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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 사탕통/팝핑 캔디

[미카+마코토] 별들의 방향, 별들의 방황 - 1편

by 료밍 2021. 8. 6.

미카+마코토 논커플링. 네버랜드의 미카의 이야기와 도원향의 마코토의 이야기를 나름의 관점에서 맞물리게 해 보려고 한 무언가. 

쓰기 시작한 지는 한참 된 것입니다만, 언제 완성될지 모르겠지만 분량조절 실패할 것 같고, 너무 묵혀두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차라리 편수 연재로 전환하면 어떨까 하고 일단 올려봅니다. 뒷이야기는 차근차근 쓰지 않을까 (무책임)





어차피 닿지 않을 노래. 어차피 닿지 않을 이야기.
그럼에도 계속해야 할 이유는 있을까? 몇 번인지 셀 수도 없는 되물음.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이 잡동사니가 쌓여가는 혼잡한 방 안에서, 아무것도 되지 못한 심상의 더미도 그 공간을 점유해 간다.
그래. 어차피 실패작의 파생물은 실패작뿐이다.
그럼에도 왜. 왜 포기할 수 없는 것인가. 심장 안에만큼은 아직 별의 조각이 남아있는 것만 같은 이유는.


소년에게는 긴 꿈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비로소 인지하기 전부터 심장 속에 심겨 있던 별의 씨앗이었다. 질량을 얻어 형체를 갖추기 전부터, 그는 빛의 덩어리가 되어 꿈속을 유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은 아기별이었고, 먼지를 불사르며 날개를 갓 펼친 새끼 불사조였다.

소년의 고향은 별나라였다. 크고 작은, 각기 다른 빛의 집합이 저마다의 찬란함을 뽐내며 공존하는 무한한 천구 그 위. 귀천도 우열도 없이, 모두 다 예쁜 별들인 그곳. 같은 하늘에만 있으면 모두가 가족인 곳. 인간은 그 별들을 이어 별자리를 만들었지만, 그들조차 다른 것을 보며 이야기를 자아내지 않았던가. 별나라의 소년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좋았다. 그것은 먼 별이 전해준 노랫말을 타고 날아와 소년의 꿈에 빛과 물을 주었다. 소년은 그리하여 이야기꾼이 되었다.

별나라에서 온 이야기꾼은 마치 아이들에게 점선 잇기 놀이가 인쇄된 종이를 나눠주듯, 별의 이야기를 전하려 했다. 천천히 별을 따라가다 보면 수많은 이야기들이 저절로 그려질 터였다. 설령 잇는 순서는 다르더라도, 별이 전하는 이야기는 별의 수만큼 있으니까, 별을 이어 만드는 이야기는 별의 수보다도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꾼은, 별의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닿지 않음을 알았다.

지구라는 땅에 붙박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별의 거리와 별빛이 도달하는 시간은 다른 개념이었다. 그것은 차이가 아니라 차별로 이어졌다. 더 잘 보이는 별, 더 반짝이는 별. 그것만이 인간에게 유의미한 것이 되었다. 지구가 돌면 보이는 별들조차 달라졌고, 그 흐름 속에서 어떤 별들은 인간의 눈길을 끌지조차 못하고 하늘 너머로 훌쩍 흘러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지구가 도는 그 중심에는 태양이라는 거대한 별이 있었다. 지구인들의 눈에 태양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눈부시게 빛났기 때문에, 해가 뜨지 않는 밤에만 인간들은 꼭꼭 숨은 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결국 태양도, 지구 가까이에 있는 별일 뿐이었는데, 인간이 그 위에 사는 지구도, 그저 생명이 산다는 개성을 지닌 별일 뿐이었는데. 그들이 사는 곳조차 별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인간들에게, 언제부터인가 별은 일등성이니 겉보기 등급이니 하는 이름들로 구분되어, 얼마나 빛나는 지만으로 판단되고 있었다. 밝게 빛나는 것만이 모두의 척도가 되고 말았다. 그 기준이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스러지게 하였다.
별에서 온 이야기꾼도 그렇게 스러져 갈 뻔 했던 것이다. 그림자를 본딴 그의 이름처럼.


