에게, 미카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를 안다면 슈는 당연히 정곡을 찔렸을 터였다. 그리고 지금의 미카는 웃고 있지 않았다.

"많이 아팠느냐."

어떤 말을 해 줘야 할지 모르지만, 미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싶었다. 청진기는 그대로 가슴에 갖다댄 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답을 기다린다. 미카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힘겨운지 입술을 우물거렸다. 심장 소리가 빠르게, 그러나 규칙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괜찮아. 무엇이라도 좋으니 이야기하거라."

가만히, 슈는 미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어깨를 끌어당겼다. 미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사랑하는 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안심해도 돼. 이제 괜찮아. 닿으려고 노력하는 수많은 말씨들이, 새하얗게 표백된 채 제 본심을 꾹 감싸 숨긴 날개에 원래 색을 되찾아주려 맴돌았다. 혼자서 앞으로 나아간다고 해서, 앞에서 맞이한다고 해서 그만이 아닌 것들. 그것마저 제 손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짊어지기로 결정한 책임이었기에.

"괜찮아, 괜찮아. 나의……. 나의."

인형도, 천사도 아닌 존재,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인간은 믿지 않았고, 떠나갈 존재에겐 주지 않았던 이름이 있었다. 그 생소한 울림을 입에 담아본다.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먼 옛날에 다짐했던 것도 같은.

"내 사랑."

쿵쿵 하고 심장 뛰는 소리가 점점 빨라진다. 심장 소리를 새장처럼 가두는 날개의 푸드덕거리는 소리. 그 속에서, 순백의 감옥을 흔드는 한 마디가 열쇠가 되어 미카를 부르고.

"스승님아,"

마침내 미카는 입을 열었다.

"내 어리광 부려도 되나?"
"그런 건 묻지 않아도 되는 게야."

허가보다 위력 있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미카는 슈의 목에 팔을 두르며 입술을 맞췄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급작스러운 키스에 슈는 제 심장도 크게 뛰는 걸 느꼈다. 눈앞의 사람이 보여주는 돌발성과 거기에서 뻗쳐오는 모든 감정을 끌어안고 어루만지고 싶어, 천천히 미카의 허리에 청진기를 들지 않은 손을 감았다. 그대로 잠시 있으니 미카의 머릿속 이명도 서서히 공명하는 고동에 저물어갔다. 인간임을 증명하는 두 고동만이 현재의 풍경에 유의미한 소리가 되고 있었다.

약간 부족한 시간만을 지내고 미카는 입술을 떼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 하지만 감정의 첨예한 결은 완벽한 작품인 ‘인형’도, 이상의 표상인 ‘천사’도 아닌, ‘인간’이기에 보일 수 있는 것이었다. 슈는 미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울상이기도 하면서 결의를 품은 것도 같은 오묘한 표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것이 또 마음의 가장자리부터 뜨뜻하게 데워가기 시작했다. 뿌듯함일까, 혹은 아련함일까. 생소한 감정들로 번민하면서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스승님이 내를 아껴줘서, 내한테 찬사를 해줘서 기뻤다. 내는 그런 말 들을 일 평생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계속 아팠다."

미카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떨리는 목소리 속에서도 감정만은 떨지 않고 곧게 담아내려 했다. 슈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미카의 말을 경청했다. 평소라면 미카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토를 달았을 그도 지금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미카의 머리며 어깨를 쓰다듬어주는 것 이외를 하지 않으며, 미카가 말하기를 기다려주었다.

"여기, 꾸욱꾸욱 해서 무서웠는데."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소리는 긴장한 것이었을까.

"스승님이 내한테 다정하게 대해줄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무서웠데이. 이대로 변해버린 스승님이 내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서. 멀리 가 버리는 건 아닌가 싶었구. 그래서 곁에 있어달라고 할 때, 스승님의 천사라고 해줬을 때, 진정으로 기회를 얻은 줄 알아서. 내한테 바라는 게 있어서 기뻤다. 그치만 내는… 결국 스승님의 소중한 물건을 망가뜨리기나 하니까, 분명 내한테 실망한 거라 믿었다."

