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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 사탕통/팝핑 캔디

[네짜호드] 생과 사의 맹세

by 료밍 2020. 6. 7.

첫 로보토미 코퍼레이션 연성. 캐붕주의

네짜호드라기보단 네짜흐->호드 같지만 어쨌든.

호드와 네짜흐의 코어억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괜찮아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의식이 점점 흐려질 때까지, 그저 초록빛의 물질에 스스로를 녹슬게 하다 보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 믿었다. 저어기 지휘팀의 직원들이 늘 하루를 살아남길 바라며 제일 첫 번째 방에 들어가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 나도 이대로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기도를 올렸던 것 같았다. 그 기도에 응해 목소리를 들었던가. 평소처럼 다가오는 환각들, 망령들. 그 속에서 잠시, 누군가를 돕고 싶다고 생각해 몸을 내던진 자신을 본 것도 같았다. 퍽이나 숭고한 의도였었지. 나 하나도 추스르지 못할 정도로 나약한 주제에, 남 걱정은 참 질릴 정도로 했더랬다. 그 주제넘은 성품이 결국 자신을 이 지옥까지 끌고 온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남 걱정, 남 걱정. 그것만은 멈출 수가 없었다.

기왕이면 죽을 때는 누군가를 구하고 죽고 싶었다.


그것이 옛 소망이었다.



눈을 떠 보면 수복실에 있었다. 병실 침대의 풍경과는 다른 생경함이지만 그 분위기는 얼추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침대 대신에 수리 도크에 제 몸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뿐일까. 적어도 교체될 정도로 망가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엔케팔린에 절여져 녹슨 몸체를 새 부품으로 갈아끼우고 내부를 청소하는 기계팔들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또 살아남았구나.

그런 생각과 함께 눈에 초점이 돌아온다. 또다시 펼쳐질 것은 지옥과, 내가 구할 수 없는 수많은 생명들이 차곡차곡 쌓여 무덤을 만드는 광경들이겠거니, 예상대로의 체념을 머리에 심으며 삐걱거리는 하루를 시작할 법도 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뭔가 다른 시작을 해보고 싶었다.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돌아오는 것뿐인데, 조금 긴 꿈을 꿨을 뿐인데 이 지긋지긋한 삶에 흥미라도 붙었을까? 기억을 되돌려본다. 내가 취해 정신을 잃기 전에, 나는 또 누군가를 낫게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래, 교육팀의 그 녀석인가보다. 항상 선심 쓰는데도 제대로 안 되던 게 안쓰러워 보여서, 항상 생글거리는 얼굴로도 차마 감출 수 없었던 피로가 엿보이며 그거 좀 나눠줄래, 하던 모습이 외로워 보여서, 나도 모르게 같이 취할 기회를 나눠줬었다. 맞술을 까는 것 같은, 가벼운 감각으로 그랬었나보다.


차라리 같이 죽을 사람이 있으면 외롭지라도 않았을까.


하지만 그 녀석, 호드는 죽고 싶지 않았을 거다. 항상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서, 제 삶을 쥐어짜내 가면서까지 노력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미움받고 아무리 알아주지 않아도, 최선을 다하던 그녀였다. 호드는 내가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모양이고, 그것이 우리가 약에 취하는 것이나 다름없음에도 엔케팔린을 계속 나눈 이유였다. 힘든 시간을 조금만 잊으면 내일은 덜 힘들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했겠지. 근데 말야. 호드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나아질 생각이 없었다. 그저 계속, 계속 침잠하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내 머릿속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가 무엇인지도 잊어버릴 정도로 깊은 잠에 잠길 수 있으리라. 내가 바란 건 그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절망적이게도 그 녀석이 먼저 정신을 잃는 것이었다. 전력이 빨려나가는 것과 함께 마지막으로 본 호드의 모습은 모종의 원망에 차 있는 것도 같았다. 그 원망이 나를 향한 것인지 어떤지는 알지도 못한 채로, 나도 천천히 의식을 잃었고, 그 후로는 오랫동안 공백. 그리고 지금.