눈을 뜨면 다시, 이불보다도 두텁게 제 위로 내린 어둠 속이었다. 카게히라 미카에게는 잘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어둠에 먹힌 먹 같은 머리칼이 축축한 베개 위로 퍼졌다. 먹이 천에 스미듯, 땀이 스민 베개는 악몽이라도 꿨던 것처럼 목을 답답하게 덮었다. 뭔가 그럴싸한 영감이라도 찾아왔을까, 하고 이야기꾼이었던 소년은 꿈자리를 되짚어보았다. 잡힐 듯 말 듯한 상념의 타래들이 손끝에 실처럼 어른거리다, 이내 기화해 미카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생각해야만 해. 떠올려 내야만 해. 찬란한 황금빛의 실을 손에 쥐고서. 당연한 것처럼 그는 황금빛의 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미카는 어쩐지, 그 이상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미카는 손으로 베개 옆을 더듬어 스마트폰을 찾아 켜서, 어둠을 골무처럼 입은 엄지로 화면을 얕게 두드리며 언어화를 시도해보았다. 푸른빛이 조금 감도는 희끄무레한 빛이 밤의 방의 옅게 밝혔다. 말이 되지 못한 몇 가지 단어들을 거쳐, 어느새 그에게는 깊은 생각 없이도 나열할 수 있었던 익숙한 말들이 몇 개 적히다 만다. 쉼표 하나에는 한 숨 하나.

“이대로는... 안 된다...”

말꼬리에서 힘이 빠지면서 미카의 손에서 스마트폰이 스르륵 흘러 떨어졌다.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는 이불에 부드럽게 파묻혔고, 미카의 의식은 완충재 없는 잠으로 끝없이 끝없이 떨어져갔다.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고 나서도 카게히라 미카의 삶은 크게 변했을까? 물론, 주변은 많이 변했고, 자신의 처지도 크게 변했다. 우선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3분의 2 가량은 다른 반으로 가 버렸다. 잡담과 시시한 놀이들에 적합한 지금 이 점심시간에 구성원의 변화는 정말 잘 체감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카에게 그보다도 크게 체감되는 것은 한 사람의 공백이었다. 계단만 올라가면 찾아볼 수 있었던 소중한 이, 이츠키 슈가 이 학교를 떠난 것이다. 3학년이 되어 제일 높은 층 교실을 쓰게 되었으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계단을 오를 일도 없고, 옥상에 같이 자리를 잡거나, 때때로 슈가 미카네 반으로 내려오면 같이 밥을 먹던 일도 이제는 없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면서, 그는 해와 달이 반대로 뜨는 이국으로 날아갔으니까. 지금도 연예계 활동을 위해 가끔 만나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학교 안에서 착 붙어서 얘기를 나누거나, 조언을 구하거나, 마음의 위로라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언제든지’가 ‘이따금’이 되는 그 공백은 컸다.

미카에게는 주로, 그것이 문제였다. 외롭고, 보고 싶고, 내가 잘 하고 있는지 확인받고 싶어. 내가 잘못된 길을 갔다면, 꾸짖어서 바른 길로 인도해주었으면 좋겠어. 그렇지만 슈 역시도 미카에게 인간으로서, 한 사람 몫의 예술가이자 파트너로서 거는 기대가 있었다. 이제 미카는 언제까지나 슈의 말만 들으면 되는 ‘인형’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카에게 일차적으로 해방이었지만, 마냥 해방만은 아니었다. 이 언제 끝날지 모르고 제 뒤에 따라붙은 고독조차 견디면서 혼자 있는 때를 수행의 시간으로 삼아야 할 터였다. 특히나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는 시기다. 예정된 Valkyrie의 다음 무대.  그것은 미카를 향한 도전장이자 시련이기도 했다. 유학을 간 이래로, 슈가 미카에게 누누히 강조한 것이 있었다. 바로 한 사람 몫을 하는 아티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성과를 선보일 시간이 곧 있을 공연, 네버랜드 페스티벌이었다. 실험적인 공연을 선보이는 아티스트들도 많이 참여한다고 하니, Valkyrie의 기존 노선과 달리하는 비전을 가진, 그리고 자기주장이 발돋움하기 시작한 미카에게는 실험대로써 안성맞춤이었을 무대였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닥쳐오니, 미카에게 앞선 건 의욕보다는 갑갑함이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내 세계를 스승님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나는 내 예술을 선보일 수 있을까? 
걱정이 계속 밀려왔다. 작년에도 미카는 자신을 한껏 표출할 수 있는 - 그리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Valkyrie로서는 '외도'인 - 무대를 선보이거나 체험한 적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슈가 옆에서 괜찮다고 이야기해주었다. Valkyrie의 예술적 지향점의 주축인 이츠키 슈가 카게히라 미카의 예술을 인정해주고, 가장 큰 우군이자 후원자가 되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혼자다. 혼자서, 스승님이 주는 확신 없이, 자신의 보잘것없는 세계를 만인의 앞에 펼쳐야만 한다. 날카로운 시선들이, '카게히라 미카'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끔따끔하게 제 피부를 도려낼 것이다. 벌써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세 사람에서 두 사람이 되었을 때도, 미카가 무대의 비중을 잡아먹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 팬들은 있었다. 늘 생글생글 웃으며 만인을 대하지만, 그런 아픈 시선은 마음에 직접 내리꽂힌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시선들에 보호장비 하나 없이 맨살을 노출하는 것이다. 아프고, 외롭게. 분명 즐겁게 할 수 있었던 것들이, 지금은 도리어 부담이 되고 있었다. 
보조바퀴를 막 뗀 자전거가 휘청이듯, 자립이란 생각보다 힘든 것이었다.
미카는 가사나 의상의 구성 등을 쓰다 만, X자나 마구 그어 지운 펜 흔적이 난잡하게 남은 노트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다시, 점심시간을 맞이한 3학년 A반 교실로 이젠 습관이 된 상념에 잠겨있던 미카의 의식은 돌아온다. 단짝친구도 이젠 썩 막역해진 유쾌한 동료들도 옆 반으로 조각조각 찢어지고 남은 교실 안에서, 미카는 조용히 있는 빈도가 부쩍 늘었다. 같은 반에 남은 건 자신을 잘 챙겨주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위원장’ 이사라 마오와, 그나마 친하지만 먼저 말 거는 타입은 아닌 윳군, 즉 후시미 유즈루 정도였다. 그 가운데서, 말 없는 미카는 그 날카로운 인상 탓에 이지적이고 차갑게까지 보이곤 했다. 어쩌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색 다른 두 눈동자가 그런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욱 부추기는 것도 같았다. 물론 미카와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사람이라면 미카는 잘 웃고, 조금 엉뚱하기도 하며, 실수투성이지만 착실한 아이임을 대번 알 것이다. Valkyrie의 격식 높은 이미지에 익숙한 대중들에게는 그게 단점이기도 장점이기도 했지만, 여기는 학교니까. 학교를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지금은 미카에게 그렇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숨 돌릴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째서인가, 작년에 딱히 같은 반도 아니었으면서 어렴풋하게 미카를 꿰뚫어본 사람이 있었다.

