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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 사탕통/팝핑 캔디

[슈미카] 안고 안으며

by 료밍 2019. 11. 22.

슈미카 동화 합작 'Beautiful Tragedy' 참가 글. 합작 링크는 이쪽입니다.
이래저래 감정의 리미터가 해제된 상태에서 쓴 글인데, 어떨지는...


*우울증 사고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점 유의해주세요.



소재 : 셸 실버스타인의 동시 <끌어안기 놀이 (Hug O'War)>
시집 <골목길이 끝나는 곳 (Where the Sidewalk Ends)> 수록




줄다리기 놀이는 안 할래요
끌어안기 놀이가 낫잖아요
잡아당기는 대신
끌어안아요.
함께 낄낄거리며
바닥에서 굴러요.
모두 뽀뽀하고
모두 방긋 웃고
모두 꼭 끌어안아요.
모두 다 이긴 거예요.
 - 셸 실버스타인 <끌어안기 놀이>


"끌어안기 놀이, 안 할래?"

그 날은 왠지 시야가 허열 정도로 현기증이 일었다. 저주스러울 정도로 무너져, 제일 고운 노랫소리조차도 소음이고 방 밖 모든 풍경이 날카로운 위협 같던 그 시절도 이젠 먼 옛날같이 아득해졌는데. 그 어둠을 등지고 나서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다가도, 잠깐 허한 마음을 비집고 엄습해오는 감각이 있었다. 새하얀 솜이불을 몇 번이고 빨래해 개어 놓아도, 그 한 구석에는 회색 먹구름이 자리잡아 얼룩을 남겨 놓듯이.

머리를 비웠다간 우울의 물결이 그대로 빈자리에 차오를 것 같아서, 거기에 익사하지 않기 위해 그는 작업용 의자에 앉아 천과 바늘을 들었다. 질서정연하게 천이 짜인 틈새로 색색의 실을 찔러넣어 수놓고 있으면, 조금이나마 안정되곤 했으니까. 그러나 오늘은 그것도 잘 안 되었다. 어질어질하게 휘청대는 자신의 초상처럼, 붉은 실이 바늘구멍을 비껴갔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이대로 가라앉아 버릴 것만 같은데, 자신을 지탱할 생명줄을 엮는 것조차 잘 할 수 없었다.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그것조차 할 수 없으면, 자신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있어야 하는가?

여전히 눈앞이 흐늘거렸다. 이제는 다 괜찮아질 때였다. 자신을 사로잡아오던 악몽은, 그 근원이던 숙적에게 그대로 돌려주었다. 더 이상 과거의 망령은 제 그림자에 눌어붙어있지 않았다. 새로운 영감이 샘솟아, 전보다도 찬란한 세계를 만들어왔다. 오랜만에 느끼는 다 잘 될 것 같은 감각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는 이제 짊어지고 싶은 소중한 이가 있었다. 여기서 쭉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가면, 자신이 그르치지 않는다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다 잘 될 것처럼 갠 하늘에, 방해하는 소리 하나 없이, 얼룩 하나 없는 섬유유연제의 향에 둘러싸인 더없이 안락한 작업실에서, 자신만이 흐트러진 채 불순물로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속에서 뭐가 불안할 게 있다고. 신을 지게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이 결벽한 공간에서, 왜 자신은 질식할 것만 같이 제 몸을 부둥켜안고 떨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듯 물어봐도 숨만 더 막힐 뿐, 마땅한 대답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뭘 잘했다고.
꾸짖는 목소리가 숨으로 화해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잘해오는 것은,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완벽이라는 개념이 허상인 것은, 이미 그 때의 실수로 배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으로서, 자신이 나아질 것을 담보하기 때문에 허락된 불완전성이 아니었던가. 사랑하는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용서할 수 없는 과거의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를 악물고 나아가야 하지 않았는가. 지금의 자신은 전혀 잘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쉬이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에, 자신은 지고 있지 않은가.

패배자로 남는 것은 싫었다. 살아남지 못하는 것은 싫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가라앉아가는 것밖에 없는데. 세상을 직조해보이겠다면서 실 하나 꿰지 못하고, 무엇 하나 만들어내지 못하는 자신을 이제 와서 어디에 써야 한단 말인가.