역시 그 마음이었나. 슈는 미카가 도로 고쳐놓은 자신의 옛 곰인형에 눈길을 주었다. 안 그래도 꽤 낡아서 팔 한 쪽이 너덜거렸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손대지 않고 방치해뒀던 것을, 미카는 천까지 덧대 가면서 소중하게 소중하게 기워서 데려온 것이다. 무엇도 버리지 않으려는 천성이 그 행동을 부른 것이리라.

"그런 걸로 실망할 리가 없지 않느냐. 오히려 고맙다는 게야. 많이 낡아서 나조차도 손대기 조심스러웠던 것을, 너는 망가졌다고 해서 버리지 않고 소중히……."

하지만 카게히라 미카라는 인간을 깊이 안다면, 그 행동거지의 근원을 안다면, 단순히 ‘선함’으로 일축해버릴 것이 아님도 슈는 자각했다.

"스승님은 내 안 혼내나? 멋대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건, 아들도 얼라 때부터 나쁜 짓이라고 배운다 안 카나."

여전히 죄 지은 것처럼 울먹이는 미카를 보며, 슈는 어제 저녁에 아라시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떠올린다. 미카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해 주었던 찬사가 외려 독이 되었던 이유. 그것이야말로 기만이었던 이유. 상냥하게 대해주는 것까진 좋았다. 그것은 그녀 역시도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불안을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도 거치지 않은 채 무작정 아껴주어도, 묵은 감정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던진 말이 찬미하는 것은 마음을 담아두기만 하는 그의 겉면이었다는 것, 그 때 선고된 희망, 그리고 그 이면의 절망까지.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에는 아직까지 배울 것이 많았다.

"…조금 물어봐도 되나. 스승님은 내 어디가 천사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네가,"

나를 구원해준 존재이기 때문에. 곁에서 지탱해준 존재이기 때문에. 나의 예술세계에 새로운 불꽃을 피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말들이 스쳐지나갔다. 그것에 슈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외려, 아름답고 선한 객체로써 미카를 안주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고민이 무색하게 미카는 고개를 저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증명하는 것처럼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감싼 손에 더욱 힘을 주면서.

"내는 스승님의 천사는 되어줄 수 없데이. 그렇게 되려고 할 때마다 마음이 가만있지를 않는다. 내가 나쁜 아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기껏 스승님이 준 기회를 걷어차 버린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미안하데이. 평소라면 그렇게 끝나야 했을 예의 말이었다. 지금이라도 이 모든 이변을 사과와 함께 되돌려버릴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미카는 지금은 사과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다름 아닌 그의 가슴이 시킨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내는 스승님 곁에 있고 싶다. 떼써서라도 곁에 있을 기다."

그 예정조화를 깨뜨리고서, 미카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낸다. 성선설의 세계를 이루고 있던 흰 날개를 전설 속 오만한 인간처럼 제 손으로 태양빛에 그을리게 하며. 마음 없는 오브제도, 아름다운 천사상도 아니기에 깨지지 않는 따스한 몸뚱이로 지상에 자리를 잡으며.

"그러니까… 안아도. 내를 꼬옥 해도. 괜찮아질 때까지."

두 팔을 벌리면서 미카는 인간의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인형병원의 진단명은 그것을 이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대신에,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성장통에 적절한 포옹을 처방해줄 뿐이었다. 슈가 미카를 품에 안으면 미카는 기다렸다는 듯이 팔을 감아왔다. 그 작은 용기가 너무 소중했다.

"내게는 네가 소중한데, 어떻게 표현할 바를 몰랐구나."

이제 와서 하는 말. 슈는 여태까지 최고의 찬사란 아름다운 미사여구들의 계획적인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소중하다는 말만으로 충분했다. 아니, 그 말 이상의 군더더기는 미카의 마음의 겉면만을 스쳐지나갈 뿐일 시점이었으니.

"카게히라, 너는 인형도, 천사도 될 필요가 없어. 그저 너로 있어주렴. 내가 몰랐던, 여태껏 알려고조차 하지 않았던 너를 내게 알려다오. 내 말을 허가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다. 설령 실수하더라도 너무 책망하지 않아도 좋아. 인간은 시행착오로 자라는 법이니. 부디 네게 깨어나기 시작한 인간성을 부정하지 말아줘."

부디 그것이 늦지 않기를 바라며, 다시 한 번.

"내 사랑. 소중한 사람. 그렇게 부르는 편이 좋을까."