“카게히라 군, 먹을래?”
“응아?”

눈앞에 내밀어진 것은 아직 뜯지 않은 딸기 크림빵 봉투였다. 미카가 고개를 돌리면 서글서글한 웃음과 상징적인 푸른 안경테가 바로 보였다.

유우키 마코토. 운 좋게도 같은 반이 되어버린 Trickstar 4인방 중 하나. 평소에는 노트북으로 알 수 없는 명령어들을 타이핑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 파이썬이었던가? 파이썬이라고 하면 스승님이랑 같이 봤던 몬티 파이썬밖에 모르는 미카였다 – 쉬이 말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그런 그가 오늘은 웬일로, 그것도 평소 농담과 장난에 같이 어울리던 아케호시 스바루가 아닌 자신에게 빵을 주면서 말을 붙이는 것이었으니.

“오늘 밥 안 먹었지?”
“응... 근데 와?”
“너 먹으라고?”
“응아아... 그치만 니 물라꼬 산 건데.” 

미카가 우물쭈물하면서 애매한 거절로 답하면, 마코토는 난처한 표정을 잠시 지었다. 그러더니, 미카의 눈앞에서 홱, 하고 딸기 크림빵은 사라지고 말았다.

“니 와이카노! 우리가 남이가, 줄 거면 뜸들이지 말고 그냥 줘라!”
자고로 줬다 뺏는 게 더 나쁘다고 했다.
“아하하, 방금 그거 좋았어! 이거, 다음 라디오 레퍼토리로 써먹어도 좋을 거 같다니까.”
“응아아?”

어안이벙벙해하는 미카를 마코토는 곰곰이 살펴보더니, 아, 이거다, 하는 듯한 눈으로 미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는,

"그나저나 카게히라 군, 너 리액션 좋은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리액션이라니?"
"응, 응! 역시 아케호시 군 말대로라니까. 우리끼리만 놀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데, 신선해서 반응을 보는 보람이 있다니까."
"그 말은... 니 처음부터 내 놀릴 생각이었나? 여, 역시 니는 아직 적이었던 기가!"
"미안, 미안! 놀릴 생각은 아니었어. 라디오는 임기응변이 중요하니까, 연습 상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응우우, 하고 화는 듯 볼을 부풀리던 미카는, 3초 지나자마자 바로 표정을 풀면서 딸기 크림빵을 마코토에게 돌려주었다. 그 모습에, 마코토도 평소대로 살갑고 조금 멋쩍게도 보이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카게히라는 그런 마코토를 보며 꽤 귀여운, 혹은 재밌는 애네, 하고 즉각 떠오른 반응에 적합한 단어를 찾아 헤매다, 좋지만은 않은 경험이라도 생각한 마냥 완성되지 않은 문장을 삼켰다.