이츠키 슈라는 인간은 지지 않기 위해 살아왔다.
많은 위협이 있었다. 그렇게 큰 위협은 아니고, 그저 그가 유년시절부터 유독 유약했기 때문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가 좀 더 작았을 시절에 그의 머리에 성악설을 아로새길 정도로 그에게 낱말 모양의 흉터를 남겨왔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품었던 무르고도 따스했던 이상들을 굳이 말로 풀어 설명하기를 단념했다. 자신을 걸어다니는 겨냥표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많은 것을 시도하며 살아남아왔다. 무대라는 수단을 손에 넣은 이래로, 그는 신도 되어보고 인간도 되어보고, 폭군도 되어봤고 초인도 되어보았다. 그 거대한 시행착오들이 차근차근 쌓여가면서, 그는 정말로 지지 않고 버틸 정도로 견고한 인간이 되어가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실수에서 배우는 것만큼은 빨랐고, 두 번 지지 않는 자라는 점은 그의 특기고 자랑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꿈을 품은 아이, 카게히라 미카를 만났고, 그 아이를 사랑하는 법 또한 배웠다. 자신의 일부와도 같이 아끼는 사람의, 두 색의 하늘같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슈는 자신에게 이제 지탱해야 할 것이 늘었음을 체감했다.
내가 무너지지 말아야 할 이유는, 내가 살기 위해서이면서, 나를 살게 하는 너를 살리기 위해서.
그것을 간직하는 이상,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자명했다.


바늘에 실 끼우기라는 지극히 간단한 행동을 몇 번이고 실패하다가, 마치 주사위 놀이의 1이라도 나온 듯한 불운이 날카롭게 슈의 손가락을 찔렀다. 힘이 들어갔다 빠졌다 하는 손은 헛손질이라도 꽤 깊게 찔렀는지, 핏방울이 금세 맺혀 손마디를 타고 내려갔다. 어서 약이라도 바르고 작업을 재개하자. 그 생각으로 의자를 밀고 구급상자가 있는 거실로 향하려 했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상이 유난히 느려 보였고, 자신을 짓누르는 감각도 점점 거세졌다. 우주 저편에는 지구보다도 훨씬 중력이 거센 행성들이 있었고, 지금은 그곳이야말로 지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슈는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슈가 머리와 벽을 짚으면서 간신히 한 걸음, 한 걸음 떼어서 문 바로 앞까지 도달하면, 눈앞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스승님아, 슬슬 간식 안 물래?"

따스하고 조금 앳된 목소리가 이 지경이 되어서도 자신을 반기는 것이 지금은 유난히 거슬렸다. 이때 자신은 무엇을 했던가. 평소대로 간식을 너무 먹지 말라고 잔소리라도 했을까? 아니면 내키는 듯 안 내키는 듯 옅은 웃음을 지으며 그저 미카가 좋아하는 과자와 자신이 좋아하는 차를 내 오면 좋을까?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며 자세를 고치고 문고리를 잡으면, 흐르다 만 피의 끈적임이 불쾌하게 슈의 손에 느껴졌다.

"응아아, 스승님아, 바쁘나?"

차라리 미카가 자신의 방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열지 못하도록 잠가 버릴까, 하는 생각도 슈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밀려오는 짜증과 답답함을 그대로 쏟아버릴 지도 모른다. 그것은 지금 와선 위기감이었다. 이미 미카를 옛날에 고생시킬 대로 고생시켰다. 이 이상 신세지는 것도 염치가 없는 짓이다. 적어도 지금은 내버려 두라고 하고 싶었지만, 미카가 그렇게 좋아하는 간식 시간에 어울려주면서 제 머리에도 당분이 좀 돌기 시작하면 이런 현기증쯤은 나아질 것이다. 그 생각에 슈는 문고리를 돌렸다. 문을 여는 데에도 힘을 쥐어짜내야 하는 것이 서러웠지만, 최대한 아무 표정도 짓지 않으며.

"내 알바 다녀오는 길에, 스승님이 좋아하는 크루아상이랑, 또 딸기맛 크림빵두 사왔는데... 응아아? 스승님, 마이 피곤하나?"
"별로 피곤하진 않은 것이다. 잠시 작업이 안 풀리던 참이었는데, 당분이 부족했던 것 같으니 때마침 좋은 타이밍이군."

한숨조차 쉬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슈가 말하면, 미카는 곧바로 웃으며 빵 봉투를 건네왔다. 그러나 그는 이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응아앗, 스승님아? 우야꼬, 손에 피가 이래 마이 나는데!"

