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2019년 3월 23일 뱅드림 온리 이벤트 'Just BanG!' 에 낸 리사유키 소설회지 '그대의 이름은 러브송'의 웹공개 버전입니다.
이벤트 스토리 'Don’t leave me, Lisa!!!!'와 '언젠가 닿기를, 나의 가사'를 기반으로 하였으며, 시계열의 날조를 비롯해 이런저런 날조 설정이나 원작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미나토 유키나는 사랑노래를 쓰지 않는다.
유키나에게 사랑노래란 거짓으로 둘러싸인 겉멋 든 포장,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쏟아져나오는 유행가들이 사랑을 노래하는 이유는 그 인스턴트적인 성질에서 기인한다. 통계적으로 대부분의 인구는 유성애자였고, 연과 애를 논하는 건 그런 인간이 대다수인 사회의 교양이요, 연애 자체는 그 훈장이었으니까. 그야말로 상업음악이나 할 발상이었다. 적어도 그 이상의 이유를 유키나는 찾을 수 없었거니와, 명색이 아티스트라는 치들의 빈약한 생각 수준에 그녀는 치를 떨기까지 했다. 진솔한 것만을 담아내야 할 노래가사에 진심이 아닌 것을 담아내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Roselia는 음악성만으로 승부하는 밴드였다. 유행가의 단골소재 따위를 노래가사로 붙이기에 그들은 너무 고고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젠체한다 부를 터였겠다. 하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는 굳건한 각오 없이는 노랫말 하나도 쉬이 쓰지 않는 게 Roselia였고 미나토 유키나였다.
허나,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녀의 측근, 그러니까 유키나라는 인간을 조금이라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냉정한 겉모습이 유키나의 모든 것이 결코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유키나가 밴드를 시작한 진의부터가 애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적어도 그녀와 음악의 길을 함께 하는 이들은 유키나 본인의 입으로 그것을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러나 유키나의 하드디스크 속에 절대로 공개되지 않을 곡 하나가 잠들어있었던 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lisa.flp'라는 이름의.
유키나가 음악을 시작한 원초의 계기 속, 그녀가 쌓아올린 악상들의 근간을 이루는 소중한 이. 그 이름이 가리키는 것만이 진실된, 쉽게 노랫말을 지을 수 없는 단 하나의 곡.
오랜만에 유키나는 그 파일을 실행해 본다. 여전히 가사를 얻지 못한 흥얼거림을 곁들이며,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
"나, 가사를 써볼까 해."
읽고 있던 로맨스 소설책을 덮으며 이마이 리사는 말을 꺼냈다. 산만하게 손을 움직여대며 균일한 소리로 책상에 펜을 딱딱 두드리던 히카와 히나는 리사의 목소리에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보기엔 안 그래도 다 듣고 있는 모양새였고, 그걸 아는 리사는 히나를 제법 편한 이야기상대로 여겼다.
"리사치는 가사를 안 썼어?" 히나는 묻는다.
"응. 보통은 유키나가 쓰니까."
"의외다. 난 리사치가 평소에 책도 많이 읽고, 보통 노래가사 하면 있는 분위기? 그런 건 리사치 취향일 거 같아서 리사치가 가사 쓰는 줄 알았어."
"에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랑 유키나가 쓰는 스타일이랑 엄청 다른데. 그리고 우리 노래에는 유키나 스타일이 더 맞을 거야."
리사는 히나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멋쩍게 웃었다. 언니의 연주라면서 Roselia의 노래를 열렬히 감상하던 히나는, 아무래도 기타리스트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언니네 밴드'라는 인식 때문인지는 몰라도, 가사보다는 멜로디에 집중하기 쉬웠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나도 Roselia에 뭔가 기여를 하고 싶어. 근데 악기를 다루는 실력이나 음악 듣는 귀는 내가 부족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작사는 어떨까 싶었어."
"응. 역시 작사는 리사치한테 어울려. 룽하고 오네."
"그게 Roselia에 어울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야."
"그래도 리사치는 리사치대로 개성이 사는 게 좋지 않아? 난 리사치의 가사를 본 적이 없지만, 리사치의 가사는 세상에 단 하나뿐일 거야. 나처럼."
히나는 곧게 쭉 편 검지손가락으로 리사를 가리켰다가 다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제 일도 아닌데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그럴까…? 내가 쓰고 싶은 가사는 딱히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 하나뿐인 이야기는 아닐 거야. 흔해빠진… 그런 거라서."
히나는 리사가 방금 덮어 책상 위에 올려둔 로맨스 소설 표지를 힐끗 보더니, 눈을 반짝이면서 리사에게 바로 물었다.
"아, 리사치, 혹시 사랑노래를 쓰려고 하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순간 리사의 얼굴에 확 하고 열이 몰렸다. 리사는 역시 히나한테는 당해낼 수 없겠다 싶었다.
"아, 하하, 들켰나. 뭐, 달리 말하면 그것밖에 쓸 줄 모른다고 해야 하나?"
"확실히 유키나쨩은 상업음악은 인정하지 않았지? 그렇다면 대중음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랑노래로는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겠네."
그 말에 리사는 뼈를 맞은 듯이 멍하니 있었다. 역시 내가 고민하는 것은 Roselia의 격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히나는 역시 예리하네. 내가 고민하는 부분을 정확히 짚어줬어."
"근데 떠오르는 게 그것밖에 없단 건, 달리 보면 그게 본심이란 거 아냐? 가사는 루룽! 하고 떠올렸을 때 파바박! 하고 써버리는 게 최고지."
"그럴려나… 일단 Roselia에서 쓸 곡에 무턱대고 가사를 쓰고 싶다고 말하긴 좀 그러니까, 다른 노래나 안 쓰는 습작 같은데다가 먼저 연습을 해 봐야겠다."
"좋은 생각이야. 리사치, 사랑노래 응원할게."
"사랑노래를 쓴다고 확정난 건 아닌데…"
연애상담에 거의 근접한 이야기였지만, 그 맥락 속에서 다행이도 히나는 리사에게 누구를 좋아하는지, 노래를 전할 사람이 있는지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그 점이 리사가 히나를 편하게 여기는 이유기도 했었다. 너무 성가실 정도로 깊이 파고들지 않되, 예리하게 요점만 집어준다. 자신도 마당발에다가 오지랖도 넓다 보니 친구들의 연애 상담은 몇 번이고 들어준 적이 있었지만, 남의 일에 밝아지면서 자신이 선을 넘지 않는가 고민할 필요 역시 늘어났다. 때로는 적당한 거리감이 더 편하다는 것은 좀처럼 마음을 터놓으려 하지 않는 제 소꿉친구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마음에 닿으려고 애쓰는 자신은 불필요한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도 누구를 위해서 이 가사를 쓰고 싶은가부터가, 히나의 말, 그리고 유키나의 의지를 생각하면 거대한 아이러니가 아니었는가.
"그럼 난 밥 먹으러 먼저 가 볼게."
히나는 경쾌하게 손을 흔들고는 교실에서 뛰어나갔다. 또 천문부에서 혼자 밥을 먹을 생각인 걸까. 아니면 도시락통을 빼먹어서 사요가 또 챙겨주려 나온 걸까. 리사는 자신도 도시락통을 꺼내려다가 문득,
'앗,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마음을 먹었으면 뭐라도 작업해야 해.'
결심한 바를 헛되이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바로 노트를 펴고 펜을 쥐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한 줄 한 줄 그럴듯한 가사를 써내려간다. 멜로디로 삼은 것은 유키나가 언젠가 만들었던 습작이었을까. 하지만 성에 차는 가사는 영 나오질 않았다. 아까 히나한테 들은 말 때문이었을까. 어느새 노트는 쫙쫙 그은 검은 선들과 지운 자국으로 가득차고 말았다.