"아니, 그건 너 먹어."
"줬다가 뺏았다가 줬다가... 이럴 땐 하나만 해라. 내는 바보라가 이랬다 저랬다 하면 헷갈린데이."
"그럼 오늘 점심은 같이 먹을래?"

돌발스러운 제안이었다.

"내랑? 내한테 뭐 볼일 있나?"
"볼일이 없어도 같이 먹자기엔, 사실 좀 상의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마코토가 말끝을 흐리면서 꺼내던 말을 다시 집어넣으려 하면, 미카는 씨익 웃으며, 그 앞에 척 하고 손을 내밀었다. 주머니에 오래 뒀는지 묶인 포장지 끝이 안으로 구겨진, 딸기맛 사탕이었다. 작년에 비하면 누그러진, 그러나 대담하게도 느껴지는 친근함의 표시에 마코토는 사뭇 놀란 기색을 보였다.

"내만 무면 불공평하니까. 유우키 군도 사탕 물래? 니도 딸기맛 좋아하는 거 같아가."
"정말 받아도 돼? 야호! 고맙다 야. 마침 뭐 좀 짠다고 머리에 당분이 필요하던 참이었어."
"원래 열심히 뭘 하고 나면 당분이제. 내도 당 떨어지면 클난다 아이가. 글구 내가 봐도 유우키 군, 뭔가 복잡한 명령어 같은 걸 열심히 화면에 쓰고 있어가. 파이, 파이 뭐시기? 라즈베리 파이던가?"

미카가 건너편에서 봐온 광경을 이야기해 마코토의 관심사에 가볍게 한 발 걸치면, 마코토는 좋은 타이밍이라도 잡은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아, 그건 게임 만들 때 이야기고, 지금은 파이썬이 아니라 루비 기반이야. 지킬로 깃헙 페이지스에 블로그를 만들 생각인데, 작업은 로컬에서 다 할 수 있어서 사이트 터진다고 글이 날아갈 일도 없고, 포스팅도 마크다운 문법이라 어렵지 않고..."
"오, 그런 거가?"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미카는 흥미롭게 그것을 듣고 있었다.
"학교에서 시간 날 때 딴짓 하기는 좋지."
"그런 걸 딴짓이라고 부르는 유우키 군은 대단하데이, 내는..."

마코토는 그렇게 말하면서 휴대용이라기에는 두껍고 무거워 보이는 노트북을 펼쳐 미카에게 보여주었다. 아무리 봐도 게이밍 노트북이라는 티를 팍팍 내는 두께 - 물론 게이밍 노트북으로 게임만 하는 건 아니지만 - 에 미카가 이걸 들고 다녀? 라고 묻는 것도 웃음으로 받아넘기며, 마코토는 아까의 말 사이사이마다 뜸 들이던 자세는 온데간데 없이, 자신작을 보이는 것처럼 당당하게 노트북을 내미는 것이었다. 화면에 나타난 웹사이트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디자인이었지만, 글씨도 제법 큼지막하고 사진 자료들 사이의 여백도 충분하여, 정돈된 디자인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으레 드러내는 신경질적인 결벽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미카로서는 이게 보통의 블로그와 뭐가 다른지 이것만 봐서는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디자인 부분만 갖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미카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시력은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아도 눈이 쉽게 피로해지는 자신에게, 지금까지 데스크탑으로 본 사이트들에 비해서는 눈이 덜 아프고 보기 편하다는 것이었다.

"글자 커가 보기 괘안네."
"그래? 천만다행이네."
"응, 보기 좋다."
" 너무 크게 잡은 건 아닌가 걱정했었어. 나 안경 쓰잖아. 시력이 좋은 사람들한테는 너무 커서 내용이 한 눈에 안 들어올까 걱정도 됐고, 스킨 템플릿들은 보통 영어 기준이라서, 일본어는 어떻게 나올지 고치면서도 몰랐어서... 휴, 다행이다. 그래도 봐주는 사람이 있으니 얼추 마무리는 지어지겠어."
"누구한테 보여줄 거면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이 보기 편한 게 좋제."