하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픔에는 그렇게 둔감한 주제에 남의 아픔은 바로바로 눈치채는, 그 몸에 밴 배려에는 고마워해야 하는데. 그럼에도 치밀어 올라오는 씁쓸함이 입안에 고였다.

"일루 온나. 내가 약 발라 주까?"
"됐다. 네 눈엔 내가 약 하나도 혼자 못 바를 정도로 미덥지 못해 보이는 게냐?"
"그치만 스승님, 마이 피곤해 보인다 아이가... 바늘에 찔렸는데도 계속 놔 두구, 이카면 덧난데이. 자, 빨리..."

여기에서 슬슬 언성을 높이면, 미카는 아쉬운 표정을 잔뜩 짓고는 꼬리를 내리고 돌아가겠지. 하지만 슈는 이젠 마땅히 아껴줘야 할 미카에게 그렇게도 할 수 없었다. 적당히 손가락 상처만 수습하고 방으로 돌아가면 되겠지만, 피곤해 보인다고까지 굳이 말을 하는 이상 이미 빠져나갈 구멍도 없는 셈이다. 여기서 더 뭔가 실랑이를 벌이기도 지쳤는지, 슈는 그저 바늘에 찔리지 않은 손에 빵 봉투를 챙겨들고 미카의 손에 이끌려 방문을 나갔다. 가끔 미카도 슈에게 메인터넌스를 해주고 싶다고 얘기했으니, 한번쯤 소꿉놀이 기분으로 상처 치료 정도는 하게 놔둬도 될 터였다.

미카는 꽤 말끔하게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손가락에 감아주었다. 어릴 때 고향에서 어린 아이들을 이런 식으로 치료해준 적이 있다고 했다. 이럴 때만 보면 미카는 정말로 사람 돌보는 데 일가견이 있는 것 같았다. 밴드를 붙이고 나서도 미카는 어지간히 걱정이 되는지, 슈의 손을 쭉 매만지면서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뭘 그리 빤히 쳐다보냐는 게야."
"그냥... 별 건 아이고, 스승님, 피곤해보이니까."
"네 스스로의 피로감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서, 내가 피곤해 보인다고 잘도 말하는군."
"그기, 그런 게 있다. 내는... 안다."

무엇이 피곤하단 말인가. 별로 피곤할 일도 없었다. 잔업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하루종일 연습을 하거나 공연을 뛴 것도 아니다. 그냥 오늘따라 뭐가 이상하게 안 풀렸고, 심심풀이 삼을 바느질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서 손가락 좀 찔린 게 전부다. 고작 그걸 가지고, 미카는 왜 그렇게 자신을 슬픈, 그러나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그 눈이 마치 자신 어딘가의 무른 부분을 꿰뚫어보는 듯해서. 슈는 미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 와중에도 미카는 빵 봉투를 뜯어서 크루아상을 슈에게 건넸다. 슈가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조금씩 크루아상을 뜯어먹고 있으면, 미카는 제 몫일 딸기 크림빵을 한 입 베어먹고 멈추고를 반복했다. 그 멈춘 시간은 고스란히 슈를 지켜보는 데 쓰였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모양이군."
"그, 그기..."

빵 조각을 삼키고도 우물거리는 입술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헤맸다. 이대로는 어지간히도 고집 센 제 파트너가 물러나지 않을 것을 미카는 알았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마침내 미카가 건넨 말은,

"있제, 스승님아, 따뜻하게 하고 같이 잘래?"

뜻밖의 것이었다.

"무, 무슨 소리인 게냐, 갑자기."
"내도 쪼매... 스승님이 해줬으면 하는 게 있데이."

부탁의 형태를 하고서, 미카는 슈에게 필요한 이야기들을 천천히 고르기 시작했다. 그 은근한 배려는 그래도 슈에게 와닿았는지,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먼저 침실로 향했다. 왠지 아까의 축축 처지는 걸음보다는 조금 홀가분해진 걸음으로.