"정말……. 이래서는 Roselia에 도움이 된다는 목표조차 달성하지 못하겠는걸. 그보다 유키나한테 내가 이런… 앗, 나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리사는 홧김에 가사를 쓰던 종이를 노트에서 찢어내 작게 접어 책상 밑에 넣어버렸다. 흔한 말밖에 쓰지 못하는, 아무런 결의도 담지 못하는 밋밋한 사랑노래. 유키나가 그렇게나 싫어하는 상업음악의 전형. 그런 것밖에 쓸 수 없음을 유키나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Roselia에 자신이 다른 멤버들만큼이나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 모습은 보여야 했는데.
"리사, 뭐하고 있어?"
아니나 다를까, 그 고민을 하고 있으니 바로 뒤에서 생각의 주인공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좀처럼 감정이 실리지 않는 차분한 저음의 목소리.
"유키나? 언제 온 거야?"
"점심때인데 같이 먹으러 안 찾아와서 무슨 일 생겼나 했어."
"아, 그게, 다음 시간 숙제를 안 해서 점심시간에 하려고."
유키나는 리사를 빤히 쳐다봤다. 리사는 애써 눈을 피했다. 리사도, 유키나도 서로를 보면서 서로답지 않다고 느꼈지만 속으로만 생각했다. 학교에선 성실한 리사가 숙제를 빼먹는다고? 유키나가 점심시간에 먼저 찾아오고, 같이 밥을 안 먹는 것에 아쉬움을 표한다고? 명색이 소꿉친구인 것 치고는 중간에 서로 멀리하던 시간들이 있어서 아직 서로 모르는 것이 산더미였지만, 그래도 늘 보는 사이에서 보이는 패턴을 벗어나는 행동에는 이유가 있으리라는 짐작이 오갔다.
"리사, 혹시 힘든 일 있어?"
"별 일은 아니야. 그냥… 왜, 걱정돼?"
"리사가 없으면 안 되니까."
표정도 변하지 않고 사람 설렐 말을 하는 유키나였다.
"숙제, 힘들면 도와줄게."
"아, 아냐, 됐어. 혼자 안 하면 의미가 없는데다 유키나까지 내 일로 고생시키고 싶진 않은걸."
유키나가 리사의 책상 서랍 쪽으로 손을 뻗자 리사는 황급히 이를 저지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유키나에게 자신의 처참한 작사 실력을 보였다가는 면목도 염치도 없었으니까.
"리사는 이런 데서는 정말 꾸준하네."
"그나저나 유키나가 먼저 밥 먹자고 찾아와주다니… 나 엄청 기뻐."
그 기쁨은 솔직한 본심이었지만, 그것을 다른 본심을 숨기기 위해서 입에 담으니 왠지 핑계 같아서 리사는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렇지만 유키나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리사의 책상 앞 의자를 끌어놓고는 자기 몫의 도시락통을 책상 위에 폈다. 그에 따라서 리사도 자기 도시락을 꺼냈다. 오늘의 반찬은 유키나도 좋아하는 달달한 양념이 일품인, 리사의 수제 고기감자조림이었다.
"아 맞다, 유키나. 혹시 안 쓰는 노래 있어?"
"안 쓰는 노래라니?"
"Roselia의 정식 곡으로 안 쓸 습작이나, 뭐 그런 거. 다른 게 아니라 베이스 연습 좀 하고 싶어서." 조린 고기 몇 점을 유키나의 도시락 위에 올려놓으면서 리사는 덧붙였다. 연습은 연습이지만 베이스 연습은 아니었다. 또 유키나에게 거짓말을 해 버린 리사였다.
젓가락으로 밥과 함께 리사가 준 고기조림을 집어먹던 유키나의 손이 거기에서 멈췄다. 리사의 입에서 습작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바로 생각난 곡이 있었다. 어째서 하필 그 곡이, 하는 일말의 당황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얼굴 근육에서 에너지를 빼면서 유키나는 말했다.
"딱히 습작 같은 건 없어." 당연히, 이쪽의 말도 거짓말이었다. 습작이라면 당연히 하드디스크에 나뒹굴고 있는 것만 해도 꽤 있었을 것이다. 단지 그 중에는 체면을 이유로 도저히 공개하지 못할 것들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 곡'만큼은 절대로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구나. 아쉽네. 요즘 Roselia에 어울리는 연주는 어떤 건가 고민하고 있었어서, 아, 혹시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조금-"
"그렇다면 더더욱 습작에서 찾아선 안 될 거야. Roselia는 항상 준비만반이어야 하니까, 완성작이 아닌 건 무의미해."
리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유키나는 딱 잘라 말했다.
"아, 그, 렇네.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말을 더듬다가도 성의를 거절당하는 건 익숙하다는 듯 이내 입으로만 미소를 지어보이는 리사를, 유키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바라봤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평생 전하지 못할 선율과 그 이상으로 전하기 힘들었을 본심들이 팽팽 맴돌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준비하고 있던 것을 없는 것처럼 숨기는 치킨게임 속에서, 둘은 말없이 도시락만 나누어 먹었다. 한동안 안 그러다가 간만에 찾아온, 어색한 점심시간이었다.
"리사."
식사도 끝나고 곧 점심시간이 끝나갈 때쯤, 유키나는 무의식중에 이름을 불러본다.
"응? 유키나?"
바로 돌아오는 대답. 그렇게 이름을 부르면 항상 제게 향하는 시선과 목소리. 제 곁에 따라붙는 따스한 존재감이 그저 좋아서 찾고 또 불러보는 것인데, 그 이유가 너무도 가냘프고 무른 것이라는 생각을 유키나는 지울 수 없었다.
그냥 불러봤어. 리사가 이름 불러줄까봐. 그 말 하나를 못 해서.
"잘못 들었나? 아, 이제 곧 수업이지. 그럼 학교 끝나고 볼래? 오늘은 연습 있어?"
그 말 하나를 쉬이 못 해서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게 만들고는, 거기에서 위안을 찾는 얄궂은 허세를 쉽사리 내려놓지 못하는 유키나였다. 평생 공개하지 못할 선율을 머릿속에서 치워버리려고 애쓰며, 유키나는 조금 빠른 발걸음으로 교실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쭉 바라보고 있던 리사는, 유키나의 발소리가 인파의 소리에 묻히자마자 책상 서랍 속의 찢어낸 노트를 그대로 휴지통에 넣어버렸다.
영원한 습작과 어울리지 않을 가사. 마음을 엇갈리는 것조차 두려운 나머지 담아두기로 한 짝사랑들은 오늘도 잠든 채였다.
*
이마이 리사가 작사 콘테스트에 신청서를 낸 건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비록 첫 시작은 비틀거렸지만 이왕 결심한 거 일단 해볼 수 있는 건 해보자는 심정으로 리사는 도전장을 낸 것이다. 명색이 Roselia의 일원이라면, 정점은 무리라도 입상은 노려보는 것이 도리였다. 리사는 그 이후로 항상 펜과 노트를 가지고 다녔다. 쉬는 시간에도, 댄스부 활동을 위해 연습실에 갈 때도, 그리고 지금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스프링 노트와 볼펜 하나를 꼭 챙겨 향했다. 하지만 좀처럼 가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노트를 펴고 펜을 쥔 순간 단어 하나조차 되지 못한 선들이 뱅뱅 돌거나 쭉쭉 그어져 낙서로만 남기 마련이었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노트는 어느새 줄 바깥 귀퉁이만이 쓸데없이 귀엽고 멋들어진 낙서로 장식되었다.
"오오, 리사 씨, 뭔가 안 써지는 건가요?"
"모, 모카?"