제법 쌀쌀한 가을 날씨인데도 땀이라도 닦는 듯 머리를 손등으로 쓸어넘기는 마코토와, 노트북 화면을 번갈아 보면서, 미카는 우와아, 하고 얕게 늘어지는 소리의 가벼운 탄성을 입 밖으로 냈다. 그것은 자신이 모르는 영역을 거침없이 해내는 전문성에서도 기인하지만, 그보다 좀 더 무형의 것에서도 오는 감탄이었다. 미카는 그것을 쉬이 말로 할 순 없었지만, 어쨌든 다가온 건 있었다.

"뭐, 딱히 보여줄 생각으로 한 건 아니고, 개인용이지만 말야. 생각 정리용? 그냥 그런 거야. 별로 특별한 것도 아니고, 시덥잖은."
"아니, 아이다, 시덥잖은 거 아이다. 오히려..."

아까까지만 해도 신난 듯 자기 결과물을 어필하던 마코토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조금 주저하는 면이 있음을 미카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말에는 조금이지만, 반사적으로 반박을 해 보고 싶었던 미카였다. 오히려, 시덥잖은 것이라 말하면서도 성의를 쏟는 그 태도에서 설렁설렁 하지 않는다는 진심이 느껴졌다. 자기만족을 위해 만드는 것이라도, 찾아오는 사람들을 신경쓰고, 그들의 편의를 위해서 글씨 크기 하나도 소홀함 없이 조정한다. 미카는 그 자세에서 장인정신과, 모종의 상냥함까지도 느꼈다. 스승님과 닮은 점이 있으면서도, 그와는 또 다른. 마음 속에서는, 자신에게 없는 것 역시도 느껴지는 듯했지만.

"스승님도 그랬데이. 결국 제일 끝까지 남는 건 자기만족이라고."
"그래?"
"자기만족에 성의를 들인다는 데서 진심은 전해지는 거 아이가."
"하긴, 그건 맞아. 일단 내가 즐거워야지 할 의욕이 나고. 카게히라 군이 말하는 진심이 얼마나 전달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것보다도... 아, 너무 내 이야기만 했나? 카게히라 군도 뭔가 열심히 하고 있던데, 나도 봐도 돼?"
"응앗?"

마코토가 그 말을 한 순간, 미카는 고개를 돌려 아까까지 자신의 시행착오들이 난립하는 노트가 버젓이 펴진 채 책상 위에 있었던 것을 봤다. 침묵을 지키며, 미카는 노트를 닫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책상 모서리 근처로 밀었다. 마코토는 그것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지만, 그의 눈은 쉽사리 미카의 노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말은 많이 생략되었지만, 서로가 열중하는 것, 그리고 고민하는 것이 있다는 무언의 이해들은 오갔다.

"사실 내도 잘 모른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환한 미소로 순간의 동요를 가리며, 미카는 말했다. 얼핏 둘 사이에 주고받은 말은 매끄럽게 서로를 응원하고 북돋아주는 듯 보였으나, 그 순간에도 미카는 자신이 한 말에 확신이 없었다. 아마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지만. 적어도 자신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국의 제 파트너가 해준 이야기를 꺼내봤건만, 그게 외려 자기 고민을 부채질할 줄은 누가 알았을까. 무엇보다 미카 자신도, 그 말을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쉽사리 익히지 못하겠는데.

"그치만 해보면 알겠제."
"응. 그래. 해봐야 뭐라도 발전이 있으니까. 카게히라 군도 힘 내."

그렇지만, 비록 미증유의 고민을 껍데기만 건드리는 이야기라도, 같은 반 되고 나서 말 붙일 사람이 있다는 건 좋았다. 미카는 딸기 크림빵의 포장을 뜯어 한 입 한 입 베어먹어갔다. 입에 퍼지는 달디단 딸기향과 함께 행복감과, 작년까지만 해도 서먹했던 반 친구를 향한 내적 친밀감이 금세 차올랐다. 프랑스에 있는 스승님은, 예전만큼 남이 주는 음식을 함부로 받아먹지 말라고 미카에게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뭐, 했다고 해도 이건 받아먹는 게 아니라 같이 나눠먹는 거니까 괜찮지 않은가. 때마침 좋아하는 음식도 같으니 안심되고 말이다. 공통점이 있다는 건, 지금의 미카에겐 그만큼이나 안정되는 것이었다. 작년이었다면 먼저 반 친구들 이름 부르는 것도 주저했던 - 그것 때문에 오히려 자기 쪽에서 먼저 별명을 붙이는 모양새가 되어서, 본의아니게 친근한 이미지가 되어버렸지만 - 미카였지만, 올해는 작년보다 마음 속 인간의 씨앗이 꽤 자라났으니까. 친구를 만들었다고 하면, 스승님에게 혼날 일도 없을 터였다. 사교활동을 썩 좋아하지 않는 스승님도 친구는 있고.
물론, 인간관계는 일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므로 상대가 친구라고 생각하는지부터 물어봐야겠지만, 지금만큼은 미카는, 그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마, 여튼 고생이 많데이. 사탕 하나 더 주까?"
"아니, 이건 고생이 아니라 기분 전환용이야. 진짜로 고생하는 이야기는 따로 있어."
"뭔데?"
"카게히라 군은 액션 영화 좋아해?"