이것은 낱말 퍼즐과도 같았다. 빈 칸에 단어를 집어넣는 흔한 놀이. 지금 그는 자신의 마음을 맴도는 문장에 적합한 단어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단어의 주변부를 맴돌면서 그것 이외의 가능성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낱말 퍼즐은 알맞은 단어를 빈 칸에 채우면 이기는 게임이다. 그 단어가 막 자리잡은 곳은 오랫동안 공란이었고, 거기에 적절한 단어가 들어가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그는 자신이 패배할 것임을 감으로 알았다. 그는 한번 이런 형태의 게임에서 패배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패인은 바로 카게히라 미카라는 존재였다.

그를 사랑한다고 제대로 부르게 될 수 있었을 때, 그는 결국 자신의 무른 면을 하나 더 내어주는 셈이 되었다. 언제 자신을 패배로 돌릴지 모르는, 요동치는 불안정과 미완성의 감정이었다. 동시에 그 감정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더더욱 체감하게 만들었다. 이 마음을 두 손에 꼭 쥐는 이상, 자신은 정말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실패하지 않게 하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었음을 배웠으나,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더더욱 패배하지 말아야 했다. 실패해도 모두 잃지 않도록. 반드시, 반드시 그 실패를 양식삼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카게히라 미카에게 지고 싶지 않고, 카게히라 미카를 위협하는 어떤 것에도 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살게 하는 그 아이를 위해서. 자신을 지탱해준 그 아이를 위해서. 두 배로 사랑하고, 두 사람 몫을 살아남자. 그것이 그가 돌려줄 수 있는 것이라 믿었다.


"스승님아, 내 책 읽어도."

미카는 어느새 실내복으로 갈아입고서, 챙겨온 책 한 권을 슈에게 건넸다. 슈는 미카가 잠깐 제 물건들을 가지러 간 동안, 수마와도 다르고 피로와도 또 다른 감각에 습격당했다. 침대보의 푹신함은 외려 자신을 집어삼켜가는 무력감의 요람이 되어갔다. 때맞춰 미카가 책을 들고 왔기 때문에, 그나마 머리에 집어넣을 것이 생긴 건 위안이었다.

미카가 들고 온 책은, 어느 동화작가의 동시집이었다. ‘골목길이 끝나는 곳’ 이라는 제목과 함께, 낙서와 같은 흑백의 선화가 그려져 있었다. 미카는 때때로 슈가 이런 식으로 제게 책을 읽어주는 것을 좋아했고, 특히 ‘메인터넌스’라는 이름하에 슈에게 몸과 마음의 정비를 받을 때면 협탁 위에 읽어줬으면 하는 책을 올려놓곤 했었다. 갖가지 문장들을 미카에게 조곤조곤 읽어주고 있으면, 읽고 있는 슈도, 듣는 미카도 마음이 따뜻한 것으로 가득차 잘 잘 수 있었다.

"특별히 읽어주었으면 하는 시가 있었나?"
"으음, 좋은 시가 많은데, 스승님 취향은 아닐지두..."
"네게는 네 안목이 있고, 그걸 살펴보는 것도 내 새로운 즐거움이니까,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것으로 골라 보거라."

그렇게 말하는 슈의 말씨에는, 피로감 끝에 어느새 약간의 안도감과 온기가 걸려 있었다. 미카는 잠시 책을 펴 페이지를 뒤지다가 마음에 드는 시를 찾아, 슈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어디 보자, ‘끌어안기 놀이’라..."

슈는 천천히 시를 눈으로 훑고는, 목을 가다듬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를 읽어내려갔다.

"줄다리기 놀이는 안 할래요. 끌어안기 놀이가 낫잖아요. 잡아당기는 대신 끌어안아요. 함께 낄낄거리며 바닥에서 굴러요. 모두 뽀뽀하고, 모두 방긋 웃고, 모두 꼭 끌어안아요. 모두..."

어렵지 않고 따뜻한 문장으로 가득한 심상이 가슴을 따뜻하게 달궈왔다. 자신이 이런 분위기의 동시를 읽는 것은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처음엔 조금 내키지 않았으나 – 그것이 정말로 내키지 않는 이유였는지는 차치하더라도 - , 첫 어절을 입에 담아보면 술술 소리내 읽을 수 있었다. 간지러운 단어들이 말소리를 타고, 부드러운 천처럼 엮여 마음 위에 하나씩 내려앉았다. 잔잔하게 웃으면서 그것을 듣는 미카를 보면, 아직까지는 자신의 존재의의가 바래지 않았음에 안도한다.

"모두..."