그 때 불쑥, 리사의 등 뒤편에서 노트에 고개를 뻗어 쭉 바라보는 시선이 치고 들어왔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같이 하는 후배, 아오바 모카였다. 모카는 리사의 노트 맨 위 여백 낙서 속에서 '목표는 가사 콘테스트 입상!' 이라고 쓰여진 글씨를 빤히 쳐다보더니, 리사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는 바로 느릿느릿한 말투로 말을 꺼냈다.
"……그렇네요 그렇네요. 그럼 모카쨩도 도와줄까 한답니다. 리사 씨에게는 전에 알바 빠졌을 때도 신세를 졌으니까."
"아하하, 많이 안 풀리는 티 났나. 그럼 모카가 좀 도와줄래?"
"물론이에요. 물어볼 거라면?"
"모카는 가사 써 본 적 있어?"
"아뇨. 모카쨩은 낡고 지쳐서 그런 거 못 해요."
농담 삼아 이야기했지만 정말로 모카는 가사를 써본 적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니 자신이 직접 가사를 쓰는 것은 아니라도, 자기 밴드나 주변에 있는 다른 밴드의 작사 담당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까지는 할 수 있다고 모카는 전했다.
"저희 Afterglow는 란이 가사를 써요. 모카쨩은 빵이 없으면 머리가 안 돌아가는데, 빵을 먹으면 빵에 대해서밖에 생각할 수 없어져서 가사가 빵으로 가득 차버린답니다. 그래서 대신 란이 써줘요."
"아하하, 그렇구나. 그러면 란한테 이야기해볼까? 근데 내가 물어봐도 괜찮아?"
란이라면 분명 Afterglow의 보컬, 미타케 란을 말하는 것일 터다. Roselia와 라이브하우스에서 만나기만 하면 유키나와 절묘한 신경전을 벌이는데다, 그 때 본 모습과 모카의 이야기를 조합하면 꽤 숫기 없는 성격으로 보이는지라 자신이 끼어들어도 될 일인지 리사는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물어보면 허락해줄 거라고 모카쨩은 생각한답니다."
예상외로 모카는 확답을 해 왔다. 잘 아는 소꿉친구의 일이라서 쉽게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그 생각을 하니 리사는 또 유키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모카와는 자주 서로의 단짝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또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다는 것 또한 서로가 잘 알았다. 그것은 비슷한 처지라서 생기는 무언의 공감대였다.
"응. 그러면 내일모레쯤에 약속 잡을까?"
리사가 그렇게 묻자, 모카는 잠시 멍하니 말없이 있었다. 이번 주는 일정이 안 되나? 하고 되물으려던 찰나 모카가 리사한테 던진 질문은 뜻밖의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죠. 평소에 작사하는 사람이라면 미나토 씨도 있잖아요? 왜 미나토 씨에게는 물어보지 않는가요?"
"그건… 밴드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 하는 건데, 모두를 놀래켜 주고 싶기도 하고… 나도 밴드 일에선 유키나한테 의지만 하고 싶진 않고…"
리사 자신이 생각해도 교과서 같은 대답이었다.
"정말로 그것뿐인가요?" 믿지 못하는 듯이 모카는 되물었다.
"아, 그러니까, 나도 모카처럼 뭔가 하나에 대해서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거기서 헤어나오질 못해. 예를 들어 난 과자 만드는 걸 좋아하잖아? 그래서 다음 연습 때 간식으로 뭘 만들어갈까 생각하다 보면 거기에만 꽂혀버린다고. Roselia가 과자 만들기에 대해 노래를 부르면 이상할 거 아냐?"
"으음, 그런가요? 모카쨩은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요."
그 때 모카가 눈을 살짝 감으며 씨익 웃는 것을 리사는 놓치지 않았다. 어떻게 다들 이렇게 속내를 숨길 수 없는 사람들 투성이일까. 한편으론 그게 다행이라고도 생각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리사는 자신이 굳이 빙빙 돌아가면서 말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지를 다시금 재고해 볼 필요를 느꼈다.
"Afterglow의 노래에 Roselia의 가사를 붙이면 어색할 거 같지?"
"별로 어색하진 않을 거 같아요. 란이나 토모찡은 꽤 그-런 느낌이니까."
"그러면 Roselia에게……. 저기 TV에 나오는 Pastel*Palettes의 노래를 시킨다고 생각해봐. 안 어울리지 않아?"
리사는 편의점에 설치된 TV를 가리키며 말했다. 때마침 TV에서는 한창 인기몰이를 하는 중인 아이돌 밴드 Pastel*Palettes의 무대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카는 거기에 잠시 눈길을 주더니,
"와-, 미나토 씨가 슈와- 슈와- 하고 스크리밍을 하나요? 언제 한번 보고 싶어요. 슈와슈와악 슈와슈와악-"
모카는 편의점의 바코드 기기를 마이크처럼 쥐고는 거친 창법을 흉내내면서 노래를 따라불렀다. 전혀 유키나와는 닮지 않았을뿐더러, 모카의 힘 빠진 목소리와는 완전한 부조화를 이뤘다. 리사는 그것을 보면서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시간엔 손님이 아무도 없는 게 다행이었다.
"모카, 그거 유키나 하나도 안 닮았어. 게다가 마지막은 너희 노래잖아."
"그래요? 모카쨩 성대모사 대실패-. 아쉽네요. 다음 기회에."
"아냐아냐. 그래도 웃겼으니까 합격이야."
"감삼다-."
다시 평소의 늘어지는 톤으로 돌아온 모카는 몇 번 음음, 음 하고 목을 가다듬고서 하려던 이야기로 들어갔다.
"어쨌든 요점만 말하면 어울리는 게 꼭 분위기 잡는 걸로 결정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게, 자기 마음을 가사로 전하는 거? 이 이상은 말했다간 란한테 혼나니까, 다음에 만났을 때 물어보면 좋다고 모카쨩은 생각합니다."
"그럼 일단 콘테스트에 가사부터 내 보고 생각해봐야겠어."
리사는 결심과 함께 노트를 닫아 가방에 넣었다. 타이밍 좋게 손님이 편의점으로 들어왔다. 리사도 모카도 어느새 성실한 아르바이트생의 모습으로 돌아가 물건을 계산할 준비를 했다. 손님이 살 물건을 집어 돌아오기 전에 모카는 리사에게 귓속말로,
"가끔은 뻔한 말로 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도 있답니다."
그런 말을 전했다. 그 한 마디는 리사의 뇌리를 몇 번이고 맴돌다가 어느새 작지만은 않은 걱정에 삼켜져 사라졌다.
일이 끝나고 하늘도 슬슬 어둑해질 때쯤 집에 돌아온 리사는 다시 노트를 펴고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중간에 버리지 않고 쭉 써보는 것을 목표로 삼아, 생각나는 대로 노트에 써보기로 한 것이다. 손에 쥔 펜을 갖가지 색깔로 바꿔가며 줄도 쳐 보고, 스마트폰 브라우저에는 열 개는 족히 되는 탭을 띄워가며 되는대로 작법을 찾아 헤맸다. 소중한, 동시에 엄격한 그 사람을 위한 곡이니까 경험자나 전문가의 자문도 구해보면서 차근차근 쌓아나가야 할 시점이지만, 왠지 혼자서 답을 찾아보고 싶었다.
가사 콘테스트의 과제곡으로 주어진 곡은 총 다섯 곡이었다. 하나하나 귀를 기울이며 들으면 분위기가 대강은 상상이 갔다. 리사는 아코와 함께 대회를 나가기 위해 댄스부에서 안무를 짜던 때를 생각해보았다. 머릿속에 동작이 하나하나 그려지는, 발랄하거나 경쾌한, 혹은 힘 있는 멜로디들도 있었다. 보통은 그런 곡들을 즐겨 들었었지. 그러나 Roselia는 그것보다는 좀 더 격조 높고 강렬한 분위기의 곡들을 연주해왔다. 그런 분위기의 곡이 있을까, 하고 샘플 구간을 돌려 들으며 흥얼거려 보기를 몇 번. 마침내 리사가 선택한 곡은, 항상 무게감 있던 Roselia의 분위기와는 조금 동떨어진 잔잔한 락 발라드였다.