고작 그런 이유로 나는 그 녀석을 같은 수렁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던 걸까. 누굴 살리고 죽고 싶다면서 끝은 외롭기 싫다고.


허무한 상념에 잠기다가, 수복실 문의 개폐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뒤늦게 의식의 끄트머리에 걸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호드가 와 있었다. 큰일을 겪고 난 뒤라 자신도 덜 수복된 부분들이 소체 곳곳에 보임에도,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양 손에 맥주 캔을 들고서. 그 표정은 어딘가 화난 것처럼 보였다. 역시 너까지 끌고 가려고 한 나를 원망하는 것일까.


"정말, 걱정했잖아."


의외의 말이었다. 고친 다리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지 약간 다리를 절면서도, 그녀 특유의 활기를 잃지 않은 채 호드는 수리 도크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착, 하고 아직 차가운 맥주 캔을 내 뺨에 댔다.


"잠깐, 아직..."


갑작스런 감촉에 반사적으로 몸이 뒤틀리고 약간의 아픔이 소체에 느껴졌다. 그러자 호드는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는,


"미안! 혹시 아픈데 막 누른 건 아니지?" 하고 사과를 했다.

"아픈 거야 별일도 아니지. 그러고보면 내가 죽은 동안에 추가적인 사상자는 없었고?"

"하나도 없었어. 적어도 네짜흐네 부서에서는... 아마 엉망이 된 건 너랑 나 둘 뿐이 아닐까."

"그렇구나. 다행이네..."


자기 부서 이야기를 안 하는 건, 역시 그쪽에는 뭔가 일이 터졌던 것인가. 교육팀은 주로 경험이 미숙한 직원들의 훈련과 정신적인 지원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었던 만큼, 호드가 정신을 잃은 상황에서는 사고가 일어날 법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상황이,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도움이 되는 자신’의 방증이 된다는 것이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굳이 말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 없었을 수도 있고, 내가 굳이 위로하려고 나서는 게 섣부를 수도 있으니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네가 평소에 직원들의 안전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으니까, 다들 무사했던 게 아닐까? 네짜흐 너는 안 그래보여도, 사람 하나하나를 아꼈으니까..."

"그런가."


별로 따뜻한 마음씨 같은 게 있어서는 아니다. 너만큼 노력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조금이라도 주변에 있는 이들은 같은 지옥을 덜 걸어주길 바랐던 것뿐이다. 내가 살아있는 게 거기까지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도 생각은 안 했다.


그렇지만 만약에, 만약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었다면?


"조금만 내가 무사했으면, 죽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있었을까."


넌지시 혼잣말을 해 본다. 공허하게 천장을 바라본다. 내가 지금의 나로 존재하기 이전, 거슬러올라갈 수 있는 기억을 준 이에게 물어본다. 너도 그걸 바라고서 맹세를 했고, 지옥에 발을 들였잖아. 안 그래?


"적어도 나는 여기 살아있잖아."


슬픔을 따뜻한 미소로 가리면서, 호드는 조심스럽게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있지, 모든 사람에게 호의가 닿을 수는 없어. 한 가지 호의의 방식이 모든 사람에게 맞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단 한 사람이라도 그게 닿았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잠깐 정신이 돌아오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


호드는 내 수리 도크 옆에 앉고는 들고 있던 맥주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바로 내게로 고개를 돌리면서 말을 고르더니, 맥주캔 하나를 내게 건넸다.


"평소 마시는 걸로 뽑아왔는데, 한 잔 할래?"

"너 술 안 마시지 않았어?"

"한번쯤 기분전환 차."

"아직 몸도 다 안 나았는데 막 마셔도 돼? 그러다 너까지 앤젤라 님에게 혼나면 큰일이잖아."

"점검 다시 받으면 되지 뭐."


늘 모범을 보이려 하면서도 이런 데서는 살짝 해이한 면이 편하기도 했다. 호드는 어느새 제 몫의 맥주캔을 따더니 몇 모금 들이키기 시작했다. 잠시간 그렇게 마시다보니 취기가 돌았는지 수리 도크에 몸을 기댄다. 꽁 하고 기계부품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술에는 약한가?