마코토가 노트북을 덮으며 본론을 꺼내려는 순간, 점심 시간의 끝을 고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럼 학교 끝나고 이야기할까? 아니면 라인으로? 난 라인이 편해."
"응아앗? 니 내 라인 아이디 알고 있었나?"
"아, 하하, 그건... 비상연락망! 그래, 비상연락망이야! 나 방송위원회기도 하고."

방송위원회와 비상연락망이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이함의 본산지 같은 이 유메노사키 학원에서 돌발상황이 일어나는 게 한두 번도 아니다보니, 미카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납득한 채, 다 먹은 딸기 크림빵 포장을 휴지통에 버리고 수업을 견딜 채비를 했다. 하필 다음 시간이 그 엄하기로 유명한, 거기다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이 명백한 쿠누기 선생님의 수업인 건, 같이 이야기하던 사람이 떠나고 고민과 함께 홀로 남겨진 미카에게는 꽤 가혹한 시간이 될 터였다. 아, 나루쨩 없이 그 선생님 얼굴 보는 건 이렇게 껄끄럽구나. 미카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유우키 마코토가 카게히라 미카와 말을 붙이게 된 계기는, 처음에는 별 것이 아니었다. 새 학기 초, 맡게 될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고, 거기에 대비해 다양한 게스트들에게 대응하는 임기응변을 반 아이들 상대로 연습할 셈이었다. 최근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아서 고민하던 찰나, 항상 자신과 '바보 콤비'로서 농담의 파트너가 되어준 아케호시 스바루가,

"가끔은 신선한 게 있으면 반짝반짝하고 좋지? 그러면 밋키 상대로 연습해보는 건 어떄? 쟤 리액션은 좋잖아?"

라고 툭 던진 한마디. 그 정도의 사소한 계기였다. 옆에서 올해도 반장을 맡아 반 아이들을 챙기느라 바쁜 이사라 마오가, "어이, 너무 애 놀리지 마." 하고 말하는 것을 보고, 조금은 더 호기심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면, 작년에 니토 선배를 따라서 미카를 양호실로 데려갔을 때 면전에서 적이란 소리를 들은 이래로, 별로 말을 붙여본 기억이 없었던 것 같다. 그 때도 미카는 챙김받는 입장에 있었으니까. 마오가 가끔 이야기하던, 옆반의 '챙겨줘야 하는 그 애'. 그래도 지금은 스바루하고는 잘 노는 것 같았고, 반 아이들이랑 붕 뜬 듯하면서도 사이는 좋아 보였지만. 아무튼 같은 반이 된 이상, 자신도 언제까지나 미카를 그런 측은한 눈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그를 존중하지 않는 일이라고 마코토는 생각했다. 이건 자신을 보호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피곤하게 굴 수 있는지 몸으로 겪은 사람의 경험론에서도 의거하는 바였다.
그러고보면, 카게히라 군은 지금은 남이 주는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 있을까.
올해 초, 2학년 시절에 있었던 쇼콜라 페스티벌 때는, 스바루와 같이 초콜릿을 들고 서로의 입에다 장렬하게 크로스 카운터를 먹이던 걸 봐선, 아마 그 주박에선 풀려난 것도 같았는데. 마코토는 매점에서 자신이 좋아하고 미카도 좋아하는 게 틀림없는 - 매점 근처에서 서성이는 걸 몇 번 봐 왔고, 항상 그 빵을 사갔으니까 - 딸기 크림빵으로 미카를 낚아보기로 했다. 먹을 걸로 사람을 낚겠다니, 호기심 비용이라기엔 너무도 값싸지 않은가.
그리고 얼핏 거절하는 듯 보여서, 장난 반 무안함 반으로 줬던 걸 도로 가져갔을 때의 미카의 반응은 꽤나 걸작이었다.

"줬다 뺏는 게 더 나쁘다 안 카나!"