"Roselia도 이런 노래 있으면 좋을까-. 잔잔하고 좋고."
그런 바람은 아마, 유키나에게 말하면 기각당할까. 일단은 유키나의 꿈을 위해서, 그녀의 웃음을 되찾기 위해서 밴드에 있는 것이었으니, 자신의 생각쯤은 굽힐 수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오래 전부터 친하게 지냈는데도 이런 것 하나 전할 수 없는 마음이 속상했다. 보고 싶은 사람, 뭘 해도 좋은 사람, 하지만 오늘따라는 왠지 아주 조금 어리광도 부려보고 싶은 사람. 그 기분을, 애달프고 감미로운 멜로디를 흥얼거리면서 또박또박 노트에 써내려간다. 펜을 든 손이 술술 움직였다.
"어?"
몇 번 흥얼거리며 소절에 말을 맞추고 이어가기를 몇 번, 젖어있던 감상으로부터 깨어나 눈치를 채면 어느새 1절 가사가 완성되어 있었다. 이걸로 조금 용기가 났다. 2절까지는 마무리 짓고 자기로 리사는 결심을 굳혔다.
"음, 음음, 느낌 좋은데. 언젠가 유키나한테도 들려줄 수 있을까, 이거."
창문 하나의 거리. 바로 만날 수 있지만 마음으론 아직 먼 그 사람을 그리면 그릴수록, 그 좋았던 느낌이 점점 종이 위 글씨로 퍼져나갔다.
*
유키나는 오늘도 집에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작곡하던 노래 파일들을 점검했다. 리사한테는 없다고 말했던 습작들은 언제나처럼 하드디스크에 상주하며 유키나가 다듬어 의미있는 노래로 만들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떠오르는 악상을 정리했을 뿐인 것이기에 곡의 개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완성의 멜로디 조각들. 유키나는 문득 리사가 습작을 보여달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당연 베이스 연습용으로 쓰기에도 너무 짧은 길이였으니,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말은 딱히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곡들 중에서도 유난히 길이가 긴 곡이 딱 하나 있다는 건, 절대 리사에게는 밝힐 수 없는 것이었다.
옛날부터 전하고 싶었던 마음.
방금 떠오른 '전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말을 되뇌어본다. 참으로 흔해빠진 말이었다. 자신이 깔보던 유행가들과 다르지 않은, 기교도 딱히 없는 단순한 멜로디를 몇 번이고 다시 들어본다. 확실히 따라 부르기는 쉬웠지만, 그것만으론 맥아리가 없었다. 그런 말을, 그런 별 거 아닌 생각을 노래로 만들어 부른다니, Roselia가 쌓아온 격에 어울리지 않는 짓은 안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리사를 향한 제 마음은 고작 그 정도로 끝날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편하게 그 파일을 지워 버렸어도 됐는데. 어째서 자신은 이걸 묵혀두고 있는 것일까. 들려줄 생각도 없으면서.
"리사, 나는 왜……."
당연히 그 크기의 목소리로는 들을 리 없는, 창문 하나 거리의 이름을 부르며 유키나는 계속 곡을 다듬었다. 성에 차는 멜로디가 나오지 않았다. 좀 더 변곡점을 만들어두려 했을 때는 원래의 곡조를 알아들을 수 없게 되어버렸고, 끝내 유키나는 그 변경점을 저장하지 않고 그대로 폐기하게 되었다. 작곡할 머리는 돌아가지 않지만 콕 찌르듯 아린 건 머리보다는 가슴 한구석이었다. 꽉 막힌 듯이 가슴이 답답하고, 그 속에서 몽글몽글 피어올라 뜨뜻한 김으로 화하는 감정이 있었다.
"아, 아아, 음, 음…"
먼 옛날 아버지의 노래를 불러도 되는가를 고민할 때 들었던 조언.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부르면 된다는 말. 지금의 감정은, 흥얼거림은 분명히 멜로디로 승화할 수 있을 것이지만, 뭘 해도 뭘 해도 멋없는 단조로운 멜로디와 코드로 남아버렸다. 가슴이 아팠다.
"지금 부르고 싶은 곡에는, 그런 결의도 성의도 없는데도…"
그 때 유키나는 궁금해졌다. 곡의 성의는 무엇으로 결정되는 거지?
*
"사요, 잠깐 이야기할 게 있어."
"연습 중이었습니다만 용건이라도?"
휴대폰의 메신저 앱으로 자신과 제일 비슷한 고민을 거쳐왔을 법한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내면, 성격답게 정중한 말투의 답장이 왔다. Roselia의 기타리스트 히카와 사요, 그녀는 제일 내밀한 고민을 가지고서 제일 진솔하고 결의 가득한 노래를 자아내게 만들어준 밴드의 또다른 기둥이었다. 또한 평가에는 가차없고 자신처럼 눈도 높아서, 음악에 대해서라면 제일 조예 있고 객관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기도 했다.
"잠시 기타리프 짜는 것 좀 도와줄 수 있어? BPM이랑 코드는 보내 줄 테니까, 거기에 맞춰서."
물론 유키나는 사요에게 지금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던 물건을 보낼 생각은 없었다. 파일 이름부터가 어디에 내놓을 건 절대 안 되었다. 적어도 그 이름의 주인에게 보여주기 전에는.
"웬일로 이번에는 장조로 시작이네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 그 정도로 갑작스런 감정이었던 건 사실이다.
"어쩌다보니… 뭐, 새로운 시도는 언제나 좋지요."
Roselia의 음악에는 다소 생소한, 미디엄 템포의 밝은 장조 음악.
지극히 일부에 불과한 정보만을 사요에게 전해주고서, 유키나는 침대에 누웠다. 작업이 안 풀릴 때면 으레 나오는 유키나의 버릇이었다. 침대 옆 간이 탁자에 놓인 유리 사탕통에서 과일 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넣고서, 애용하는 고양이 쿠션을 꼭 끌어안았다. 조금 따뜻해진 머리와 두 뺨을 쿠션에 묻고 열을 전이시키고 있다 보니 쿠션의 섬유유연제 향이 밀려왔다. 푹신한 촉감이 꼭 그 사람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것도 같았다. 그러고보면 어릴 때는 갓 빨래한 옷을 입고서, 그 때도 길었던 머리에 화관을 얹어주곤 했었지. 꼭 꽃향기를 닮은 향. 그 그리운 향에 유키나는 이 쿠션이 리사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 몽상은 잠시 후 사요로부터 온 메일의 알림에 확 깨져 현실로 유키나를 돌려보냈다. 두 뺨이 꽤 오랫동안 화끈거렸다.
"간단하게 짜 봤어요. 이런 분위기에는 좀 더 따뜻하게 감싸주는 듯한 멜로디가 좋을 것 같아서, 평소 곡들처럼 화려한 속주는 아니겠지만, 이런 느낌으로 괜찮을까요?"
유키나는 헤드폰을 끼고서 사요가 보낸 메일의 첨부파일을 내려받아 재생했다. 잔잔한 기타 소리가 코드에 맞춰져 귓가에 부드럽게 울렸다. 그리 복잡하지 않은 앞마디의 기타 소리는 평소의 사요다운 거센 질주감은 없었지만, 대신에 착착 감기는 느낌이었다. 마치, 좀 더 여유를 찾은 그녀의 모습을 반영하기라도 하는 듯이.