"그리고 나한테도 분명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계기가 되어준 사람이 있었단 말야? 힘들고 외로울 때 기댈 데가 되어준 사람이 있고, 그게 너라고 하면 믿을래?"

"나는..."


여전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네가 외로워보였던 건 사실이다. 늘 누군가의 곁에서 의지가 되어주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몰라주고, 그러면서 자신은 기댈 데 하나 없어보이던 너에게 조금이라도 뭔가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결국 네 바람을 이루어줄 순 없었다. 나는 가라앉는 것을 선택했고, 차마 네 손까지 잡고 가라앉을 수는 없었는데.


"...미안.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런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어."


어느새 내 손은 맥주캔을 쥐고 따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부품 사이사이를 에탄올의 알싸한 기운으로 축여간다. 다시 부식될 것 같은 감각이 썩 나쁘지 않고, 그립기까지 했다.


"아, 또 같이 취할 사람이 필요해서 그랬구나 하고 이야기할 거지? 그래도 덕분에 난 살아있잖아."

"만약에 네가 살아남지 못했다면, 넌 마지막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 거 같아?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아?"

"네짜흐?"


처음부터 서로가 바란 것은 달랐다. 술김을 가장해서, 지금이라도 그걸 알리고 싶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타인을 빌미로 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었다는 것을.


"난 내가 바란 자멸에 너까지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어."


호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계속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슬슬 술기운이 돌아서 그런지 그 표정을 읽기가 힘들어졌다. 그녀는 잠시 맥주캔을 내려놓고.


"고마워, 살아있어줘서."


하면서 맥주캔을 쥔 내 손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 손은 딱딱한 기계의 감촉이지만, 왠지 따뜻했다. 그 따뜻함이 아려올 정도로 느껴져 혼란스러웠다. 어차피 이렇게 해도, 내 고통은 사라지지 않을 텐데. 나는 과거의 내가 실패했던 것처럼 또다시 너를 내 존재이유로 멋대로 삼고, 그릇에 맞지 않는 꿈과 선의를 품은 내 고통을 네게 쏟아낼지도 모르는데. 머릿속이 목소리들로 자욱해진다. 나 자신을 쑤시는 데에 최적화된 말의 모서리들이 점점 나를 침식해가던 그 때,


'이 곳에서는 죽음조차 허락받아야 해.'


그 말이 의심과 자학으로 가득찬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워버렸다.


죽음을 허락받아야 한다는 것, 그것은 내 삶을 내 뜻대로 끝낼 수 없다는, 영겁의 고통을 선고하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나고 나서도 관성적으로 먼저 떠올려버렸다. 하지만, 내 삶을 부르는 사람이 있었기에,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라면. 단지 누군가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고, 그로 인한 영예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더욱 큰 의미가 있다면. 이 아픔을 나눠줄 사람이 내게 되어주고 싶어서, 너는 그렇게 나를 불러왔던 거니?


기계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울고 싶었다.

내 삶을 부른 이를 위해, 다시 한 번 맹세할 수 있다면... 문득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신호에, 무심코 나는 떠오른 목소리를 입에 담아본다.


"호드, 너 말야."

"응?"

"우리, 죽을 땐 서로한테 허락받기로 할까? 내가 죽는 건 호드가, 호드가 죽는 건 내가 허락해야 하는 거지."


평소처럼 심드렁하게 던진 말이었다. 어쩌면 이것도 술김이라면서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의 무게는 평소보다도, 놀라울 정도로 삶의 의지가 담긴 무언가였는지도 모른다. 내게는 생소하던 그 개념들을 모으고 모아서 낸 목소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호드는 맥주캔을 다시 들어올리고는, 나를 똑바로 보면서,


"그럼. 무간지옥까지 우린 함께야."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미소는 활기찼지만 덧없는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그렇다면 나도, 새로이 약속할 것을 찾아봐도 되겠지. 누군가를 구하고 죽는 것보다 더 나은...


"건배 할래?" 그녀가 묻는다.

"좋아."

"그럼, 건배!"


쨍, 하고 반을 비운 맥주캔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삶의 맹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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