슈는 미카의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고서, 고개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그 말, 해줄 줄 몰랐다 아이가…"

맞춘 눈, 보색을 띤 보석 같은 두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좀처럼 제 앞에서는 울지 않던 아이가 드디어 마음을 터놓고 슬픔을 드러내보이는 것이, 괴롭지만 또 그만큼 사랑스러워서, 슈는 미카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그의 이마나 눈가에 몇 번이고 입맞춤을 해 주었다. 많이 울고 싶었을 테니까 눈물을 닦지는 않았다. 대신에 어깨를 빌려주는 것이 더욱 필요했을 터다. 미카는 하염없이 소리내어 울고 또 울었다. 마음을 비워낼 때까지 슈에게 기댄 채,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아팠다고, 미웠다고, 그렇지만 동시에 따스한 게 좋고, 너무 좋아해서 어쩔 줄 모른다고, 여러 감정들이 섞여 토해져나왔다.

얼만큼 울었을까, 마음속의 많은 것들을 비워내고 눈물로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 몇 번의 간헐적인 흐느낌 외에는 조용해졌을 때쯤, 미카는 고개를 들고 슈에게 물었다.

"저기, 스승님아."
"말해보거라."
"키스하고 싶어지는 것도 인간성이라 할 수 있나?"

그 질문에 슈는 무심코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카게히라다운 질문이구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다지도 사랑스러울 수가 있을까. 슈는 그제서야 미카의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아주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스승님?"

미카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곧 슈의 행동이 무언의 신호임을 깨닫고는 눈에 힘을 주고 슈의 어깨에 두 손을 탁 하고 얹었다.

"으응… 응아앗, 에라 모르겠다! 스승님, 내 스승님한테 키스할 기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힘을 실어서, 미카는 슈에게 매달리듯 키스를 했다. 실려오는 체중에 무심코 뒤로 넘어가버린 슈는 어느새 미카의 키스를 받아주면서 그의 등 뒤를 부드러운 손길로 더듬어내리고 있었다. 꼭 밀착한 채로, 조금 길게 입을 맞추며, 맞닿은 가슴의 고동이 서로 비슷한 박자를 연주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입술을 떼니 둘 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카게히라의 인간성은 꽤나 과감하구나."
"응아아, 스승님이 솔직해져도 된다고 해서 솔직하게 한 건데."
"그래, 그런 부분이 좋았던 것이다. 좀 더 일찍 깨달았어야 됐는데."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받아들이면서, 미카는 슈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뺨을 비볐다. 스승님 좋아, 하는 소리를 콧소리와 함께 연발하는 미카였다. 후련해진 마음속에 싹트기 시작한 연심이 부드러운 솜이 되어 가슴을 메워가고 있었다. 문득, 미카는 이런 식이라면 가끔은 인형이 되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단지 이번에는 스승님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존재를 선망하기 때문이 아니라, 애정을 갖고서 끌어안는 것을 좋아하고 끌어안기 좋은 존재로서. 그것이 미카의 솔직한 본심이었다.

"맞다, 스승님아, 이번에 새로 온 곰인형 씨한테 새 옷 만들어줬제?"
"잔업 중에 자투리 시간에 조금 만들어본 것이다. 마음에 드느냐?"
"응, 이걸로 인형씨가 새 가족이 된 거 같아서 좋다."
"이 집의 인형들은 전부 가족이니까."
"그럼 내는?"
"우선 졸업부터 하고, 내가 좀 더 견문을 넓혀오고 나면 법적으로 가족이 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 게야."
"응아아?!"

그 말에 미카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착 하고 조각이 맞춰지는 소리를 들었다. 슈가 운을 떼었던 새로운 집의 정체를 이제야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여과없이 제대로 확 마음에 꽂혀오는 진심들에 또 가슴이 뛰어왔다.

"스승님아, 내 또 가슴이 쿵쿵 한데이… 내 진찰해도."
"그럼 오늘은 시간을 들여서 너를 정비해줘야겠구나."