"너는 이걸로 괜찮겠어?" 유키나는 사요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글쎄요, 이 곡조라면 기타보다는 베이스라인이 더 두드러지는 느낌도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 말을 본 유키나의 손가락이 멈췄다. 마치 더 깊은 곳에 있는 생각을 찔려 끄집어낸 것처럼. 리사를 빛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 항상 따스한 햇살처럼 받쳐주고 있어서, 그 감사함을 눈치채기조차 힘든 온기. 그녀가 늘 비춰주던 빛을 이번엔 리사 자신에게도 스포트라이트로써 주고 싶었다. 간단한 멜로디는 리사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기 위해 조성한 것이기도 했다.
"그보다 이 곡, 뭘 전하고 싶은 곡인가요?"
잇달아 메시지 창에 올라온 사요의 질문들은 죄다 정곡을 찌르고 있었지만, 유키나는 달리 대답할 방도가 없었다. 리사를 생각하면서 만들었어, 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비밀이야."
"뭐, 억지로 말하라고 하지는 않을 거예요. 다만, 미나토 씨는 가끔씩 저희가 어떻게 하길 바라면서, 정작 미나토 씨 본인이 솔직해지지 않을 때가 있으니까요. 그게 가끔은 걱정이 되어서요."
"고마워, 사요. 너무 걱정은 안 해도 돼."
전보다 조금 유해진 말씨로 사요에게 대답한 후, 유키나는 고맙다는 말을 다시 곱씹어본다. 그런 감정들 하나하나를 단순한 말 이외로 노래에 녹여낼 언어가 그렇게나 고팠다. 거짓말을 못하는 히카와 사요. 그녀가 상대라면 조금 더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항상 언어를 고르고 골라 말을 하되 한 치의 거짓도 입에 담지 않는 그녀의 정제되고 절제된 말씨가 과연 어떻게 나오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기타를 연주하고 가사를 쓰는 데까지 이어지는지. 사요와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것이 항상 의문이었다. 한때는 유키나 자신과 동류라고 생각했던 사요도 지금은 멀어만 보였다.
"신곡을 고민하고 있는 거라면 도와드릴 수 있는 데까진 도와드릴게요."
"아냐."
"아니라는 건?"
"절대 Roselia에서 이 곡은 연주하지 않을 거야."
그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유키나는 휴대폰을 침대 옆 충전기에 연결하고, 방 불을 끄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오늘은 작업은 무리였다. 자기가 생각해도 사요에게 투정을 부리는 형태가 되어버렸지만, 아직 유키나에겐 본심을 숨기는 것보다 투정부리는 것이 쉬웠다. 그래도 자기 전에는 고민의 근원이 된, 하지만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창문 너머의 얼굴을 한 번만 더 떠올려본다.
"리사, 네게 내 마음이 닿을 수 있을까……."
같은 마음이지만 결코 공명하지 않는 연모의 편린. 그것이 또다시 사무쳐왔다.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뭐라도 하려고 일어났다가는 이 멋없는 멜로디를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을 것이 뻔했으므로, 유키나는 베개로 귀를 막았다.
*
간만에 유키나는 어린 시절의 꿈을 꿨다. 잠을 설치지 않아도 되는 안락한 꿈 속 풍경이었다. Roselia에 자리를 잡은 이후로는 옛날로 돌아가는 꿈은 거의 꾸지 않았다. 여전히 아버지와 음악을 하던 시간은 소중하고, 떠올리면 조금 가슴아릴 정도로 그리울 때도 있지만, 동료들을 찾고 유키나 자신의 소리를 찾은 이후로는 더 이상 얽매일 필요가 없는 과거의 보금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 과거와 지금을 이어주는 단 한 사람이 있었다.
이마이 리사.
창문 하나를 두고 리사에게 노래를 불러주던 시절. 유키나는 말이 없는 아이였지만 노래로 말보다 많은 것을 전해왔었다. 그 때는 참으로 실없는 것들에 대해 노래했었다. 길 가다가 만난 고양이가 귀여워서 쓰다듬어 보겠다고 쫓아다니다가 넘어진 건에 대해서, 아버지를 따라서 처음 마셔본 블랙커피의 쓴 맛과 입가심으로 먹은 사탕에 대해서, 그런 자잘한 사건들로 노래를 만들어 불렀고, 그때마다 리사는 유키나의 재밌는 일화들이 노랫가락에 실리는 것을 귀담아 들었더랬다. 그 중에서는 리사의 베이스에 대한 노래도 있었다. 베이스는 무겁고 베이스 줄은 두껍고, 항상 두꺼운 줄을 퉁기는 리사는 손이 아프지 않을까, 하지만 멋진 소리를 내는 리사는 굉장해, 아마 그런 두서없는 가사들이었을 것이다. 머나먼 무의식 속에서 어리고 또 어리숙하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유키나, 다음에도 노래 들려줘!"
자신이 노래를 끝마치면 리사는 항상 다음을 기다렸다. 유키나의 표현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힘쓰면서, 그것을 다 받아주기 위해 근음을 연주하기를 택한 그녀.
노래를 부를 때의 자신은 그렇게나 솔직했는데. 그 때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이렇게 솔직하게 전할 수 있었던 걸까. 그리고 지금은 그 때 불렀던 노래들을 부끄럽다고 치부해버리는 자신은.
마음을 전하고 싶지만, 전하고 싶지 않다. 완벽해지기 전에는 전하지 말아야 한다는 철칙. 그것이 또다시 애정의 터전을 잃어버릴 때를 대비한 방호책이었다. Roselia는, 그리고 그 안의 이마이 리사는 유키나가 가까스로 되찾은 애정의 터전이었고, 애정이 순환하기 위해서는 탄탄한 기반이 필요했다. 정점에 다다르기 전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지극히 사소한 감정들. 옛날처럼 실없이 운율조차 맞지 않는 가사와 급조한 멜로디로 노래를 부를 때가 아니었는데.
그렇지만 지금은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
라이브하우스 CiRCLE에 딸린 연습실에는, 평소 다섯이서 모였을 때와는 사뭇 다른 소리가 들렸다. 쉬는 시간 짬을 내서, 리사는 악보도 보지 않고서 베이스로 들어본 적 없는 코드를 연주하고 있었다. 무언가 이어지지 않는 노랫말의 파편들을 흥얼거리면서 베이스 줄을 튕기는 그녀는 Roselia를 위해 힘쓸 때의 성실함과는 다른 느긋함과, 약간의 공상에 젖어 있었다.
그 맞은편에서, 유키나는 그 광경이 끊기지 않도록 가만히 접이식 의자에 앉아, 리사가 연주하고 있는 베이스 소리에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아, 유키나."
유키나가 듣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는지, 리사는 바로 연주를 멈추면서 유키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계속해도 돼."
"아, 아니, 별 거 아니었어."
"베이스 연습할 곡 찾았구나."
"아, 뭐, 손도 풀 겸 그렇게 됐어."
리사는 연주에 거슬리지 않도록 옆머리를 쓸어넘기고는 다시 베이스를 잡았다. 유키나가 옆에 있는 것이 방해가 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매끄럽게 코드를 연주해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는지 조금씩 실수를 했다.
"내가 보고 있으니까 긴장돼?"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 말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럼 좀 쉬어도 괜찮아."
유키나는 리사의 옆에 접이식 의자를 가져와서 놓고 그대로 앉았다. 가까이 앉았지만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둘 다 서로를 힐끗힐끗 보다가, 다시 눈을 돌리면서 살짝 달궈지는 두 뺨이 식기를 바라며 침묵을 연장시켰다.
"역시 린린이야! 이걸로 연주 동영상 같이 찍자."
"아코쨩이 좋아해주니까 기뻐…. 둘이서도 연주할 수 있게… 어레인지 해 봤어."
