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2018년 7월 15일 개최된 제3회 어나더 스테이지에서 발매한 슈미카 소설 회지 'Candy Drawers' 수록 단편의 웹공개 버전입니다.
Prologue - Storage in the room
"네게 손대도 되겠느냐?"
이츠키 슈는 언젠가는 물어봐야 할 것을 오늘도 물었다.
무릎 위에 걸쳐진 카게히라 미카의 상체 위로 살며시 뻗은 손이 멈춘다. 그의 무릎 위를 점유하며 소파 위로 엎드려 얼마 전에 구입한 음반에 딸려온 그림책을 읽던 몸이 고개를 돌린다. 그 아이는 의아해했다. 제 관리자 되는 사람이 왜 한낱 관리를 받는 인형 – 아직까지는 그렇게 머무르고 싶었다 – 에 불과한 자신의 허가를 구하고 있을까. 여태까지 슈의 손은 어디 안 닿은 곳이 없을 정도로 미카를 손대왔었다. 메인터넌스, 유지보수. 그 이름하에 미카를 조율하는 손에는 악의도 부정도 탐욕도 없었으나, 애정이라 부를 수 있는 온기 역시 담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무감정이 당연한 것인 동시에 그 나름대로의 베풂이었던 것, 그리고 그 전제를 뼛속까지 새기고도 마냥 좋기만 했다. 그러므로 미카에게는 거절이라는 개념부터가 애초에 없었다. 모름지기 미카의 것은 슈의 것이고 그 전제 아래에서 미카는 그의 다른 모든 것들과 동등한 입장을 지녔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했기에 미카는 저를 관리하는 손길을 자신이 입는 은혜처럼 받았다. 그 물음은 이상했다. 메인터넌스 시간에는 이상이 있으면 바로 말하도록 지시받았으므로, 미카는 그렇게 했다.
"그런 거, 안 물어봐도 된데이?"
밀려올라가 허리 살을 드러낸 셔츠를 내릴 생각조차 않고 미카는 슈의 말에 자르듯 대답했다. 절대적인 허가. 늘 그것이 편리하기만 했던 관리자는 오늘따라 그 말에 더욱 심하게 동요했다. 당연한 대답이 떨어지자 허공에서 멈춘 손도, 그리고 그의 심장도 덩달아 떨어졌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위계의 고착화를 멈추기엔 너무 늦어버렸을까? 슈는 언제까지나 미카의 관리자로 있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시끄럽고 제멋대로 – 그런 것 치고 미카의 제멋대로란 단 한번도 자기 자신을 위한 적이 없었지만 – 라고 여겼던 미카는 이미 마음만은 순종의 극치였다. 물론 거기까지 그를 굽혀 누른 건, 지금은 자처하기조차 고민되는 인형사의 이름을 빌었던 슈 자신이다. 제가 원했기에 그 아이가 체화한 당연한 무방비가, 그렇다면 왜 이제 와서 새삼 마음 끝을 콕콕 찌르는 것인가. 고개를 뒤로 돌려 저를 보는 짝이 맞지 않는 두 눈에 그 답이 반사되어 보였다.
이유는 나다. 답은 그랬다.
부정밖에 입에 내지 않던 관리자에게 긍정만을 말하도록 학습된 인형은 바로 원래 자세로 돌아가지 않았다.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빤히 바라보는 보랏빛 시선이, 전하고 싶었을 수십 개의 말을 대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을 잘 못해서 그렇지, 상냥하니까. 그런 피상적 이해를 제 생각에 덮어씌우며 슈의 곁에 있어온 미카였다.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상냥해지고 싶었으니까. 너무 늦기 전에.
그것이 애정이라는 암묵적 동의는 서로 간에 이미 있었다. 단지 왜 그런가를 생각하기엔 상처입고 상처 입히는 사이로 지내온 시간들이 너무 깊이 패여 있었다. 잠깐이라도 눈이 마주치면 따뜻하게 데워지는 가슴의 온도를 알았다. 그것을 주제넘다고 생각해도 놓아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는데. 슈는 미카의 옷자락 사이로 훤히 드러난 피부를 애써 보지 않으려 하며, 그의 등을 평소 두르던 안심담요로 덮어주었다. 때마침 팔걸이에 잘 걸려 있었다. 냉방이 너무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아, 춥나?"
허리께에 부드러운 극세사의 감촉이 덮이자 미카가 묻는다. 추위를 피해 이불을 덮은 건 자기 몸인데 남 걱정부터 하는 성품이었다. 제 것을 한 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미카는, 제 몸 하나 돌보지 못하면서 남의 사정만큼은 훤히 들여다봤다. 자수가 놓인 실내복 반바지 아래로 까딱까딱 움직이는 다리는 맨살이었다. 그것을 보고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조차도 슈는 갑갑하게 여겼다. 언제나처럼 작품을 보듯이, 어떠한 욕망도 정도 없는 눈으로 그를 물화하면 될 노릇이었다. 애초에 미카가 상대인 이상 그것은 불가능했지만. 요는 시선의 불순함보다는 자격의 문제 되겠다. 예술가 실격? 인형사 실격?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면에서 그는 실격이었다.
"네가 너무 춥다면 냉방을 끄겠다."
"스승님 역시 추위 많이 타는구마. 응. 알았데이. 끄고 오까?"
놀라울 정도로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태도였다. 주어를 명확히 ‘너’로 하고 말했음에도. 그해 4월, 미카와 새 시작을 다짐했던 어느 날, 슈는 미카를 데리고 그를 지킬 채비를 하러 돌아다녔다. 제 몸을 지킬 호신술, 아르바이트 중에 속지 않는 방법 등, 결코 사리에 어둡지는 않으나 제 위험에만은 하나같이 둔감한 미카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도록, 되는대로 접하게 하고 가르쳐보려 했다. 그 때마다 미카는 예상치 못한 때에 그만두자고 말했다. 그것은 때론 슈의 말실수에서 기인하는 것이었지만 미카는 좀처럼 그 때문이라고 말하지 못했고, 힘들어 보이는 건 자신이었음에도 그것을 이유로는 불평 하나 않았다. 단지, 스승님이 불편할까봐. 아무도 스승님을 몰라주니까.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라도, 그런 핑계를 대서까지 본심을 억누르는 꼴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비극이었다. 꼴사납고 비굴하다. 그렇게 일축해버렸지만, 나중에 미카가 한 세 번은 쓰러지는 것을 보고 나니 슈의 머릿속에서 비상사태가 울렸다.
나를 위해 너는 어디까지 공간을 만들어주고 있지?
고뇌하면, 그의 무릎 위를 누르는 무게가 사라졌다. 스르륵 하고 안심담요만이 그 자리에 어중간하게 걸쳐져 있을 뿐이었다. 띵, 하고 에어컨의 버튼을 눌러 기동을 정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끈 것뿐이고 냉기가 사라지기까진 시간이 걸렸지만 벌써부터 목이 막힐 것처럼 더웠다. 순식간에 후덥지근해지는 것이 여름 공기라지만, 더워 죽기 전에 무수히 많은 죄의 탁류에 질식할 것 같았다.
나는 ‘사랑할 수 있는 자’로서 실격이구나.
제 옆으로 돌아온 미카가 변함없이 다정하게 웃어서,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는 침전하는 길밖에 없었기에.
의심 하나 없던 오만한 관리자는 내일도 같은 질문을 묻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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