슈는 웃으면서 자세를 뒤집어 미카를 침대에 눕혔다. 셔츠만 입은 채인 미카의 옷자락이 어깨선을 타고 침대보 위로 흘러내렸다. 이대로 좀 더 끌어안고 심장소리를 들어달라면서 미카는 다시 청진기 손잡이를 제 가슴에 대었다. 슈는 잔잔하게 웃으면서 두어 번 미카에게 입을 맞추고는 그에 어울려주었다. 신화와 오브제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내려와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을, 새로이 가족이 된 크고 작은 곰인형들이 바라보며 축복해주고 있었다.



"스승님아, 아-앙 해봐래이."
"너무 단 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카게히라가 부탁한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카페테리아의 한 테이블, 케이크 두 접시, 그리고 한 쌍의 연인들. 분홍머리의 상급생과 한 살 연하의 검은머리 소년이 서로가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를 시킨 채로, 서로의 입에 포크로 케이크를 한 입씩 넣어주기 한창이었다.

"어쩜 정말, 청춘이네."
"정말 좋은 광경이야. 사랑은 곧 폭발! 폭발은 곧 예술이지! 와하하!"
"쟤넨 뭔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저러냐? 대낮부터 염장질이라니 완전 짜증나."

그 건너편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몇 명의 눈이 있었던 것은 기분 탓인 것으로 해 두자. 특히 이 이야기와 처음부터 연관이 없었지만 그저께부터 괜스레 귀가 간지러웠던 세나 이즈미는, 제 옆에 있는 아라시와 레오가 자기들만 아는 무언가처럼 그들을 훈훈하게 바라보는 게 영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제는 솔직해진 연인들의 앞길에 달리 나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답답하던 감정이 싹 씻겨 내려간 기분이었다.

"왜 그래. 이 누나는 연애상담은 거절하지 않아."
"사랑 이야기는 좋으니까. 왜, 세나도 아-앙 해줄까?"
"됐어. 보는 눈은 어쩔 거야? 쟤네야 뭐 신경 안 쓴다 쳐도. 그래도 보기 좀 덜 답답하긴 하네. 솔직히 말하자면."
"이즈미쨩도 좀만 더 솔직하면 더 매력적이었을 텐데. 아쉽다."

그렇게 한창 지켜보던 찰나, 문제의 그 테이블 쪽에서는 건너편의 관찰자들을 어느새 눈치챈 듯했다.

"아! 나루쨩이다! 츠키나가 선배도!"
"미, 미카쨩?"
"오, 슈랑 미카다. 웃츄-"
"너네가 계속 그쪽 보고 있으니까 들켰잖아."
"딱히 너희들이 여기에 있다는 걸 몰랐던 것은 아니다만?"

이즈미의 푸념에도 슈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까의 애정행각을 들킨 것에 한 치의 수치도 없이 대꾸했다.

"응후후, 츠키나가 선배, 전에는 고마웠데이."
"나도 나루카미에게는 고맙다고 말할 수밖에 없군."
"내가 모르는 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설명 좀 해 줄래?"

이즈미가 그렇게 물어도, 아라시도 레오도 그저 함구한 채 웃을 뿐이었다. 그 때 슈와 미카가 이즈미를 바라보더니, 웃으며 비장의 한마디를 던지는 것이 아닌가.

"전에 한 이야기의 반복이지만, 너도 소중한 건 잡으라고 해 두고 싶은 것이다. 꼭 붙잡되, 가두지는 말라는 게야."
"세나 선배도 언젠가는 솔직해질 수 있을 거라예. 뭔진 모르겠지만."
"자, 잠깐만? 너네가 왜 나한테 이러는데?"
"미카쨩 나이스! 이츠키 선배도 억만년만에 좋은 말 했다."
"와하하, 세나 정곡 찔렸네!"

여전히 요 녀석들은 영문을 모르겠다, 그것 이상으로 저 뻔뻔한 연인들의 의중을 모르겠다, 하고 혼자서 갈피를 잃은 이즈미였다. 그래도 잠깐이지만, 이 자리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보다 키도 작은 주제에 시끄럽기는 더럽게 시끄러운 옆자리 녀석의 옆얼굴을 보다가, 이즈미는 인간미, 문득 그 단어를 그 자리에서 곱씹어 보았다. 생소하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자리의 이 염치없는 커플도 인간미로 흘러넘치고 있는 걸 보니, 조금이지만 서로 동등하게 등을 맞대고 말로 마주하는 사랑법도 괜찮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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