"아, 나도 드럼 어레인지 해 왔는데, 조금 봐줄 수 있어?"
그들과는 반대로 건너편 자리는 재잘재잘 이야기 소리가 가득했다. 같은 밴드의 멤버, 우다가와 아코와 시로카네 린코가 이어폰을 나눠 끼고서 한껏 떠들고 있었다. 아마 요즘 하는 게임에 악기 연주 시스템이 생겨서, 그것을 위해서 전용 악보를 작성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코랑 린코는 오늘도 사이가 좋네."
"그러게."
"또 게임에서 뭐 만들어서 준 건가보다."
"그런가보다."
상황에서 이야기를 급히 파생시킨 리사의 말에, 유키나는 그저 수긍하는 것 이외에는 하지 않았다. 한편, 서로의 영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아코와 린코 두 사람은 너무나도 편안해 보였다. 겉보기에는 말하는 투도 성격도 한참 달라 보였는데, 대화를 할 때면 항상 끊기는 일 없이 쭉쭉 잘 이어나가고 있었다. 단순히 관심사가 같은 것 때문일까? 그 두 사람이 터놓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뒷부분이 너무 복잡한데. 이렇게 하면 미디에선 소리가 겹쳐서 생략되니까, 조금 더 깔끔하게 다듬을 수 있을까?"
"알았어. 고마워, 린린. 그러면 여긴 두두두둥! 이 아니라 두둥! 으로."
"아코쨩은 항상 리듬게임 채보 따듯이 드럼라인을 짜는데, 난 그게 아코쨩답고 개성적이어서 좋아."
"나도 린린이 짜는 피아노 멜로디는 딩디디딩- 하는 느낌이 좋아!"
더군다나 그들이 나누는 것도 음악의 한 부분들이었다. 게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악보를 짜고 서로 나눠 듣는 것. 그저 가볍게. 실없이. 유키나라면 아마 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저 둘이 Roselia의 뜻에 소홀한 것도, 음악을 가벼이 다루는 것도 아님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는.
"저기, 유키나." 리사가 떠올린 바가 있는지 먼저 말을 꺼냈다.
"응?"
"만약에 내가 네게 저런 식으로 뭔가 만들어준다고 하면, 넌 어떨 거 같아?"
"평소에도 리사는 많이 하고 있잖아. 도시락도 챙겨주고, 과자도 만들어주고. 더 받으면 과분할 지도 몰라."
"음, 그런 것보다 좀 더……. 특별한 걸 해준다면 어떨 거 같아?"
"기쁠 거야."
"정말로? 만약에 성에 차지 않거나, 어쩌면 유키나의 결심이랑 반대로 가는 무언가더라도 괜찮을까?"
"…리사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정적. 이야기는 같은 자리를 맴돈다. 리사는 아하하, 하고 예의 그 멋쩍은 웃음만을 지었고, 평소라면 유키나가 건성으로 대답하더라도 이어지던 말이 그 자리에서 마침표와 말줄임표의 향연으로 남았다. 그래도 자신이 유키나에게 기대받고 있고, 또 신뢰받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던 게 다행일까. 하지만 그만큼 리사는 유키나를 거스르기가 두려워졌다. 그녀가 생각하는 이상에, 자신이 표현하고픈 마음이 부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Roselia는 유키나가 그렇게 잃고 싶지 않아하던 보금자리였음을, 그녀를 어릴 적부터 봐왔던 리사는 아주 잘 알았다. 가사가 완성되면 제일 먼저 유키나에게, 그리고 Roselia에게 보여주겠다고 결심했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밴드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되어버린다면. 그리고 그 근원이 유키나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라면, 결국 그 마음으로 밴드에 남아있는 리사 자신은 크게 길을 잘못 든 것일까. 고민이 계속 이어졌다.
한편 유키나는 리사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는가를 그 표정에서 읽어내려고 했다. 잘못한 것이 있더라도 리사는 아마 말해주지 않을 것이었고, 그것은 유키나가 리사를 몰아붙이는 결과가 되고 있는 것까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접근해야 리사의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을지 유키나도 잘 몰랐다. 상호 소통에는 서투른 자신이었으니까.
하여간 리사도, 유키나도 그 순간만큼은 마찬가지로 가까이 붙은 자신들이 어지간히도 답답하게 있음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 준비한 것들도 있는데 이리 쉽게 나누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말로 전하지도 못하고. 언어란 이렇게나 불완전한 도구였는가, 하는 한탄이 작게 마음속에 일었다.
"린린, 정말 좋아해!"
"응… 고마워. 나도 아코쨩이랑 쭉 연주하고 싶어. 오프에서도, 온에서도."
유키나와 리사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애정어린 말들을 숨 쉬듯 주고받는 건너편의 둘을 쭉 지켜보면서, 침묵 속 둘은 편안한 마음으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감각일까를 가늠해보았다. 어린 시절, 아직 얼굴이 따뜻해지는 감정을 몰랐을 때에나 그랬지, 조금 머리가 굵어지고 나니까 그 머리 굵기만큼 벽을 두껍게 세워 말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바빴다.
입이 텁텁하게 말라들어가는 게 느껴져 리사는 물병을 찾아 가방을 뒤졌다. 몇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지기를 기대하던 그 때, 리사는 항상 제 곁에 있어야 할 물건이 없는 것을 눈치챘다.
늘 가사를 쓰던 그 노트가 없다.
"아, 잠깐만……."
아닐 거야, 모르고 빼먹었을 수도 있으니까, 리사는 몇 번이고 가방을 뒤졌다. 교과서와 다른 노트 두어 권이 든 곳은 물론이고 가방 앞쪽 지퍼며 평소엔 안 쓰는 공간까지 샅샅이 뒤졌다. 그래도 없었다. 평소에 준비물 체크는 꼼꼼히 해왔으니까 실수할 리는 없었고, 중요한 건 항상 가지고 다녔으니 없어지면 대번 알았을 텐데, 아무리 찾아도 노트는 보이지 않았다.
"이거 큰일이네… 거기다가 다 써 놨는데."
난처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리사의 앞에, 무언가가 내밀어졌다.
"리사, 이거."
"유키나?"
설마. 리사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지금 상황에서 제일 뜻밖의 상황이자 내키지 않는 상황. 하지만 Roselia 안에서 같은 학교를 다니는 건 리사와 유키나 두 사람 뿐이었고, 오늘은 댄스부 활동도 없으니 아코의 가방에 섞여 들어갔을 리도 없었다. 이 안에서 주웠다면 유키나가 주워서 주는 게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 가능성이 지금은 불안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아."
역시나 불안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유키나의 손에 들린 것은 리사가 가사를 써 오던 그 연습장이었다.
어쩌다가 유키나가 그걸 갖고 있는 거지. 찾아줘서 고마워, 라고 먼저 말해야 할 때였는데, 말보다 짧은 탄식이 먼저 나왔다. 설마 유키나에게 준비하고 있던 것을 들킨 것일까. 리사의 심장소리가 가파르게 뜀박질했다.
"수학 수업 자리이동 때 떨어뜨렸길래 주웠어."
"그, 렇구나."
"내, 내용은 안 봤어."
"어, 어차피 별 거 없어. 다음 국어 수업 숙제가 없어져서 찾아다녔는데…. 유키나가 주워줬을 줄이야. 응. 고마워."
평소처럼 감사하지도 못하는 이상한 마음. 유키나에게 그저 미안함만이 더해지고 있는 동시에, 소중한 사람 앞에서 외려 도망치거나 숨고 싶다는 감정이 처음으로 들었다.
잘못된 영감은 어딘가에 격리해둘 수만 있으면 좋겠는데.
"리사? 괜찮아?"