그러나, 마지막 문장에서 다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 빠져나오지 않았다. 토해내지 않으면 그대로 목을 막아버릴 여태까지의 부담들이 메스꺼울 정도로 속을 메웠다. 그럼에도 여유를 가지고서, 시를 다 낭독할 때까지 미카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더 해보라고 독촉하는 말도, 잘 할 수 있다고 응원하는 말도 없이, 그저 얌전히 귀를 기울였다.

그 사이에 얼마만큼의 정적이 흘렀을까.

"모두 이긴 거예요."

마침내 마지막 문장을 말할 수 있었을 때쯤,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로 안심했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만면에 드리우고서, 미카가 슈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응. 그런 기다."

줄다리기 놀이. 원문은 아마 운을 맞춘 말장난이었을 터다. 팽팽하게 힘을 겨루고, 패배자는 승자의 방향으로 질질 끌려가거나, 줄을 놓고 낙오되어버리는 놀이. 원래도 별로 몸을 움직이는 놀이가 취향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운동회나 체육대회에서 유독 그 광경은 슈에게 모종의 강박감을 가져왔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은, 제게 주어진 고난들에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 저런 식으로 줄을 당겨오는 사람으로 있어왔던 적도 있었지. 인형사라는 것도 결국은 줄을 당기는 사람이다. 패배의 반대항이 항상 만족스런 승리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줄다리기의 끝에 승자의 손에 남는 것은 밧줄에 쓸린 자국이다. 자신마저도 당겨지는 줄처럼 팽팽하게 압박하고 몰아세우고서 남은 것은, 결국 슈 자신조차도 만족하지 못하는 상처뿐이었다.
그 끝에는 패배하지 않은 자와, 패배자, 그리고 패배자가 될 자만이 남은.

그리고 그 패배에 일조한 것은, 수많은 패배자들의 시체의 산을 만든 것은, 결국 살기 위해서 발버둥 쳤던 자신이었는데. 그런 자신이, 모두가 이기는 상냥하디 상냥한 포옹의 세계에 포용되어도 되는 것인가.
지지 않는 것은 자신의 생존. 동시에 하루하루 미뤄지는 승리를 허락받지 않은 채 치열하게 내일을 향하는 것은 자신의 속죄.
그런데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쉬어도 된다고 말하는 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스승님아."
"카게히라, 너는, 내게서 기어코 지지 않으려는 의지마저 박탈하려 하는구나."
"스승님은 애초에, 진 적이 없으니까."

그 말에 피어오르는 것은 울분. 울분이었다. 마음 속에서 꼭 줄로 매어뒀던 감정들이, 하나하나 단어를 찾기 시작한다.

"그것은 내가 네게 여태까지 완벽한 ‘신’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런 것이었겠지. 지금의 나도 네게는 그렇게 보이는가? 아무런 방해물도 잡음도 없는 환경 속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흐트러져서, 어린 아이들의 시집을 읽는 것조차 끝마치지 못하는 내가, 그 모든 것들을 이룩하고도, 과거의 망령도 악몽도 떨쳐내고도 같은 우울감에 습격당해 번민하는 내가, 네게는 지금도..."

그 무언가를 가리키는 단어는 우울이었다. 피조물을 만들고 보살펴야 하는 신에게도, 단죄당해 이유불문 처단당해야 할 폭군에게도, 발목잡히는 것 없이 나아가야 할 초인에게도 불필요한 감정이었다.

"애초에, 그런 게 아이다. 내는 그저 스승님이, 좀 더 자신을 안아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기다. 스승님도 결국은 ‘사람’으로서 아플 때가 있잖나. 물론 내한테는 윽수로 대단한 사람이지만, 그만큼 쉬어 도? 버틸 수 없어서 쉬어간다고, 지는 게 아인 기라."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역시 너는 나를 끌어내리는 방법을 잘 알고 있어. 너를 내 자신의 일부처럼 여기게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이츠키 슈 자신을 ‘사람’으로서 자각하게 만든 태초의 감정 역시 사랑이었다. 자신의 패인이자, 점점 자신을 무르게 만들었던 원초의 존재, 카게히라 미카. 조금씩 맞춰져가는 단어 맞추기 퍼즐이 향하는 것은, 패배도 패배의 반대항도 아닌 무언가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에 스스로를 내맡기기에는, 솔직히 말해서 그는 두려웠다.