뾰루퉁하게 볼을 부풀리면서 토라지는 시늉을 하는 모습은, 마음을 걸어잠그고 무작정 자신을 밀어내던 작년에 비하면, 정말로 생기가 넘쳤다. 그 모습이 3초 후에 도로 풀려 생글거리는 미소가 되고, 뒤이어 사탕을 내밀 때까지의 그 즉흥적이고 통통 튀는 감정변화에, 솔직히 마코토는 좀 놀랐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는 어쩌다가 이야기가 닿아 개인용으로 만들던 습작들까지 보여주게 되어버렸지만. 그러다가 문득 마코토는, 자신이 만드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어쩐지 눈을 피하거나, 자신의 물건들을 책상 한쪽으로 치워버리는 미카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촉을 느꼈다.

"카게히라 군은 액션 영화 좋아해?"

그래서 물은 것이었다.
적어도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라면, 속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코토에게도 도전장 하나가, 시련이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우연의 일치 - 과연 그것이 우연의 일치였을까? - 로, 그는 액션 영화 '도원향 우상권'의 주인공에 캐스팅되고 말았던 것이다. 연기 커리어는 처음이기도 하거니와, 갑자기 이런 일을 자신이? 심지어 오디션은 Trickstar의 네명이 같이 봤었는데, 하필 자신이라니. 처음 통지를 받았을 때는 믿을 수 없었다. 차라리 자신은 빠진다고 하는 게 나았을까? 하지만 이런 데서만큼은 묘하게 단결력이 넘치는 네 사람은 결국 도원결의를 하면서 오디션에 다 같이 진심으로 임했고, 아무리 친구이자 동료 사이라 해도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었다. 하지만 그 냉정한 결과가 지목한 것이, 제일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라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말 그대로 그 결과 통지에, 마코토는 패닉했던 것이다.
연기 경력자인 히다카 군도 있고, 연예계 일은 타고난 아케호시 군이나, 다재다능한 이사라 군 놔두고 자신을? 심지어 자신은 딱히 신체능력이 좋은 것도 아닌데 운동 하는 애들 놔두고 컴퓨터만 쳐다보는 자신을? 딱히 액션 신에 대역을 쓴다는 이야기도 없었다. 물론 자신도 과거에 모델 경험이 있으니까, 어쩌면 커리어를 고려해서 뽑았을 수도 있지만, 고작 그거 가지고 뽑혔다고 하면 다른 후보들에겐 실례가 될 거라고 진지하게 그는 생각했다. 연기도 못하는데 어릴 적 유명세랑 반반한 얼굴만 믿고 나댄다고 욕을 먹을지도 몰라! 최악의 상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코토의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형성했다. 이것은 시련이다. 경사가 아니라 시련이었다. 

그리고 통지가 발표되는 자리에서 긴장을 드러낸 순간 같은 Trickstar 멤버들이 어떤 얼굴을 지었는지를 보고, 이것은 적어도 멤버들과 상의할 것은 아니라고 마코토는 생각했다. 자신은 정말 진지하게 긴장되고 고민이 되는데, 다들 축하하는 것이 오히려 동상이몽 같았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솔직하게 말이 통할 것 같은 호쿠토가 어쩐지 대화를 피하는 것이 무지 신경쓰였다. 하긴, 연기에 진심인 히다카 군이라면 자기보다 실력도 부족한 사람이 주역 자리를 빼앗은 게 더더욱 아쉽겠지. 그런 만큼 더더욱 자신은 보이지 않는 데서 발목을 안 잡게 노력해야 했다. 적어도 그들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는 것만은 피하고 싶은 마코토였다.

그런 계기로 미카를 낚은 건 좋은데, 왜 카게히라 미카인가? 그는 그것부터 머릿속에서 짚어나가 보았다. 일단 같은 멤버가 아니라 제3자고, 한때는 적이라고 부를 정도로 일방적으로 자신을 적대했던 사람이라면 호의에 근거하지 않은, 따라서 좀 더 객관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서다. (이미 그는 자신에게 호의가 있는 인간이 얼마나 인지왜곡이 이루어지는가를 한 차례 겪었기 때문에, 그로 인한 편향일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이유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개인적이고 추측투성이였다. 그저 미카가 자신과 같은 반이고, 비슷한 입맛을 가졌기에 이야기하기 위해 음식점을 고를 때 차질이 없을 것이며, 그 역시도 새로운 도전을 기대받고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Valkyrie가 어떤 유닛이었는지를 안다. 유닛의 지향점이야 알고 있다. 다양한 아이돌들을 분석하는 건 공부가 되니까. Trickstar로서 유메노사키 혁명의 주역이 되면서 자연스레 알게 된 과거 혁명의 역사나, 그들이 무엇 때문에 몰락했고 무엇 때문에 부활했는지, 여기에 니토 선배에게 들은 것도 있겠다, '이면'에 대한 그만큼의 정보도 있다. 하지만 그 정보 안에서 유일하게,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공백이었던 것은 카게히라 미카라는 존재였다. 그는 그 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가?
모두가 주목하지 않았던 백댄서의 약진. 유닛의 기존 이미지를 깨트려가며 주역으로 부상해가는 입장. 그 부담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마치 해보지도 않은 연기에 도전하고, 만인의 기대를 저버리고 주역에 배정된 자신처럼.
그도 긴장하고 있을까? 도전이라고, 시련이라고 생각했을까? 
그 부분의 미지를 자신의 일방적인 추측으로 채우다 보니, 마코토는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물은 게 액션 영화를 좋아하냐는 거였다니, 처음부터 발을 헛디딘 것만 같은 말이었다고 마코토는 한숨을 쉬었지만, 뜻밖에도 학교가 끝나고 미카가 보내준 메시지는 제대로 거기서 이어지고 있었다.