"아무것도 아냐."
"오늘 연습은 쉴까?"
"아니, 할 수 있어."
그래, 이럴 때일수록 연습에 더 매진하면서, 잘못된 영감을 마음의 검역소로 보내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한다면 그것이 제일이었다. 그래도 일단 콘테스트를 앞두고 있긴 했으니, 거기서만큼은 최선을 다한다. 그렇지만 낯간지러운 사랑노래는 콘테스트가 끝나면 그만. 앞으로 바라봐야 할 것은 깊고 무거운 결의뿐. 리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유키나에게 받은 노트를 가방에 쑤셔넣고 조금 무리하게 베이스를 잡았다. 연습실에선 치고 또 치는 것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점점 쌓여가는 생생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집에 가서 노트를 펴면 속내를 전부 털어놓을 기세로 펜이 움직였다.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말 하나 못하는 것이 분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하면 더 아름다운 말로 전할 수 있을까. 아무리 해도 뭉툭하고 멋없는 말들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인데.
유키나라면 어디서부터 시작을 했을까.
리사는 커튼을 걷은 창문 너머를 봤다. 커튼만 걷으면 유키나와 마주볼 수 있었던 자리. 거기에 좀 더 작은 환영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리사는 순간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지금보다 앳된 목소리, 노래를 쓰게 된 계기. 고양이와 설탕과자와 아버지와 베이스 기타와 화관과 바다와 많은 것에 대해 노래하던 작디작은 디바의 모습이 일렁이는 창가. 있는 그대로의 노랫말들을 부르던 모습이 제게는 얼마나 멋져 보였던지. 그것들 하나하나를 계단 삼아서 유키나는 지금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시작점 역시도 그녀와 같은 자리로 하고 싶다고 리사는 마음을 정했다.
전혀 정제되지 않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머릿속을 맴도는 멜로디에 맞춰 가사로 화했다. 감정을 전부 토해내듯이, 하지만 사랑스러운 사람을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으면서. 그리고 마침내 샤프심이 부러지는 소리가 마침표가 되고 나니, 마지막 소절까지 완성된 뒤였다. 그렇게 해서 쓰인 가사를 불러보면, 리사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도돌이표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제일 애절한 구간의 가사를 부르다 보면 그것이 자신의 진심임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었다. 인정하자. 인정하자고. 무엇을 쓰더라도 이보다 더 진솔하게 쓸 수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 그 후련함.
"유키나는 진심을 다해 모든 걸 걸기를 바랐어. 그리고 유키나를 향한 내 마음은 진심인걸."
리사의 가슴 속에는 끝내 단 한 가지 결의가 자리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가사만큼은 완성해서 콘테스트에 내자고.
*
가사 콘테스트의 결과는, 리사의 야심찬 준비와는 달리 낙선이었다.
"아……. 아깝네."
결과가 그렇다면 자신이 부족해서였겠거니 하고, 이메일로 통지된 심사위원 평가를 읽어보았다. 예상대로의 평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휘가 너무 흔하다. 노래에 쓰는 어휘는 이것보단 좀 더 정제되어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은 알겠는데, 그것만으로는 임팩트가 없다.
역시 뼈를 때리는 평가였다.
"아-, 이거, 심사위원이 뭘 모르네요."
가사를 막 쓰기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르바이트 동료 모카가 어깨 너머로 리사의 결과를 힐끗힐끗 보면서 리사의 등을 토닥였다.
"미안해, 모카. 란이랑 다른 애들한테 물어볼 자리까지 만들어줬는데 이런 모습을 보여 버렸네."
아쉬운 듯도 후련한 듯도 한 미소로 리사는 답했다.
"그래도 리사 씨, 굉장히 츠구했으니까요. 리사 씨니까 리사했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그런 것 치고는 꽤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은데요?"
"그야, 내 나름대로는 하고 싶은 말이 담기도록 썼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리사는 이 시점에서 조금 분한 마음도 들었다. 자신이 작사가 서툰 것과는 별개로, 유키나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사정 모르는 제3자가 평가절하 한다고 생각하니 그거대로 오기가 생기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전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작사 고수들이 모이는 자리였고, 심사위원은 작사에 대한 권위가 있는 사람들이었을 테니까, 결과에는 승복하는 것이 다음에 더 나아지기 위한 길일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하고 싶은 말만 해서 문제였을까?"
리사가 그렇게 묻자, 모카는 잠시 으-응, 하고 입가에 손을 대고 고민하는 시늉을 하더니, 넌지시 한마디를 던져보는 것이었다.
"가사는 하고 싶은 말을 쓰는 거라고 모카쨩은 생각하는데요."
"그래? 근데 전에 모카가 한 얘기 때문에 그러는데, 내 가사 말이지, 과자 만들기나 빵에 대한 이야기만큼이나 흔해빠진 이야기라서 그런 걸까?"
"아아, 그거 말이군요. 모카쨩은 다시 생각해봤는데, 빵에 대해서 가사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예전에 친구들이랑 같이 학교에서 공포체험을 했는데, 그런 걸로 란은 멋진 가사를 써냈거든요."
"와아, 너희 그런 것도 하는구나. 란은 공포체험 같은 거 좋아해?"
"오히려 반대에요. 히-쨩이랑 같이 그런 거 무서워하는 쪽. 그래도 어쨌든 일상 속에서 그-런 영감이 있었다는 거죠. 그 순간순간을 소중히 하는 거예요. 뻔한 이야기지만."
모카는 다시 의뭉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음…. 그럼 모카는 '잘못된 영감'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영감은 그대로 영감이에요. 잘못된 영감 같은 건 딱히 없을걸요. 우리는 빵 노래보다는 공포체험 노래가 더 재밌을 거 같아서 그걸로 갔는데, 야마부키 베이커리의 어떤 단골손님은 초코소라빵에 대해 노래를 쓰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니까요."
모카는 그렇게 말하며 편의점 카운터 뒤에 쌓인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을 집으려다가, 바로 리사에게 저지당했다.
"모카, 폐기를 먹으면 안 돼."
"아, 먹으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그러면 불쌍한 폐기 삼각김밥에게 바치는 애가를 써 볼까요. 오- 만찬에 오를 기회를 놓친 삼각김밥이여-"
과장되게 멋들어진 목소리를 내면서 노래를 부르는 모카를 보며 리사는 풋 하고 웃어버렸다. 이번에는 전의 성대모사보다는 더 어울린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그러자 모카는 노래를 멈추고 뭔가 생각난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럼 모카쨩도 란한테 가사 쓰고 싶다고 말해볼까요? 먹는 이야기라면 히-쨩은 찬성할 것 같은데."
"아하하, 너희들은 정말 유쾌한 마음으로 노래를 만드는구나."
"리사 씨가 가사를 쓴다고 하니까 모카쨩도 츠구하고 싶어졌답니다."
"어? 나 때문에?"
리사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자신의 별 볼일 없는 가사와 처음 해보는 시도가, 뜻밖의 타인에게 영향을 줬다고?
"그래요. 모카쨩도 대세에 편승해서 가사를 쓸까 해요. 나중에 시간 나면 같이 작사 연습 할래요?"
"아하하, 근데 나한테 영향 받으면 별로 좋지 않을 거야. 나야 뭐 이걸로도 만족하지만 난 딱히 제대로 된 작법을 배운 것도 아니고……. 모카는 독해능력도 뛰어나니까 아마 나보다 잘 쓰지 않을까 싶고."
"에이, 리사 씨가 그렇게 말하면 아직 한 번도 안 써본 모카쨩은 뭐가 되나요. 그리고 사람에겐 사람마다의 장점이 있답니다."
"그래?"