"스승님, 들어도. 그리고, 마음껏 슬퍼하고, 괴롭다고 말해 도. 그러고 나서, 끌어안는 기다. 혼자서 끌어안는 게 힘들면 같이 끌어안으면 된다. 스승님이 내를 안아줬듯이, 내도 스승님을 끌어안아주고 싶다. 물론 스승님이 끌어안아줘도 되구. 그렇게 서로서로 껴안고, 서로서로 괜찮아지면 된다. 아무도 안 져도 되구, 아무도 안 질라꼬 필사적이지 않아도 된다. 마지막에는 그렇게 괜찮아지고, 그 괜찮아진 게... 우리가 살아있단 증거 아이가."

그 말을 조금 더 일찍 들었다면.

"약해져도 된다. 슬퍼해도 된다. 그럴 때 스승님은 내를 항상 멘테 해 줬다 아이가. 내한테도 그렇게 의지해 도. 내가 스승님의 일부 같다면, 내를 안아 줬으면 한데이. 그렇게라도 스승님 스스로를, 내게 준 몫까지 안아 도. 그리고 내도 스승님을 끌어안게 해 도."

눈앞에는 어느새 몸을 일으켜, 두 팔을 벌리고 저를 기다리는 미카가 있었다. 울지 못했던 슈의 몫까지 눈물을 흘리면서.

"스승님, 끌어안기 놀이 할래?"

조금만 더 일찍 그 말을 들었다면, 이 지경이 되지도 않았을 텐데.
그것이 슈의 마음 한 구석에서 회한으로 일다가, 이내 스러져내린다. 공들여 쌓아올린 조밀한 강박의 탑이, 조각조각 무너져내려, 포옹이라는 이름의 부드러운 완충재에 감싸인다. 어느새 슈는 미카를 끌어안고 있었다. 마치 쓰러지듯이 자신보다 작은 미카의 품에 안기는 순간, 갑작스레 나기 시작한 힘으로 그를 부여잡았던 것이다.
다행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보랏빛의 슬픔이 투명하게 방울져, 뺨을 타고 흘렀다.


"스승님, 오늘도 끌어안기 놀이 하재이!"

어김없이 찾아온 밤, 미카가 천진난만하게 슈의 품에 달려들어 안겨왔다. 그 날 이후로 새로이 생긴, 둘만의 새로운 의식이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뛰면 넘어지지 않느냐." 여느때의 잔소리 기색 가득한 말투지만, 미카를 받아주는 슈의 행동은 견고하게 실리는 무게를 지탱했고, 미카를 가두는 품의 온기는 부드럽기만 하다.
"응후후, 스승님이 마이 멘테 해줬으니까, 스승님도 내 기운 받아가래이. 이런 걸 간접멘테라 카나?"
"간접이라고 해도 이렇게 직접 너와 내가 껴안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간접이 아니지 않느냐."
"응아아, 스승님아, 그런 치사한 말 하면 내 가슴이 터져뿐다! 내, 스승님 앞에서 인간이 된지도 얼마 안 됐는데, 연약한 인간 심장에 자비를 좀 베풀어 도?!"
"참으로 귀여운 소리를 하는구나, 카게히라. 그런 점이 좋지만 말이다. 적당히 껴안기 좋을 정도로."

여유만만한 목소리로 슈가 미카를 붙들고 머리를 쓰다듬고 있으면, 미카는 얼굴이 확 붉어져서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시작한 것이고 싫지 않은, 오히려 너무 좋은 것이긴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무르다 못해 말랑말랑해질 것 같은 미카였다.

"스승님 이런 데선 자꾸 내 이겨먹을라 칸데이?"
"어차피 이 놀이는 모두가 승자 아니겠느냐."
"그, 그체... 응앗?!"

낮게 웃으면서, 슈는 미카를 그대로 들어서 침대 위에 살포시 올려놓는다. 갑자기 등이 푹신해져서 무방비해진 미카를 그대로 끌어안으면 꼼지락거리며 저항하길래, 몇 번 그대로 버드키스를 퍼부어줬더니 제 품에 착 달라붙는 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속 시원할 정도로 웃고, 서로 입맞춤을 나누고, 웃고, 끌어안고.
패배할 필요도,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 상처입을 필요도 없는, 모두가 승자인 세계를, 기어코 만들어나갈 수 있었던 두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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