"액션보다는 호러파인데 스플래터 요소 있는 건 좋아해"

생각보다 섬뜩한 취향이었다. 메신저 창에 입력중 표시가 꽤 긴 시간동안 이어지는 걸 보고, 호러에 약한 자신에겐 젬병일 이야기가 이어질 걸 미리 예측한 마코토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이사라 군의 말과 자신이 생각하는 게 맞다면 이 아이도 자기가 좋아하는 화제가 나오면 브레이크가 안 걸리는 타입이다. 괜히 말 빙빙 돌렸다가 밤에 떠올라서 잠도 못 자게 될 바에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는 게 상책이었다.

"난 호러 영화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게임은 자주 해. 보는 거랑 하는 건 꽤 다르지?"
"나도 공포게임 좋아하는데 가끔 낫군 스트리밍 하는 것도 보고. 스승님도 공포 영화는 무서워하던데 게임은 꽤 하더라 역시 보는 거랑 직접 하는 거랑 다른가봐"
"근데 게임에 나오는 액션도 모션캡쳐로 만들어지는 건데 그것도 연기하는 감각이랑 비슷할까?"
"아 그거 영상 봤어 모션캡쳐로 크리쳐 구현하는게 제일 신기하더라 골격구조가 다른데 어떻게 그걸 하지? 맞다 전에 스승님이 얘기했는데 공포는 사회의 인식을 반영하는데 공포의 대상이 상징하는 건 대체로 소외된 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영화나 게임에 나오는 크리쳐나 괴물에게 이입하거나 반하는 건 의외로 이상한 게 아니래"

...막상 그렇게 화제를 돌리니까 샛길로 간 이야기가 끊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단순히 선로이탈을 넘어서 지하철이 은하철도가 되어버릴 정도라고! 자기 할 말만 하는 사람 둘이 모이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어서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마코토는 묵혀둔 고민을 용기 내어 메신저 화면에 타이핑했다.

"그래서 본론으로 들어가면 너 내가 액션영화 주인공 하면 어울릴 거 같아?"
"유우키 군 영화 찍어?"

미카의 대답은 바로 정곡을 찔렀다. 그 말을 하면서, 저 아이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놀람? 축하할 일에 대한 기쁨? 그것도 아니면... 텍스트만으로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추론하다 보면, 뒤이어 미카가 또 메시지를 보내왔다.

"전에 오디션 이야기 하는 게 그거였구나"
"카게히라 군 알고 있었어?"
"아케호시 군한테 들었어. 그리고 넷 다 우리 반이잖아. 얘기하는 거 들어서?"

하필 스바루였다니. 분명 오디션 공지 뜨고 나서부터 반 사방팔방에 뿌리고 다녔을 거다. 그래도 알고 있으면 이야기가 더 빨라지겠다고 생각하며 마코토는 엄지의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그거 내가 주인공 역으로 뽑혔는데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아... 그런 거 있지 나도 알 것 같아"

알 것 같다? 그 반응이 마코토의 호기심에 또다시 불을 지폈다. 그와 동시에, 역시 미카를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로 정한 것은 잘한 것 같다는 묘한 안도감도 들었다. 축하하는 것도 아니고, 복잡하게 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배려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서투른, 어쩌면 자기본위로까지 보이는 응답이지만, 지금의 마코토에게는 그것이 훨씬 속 편했다.

"실은 나도 요즘 비슷하게 뭐 준비하고 있어"

그 다음에 이어진 이야기를 기점으로, 유우키 마코토는 카게히라 미카와 한 배를 탔다고 느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일방적인 생각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시련에 맞서는 친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
그렇게 발돋움하는 두 사람의 청사진 밑그림이, 가닥이 잡히지 못한 채 서로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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