"리사 씨의 가사는 말이죠…. 솔직한 마음이 그대로 살아있어요. 뭔가 엄청 멋진 말이 가득한 느낌이랑은 다른데, 그러니까 콘테스트 수상작들이랑도 또 달라요. 근데 이건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르니까 다른 게 당연하고. 리사 씨가 무엇을 전하고 싶어하고, 어떤 기분으로 이 가사를 썼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어요. 보통은 노래 멜로디를 외워도 가사가 기억이 안 날 때가 많은데, 리사 씨 가사는 잊어버릴 일이 없을 것 같아요."
모카는 조곤조곤 리사의 가사의 좋은 점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들으면서 리사는 자신이 쓴 가사를 다시 곱씹어보았다. 유키나를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서 가사가 제일 잘 써지는 건 사실이었다. 생각해보면, 잘 써진다는 건 그만큼 이야기하고 싶은 게 많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 가사를 쓰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모카의 말을 들으니 조금이나마 용기가 생겨서, 리사는 심사위원의 가혹한 평가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히려 그 분함을 양분삼아 더 열심히 가사를 쓰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마지막 불안은 남아있었으니.
'유키나가 이 가사를 좋아할까?'
심사위원보다 더 잘 보여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리사 씨, 무슨 생각 하세요?"
"아냐, 아무것도…."
"혹시 미나토 씨가 어떻게 생각할까가 걱정되는 거라면, 일단 보여줘 보고 나중을 생각하세요.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이렇게 슬쩍 말을 돌릴 때면 어느새 모카는 치고 들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굳이 피하지 않고, 리사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런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카한테 선배 노릇 하게 되어버렸네. 그러면 언니로서, 작사 선배로서 내가 모범을 보여 볼까."
"좋은 생각이에요, 리사 씨. 응원할게요."
"고마워, 모카. 그럼 오늘도 열심히 해볼까!"
리사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팔을 걷어붙이고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성실히 임했다. 그 옆에서 모카도 한 건 해결했다는 듯 히죽거리며 평소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일에 임했다.
그리고 노을이 질 때쯤, Roselia의 단체 메시지방에 리사로부터 전언이 도착했다.
*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리사는 뜻밖의 사람이 집 앞에서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유키나?"
"어서 와, 리사. 기다렸어. 가사를 쓰고 있었다면서?"
"어? 아, 응. 그러니까……."
필히 메시지를 보고 찾아온 것이리라. 옆집이니까 문 밖에서 바로 볼 수 있는 거리지만, 이렇게 빨리,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리사도 예상하지 못했다. 막상 마주치게 되니까 긴장으로 손이 떨렸다. 그래도 기왕 이렇게 된 거 리사는 오늘따라는 유키나를 좀 더 후련한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사에 대한 감상, 듣고 싶다고 했으니까."
"아, 그랬지. 근데 지금은 좀… 모두가 같이 있을 때면 안 될까? 나, 지금 엄청 긴장되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줘…!"
그래도 여전히 감정이 정리되지 않아서, 말이 아무렇게나 튀어나와버리는 리사였다. 그 모습에 유키나도 뭔가 생각이 많아지는 눈치였다. 어쩌면 자신의 앞에서 노력을 숨기고 싶게 만들도록, 리사에게 강박을 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너무 긴장된다면… 알았어. 나중에 말해줄게."
"아, 그, 듣고 싶지 않은 건 아니고… 그저, 작사 콘테스트에 잠깐 내봤는데, 유키나가 좋아할지 어떨지는 잘 몰라서. 아하하."
리사가 웃음으로 애써 화제를 어물쩍 넘기려고 하는 것을 보고, 유키나는 리사의 손을 꼭 쥐었다.
"리사,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 리사가 무엇 때문에 긴장하는지, 나는 알고 있으니까."
"유키나…?"
"확실히 리사의 가사는 Roselia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야. 아마 나라면 쓰지 않을 가사고."
"역시 그렇지? 기껏 Roselia를 위해서 뭔가 하고 싶다면서 작사 콘테스트에도 도전해봤는데, 떨어지기나 하고……."
어느새 자신을 비하하기 시작하는 리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유키나는 리사의 손을 꼬옥 감싸쥐고 말을 이어갔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을 조금이라도 더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애써 눌러삼키던 말들을 더 이상 제쳐두지 않기 위하여.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리사의 본심을 난 알 수 있었어. 리사가 날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지, 그리고 내게… 무엇을 쭉 전하고 싶었는지."
리사는 유키나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것을 눈치채고,
"조금 밤 산책 할까?" 그렇게 물었다.
"응." 유키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두 사람은 집 근처의 한적한 도로를 손을 꼭 잡은 채 걸었다. 손 잡아도 되냐는 질문조차 없이,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손을 떼지 않았다. 가로등 불이 내린 저녁 길은 적당히 선선한 가을바람 덕분에 쾌적했다. 옅은 불빛 아래에서 미세하게 변해가는 표정들을 눈에 담으려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이야기에 물꼬를 트기 시작하는 두 사람이었다.
"네가 가사를 썼다고 말하자마자, 몇 번이고 네 가사를 읽었어. 그 때 옛날 생각이 났어. 내가 리사랑 같이 노래로 이야기하던 때가 말야."
"맞아, 나도 그 때 생각이 많이 났어. 그 때 유키나는 항상 많은 것에 대해서 노래를 불렀지. 길고양이에 대해서도 노래를 불렀고……."
"그, 그랬었나, 내가."
"일상 속에서 조금이라도 사건이 될 만한 게 있으면 넌 그걸로 노래를 불렀었어. 특히 창가에서 마주보고 노래 불렀던 거 기억나? 나 항상 옆집 창문에서 네가 노래 부르는 거 듣고 있었잖아."
"하긴, 그렇네. 리사에 대한 걸 내가 어떻게 잊어버리겠어."
"그게 꼭 말이지, 오페라하우스의 발코니석 같아서 두근거리기도 했어. 무대의 주인공인 고고한 디바 미나토 유키나를 바라보면서 꿈을 키우는 객석의 작은 아이가 바로 나였다, 그런 한 편의 이야기 같은 광경…"
"그, 그때는 그 정도로 비행기 태울 건 아니었다고 생각해."
"뭐, 그래도 유키나는 내 계기가 된 건 맞았으니까."
계기라는 단어에 유키나의 발걸음이 멈췄다. 리사도 유키나를 따라 잠시 멈춰 서고서, 빛을 등지고 무언가 말할 준비를 했다.
"내가 가사를 쓰려고 했을 때, 어릴 때 네 생각을 많이 했어. 지금이라면 웃거나 황당해할지도 모르겠지만, 일상 속에서 그렇게 느낌을 하나하나 잡아내서 노래로 곧잘 만들어내는 게 멋지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나도 거기서부터 시작해보면 좋지 않을까 싶었어."
"리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응. 사실 네 말대로, 나는 내 가사가 Roselia에는 안 어울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했었어. 근데 그 때 널 생각하니까 가사가 술술 잘 써진 거야. 안 어울리는 거야 어쨌든, 본심에 따라서 손이 저절로 움직이는 거 있지."
"마음에 울리는 진솔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그렇게 저절로 써질 때가 있지. 처음에는 그게 다듬어지지 않을 거야. 하지만 계속 쓰다 보면 리사가 원하는 말을 좀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유키나…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
그 때, 리사는 유키나 주변의 시야가 커튼이 열리듯이 탁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이나마 통하기 시작한 마음의 결과였을까.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잔잔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리사," 세상에서 제일 단아한 미소로 제 이름을 부르는 그녀.
"응?"
리사가 응답하면, 유키나는 용기를 내서 한 마디를 건넨다.
"괜찮다면 내일 우리 집에 와 줄래? 네게 들려주고 싶은 게 있어."
그렇게 유키나 역시도 리사의 말에 결심을 굳힌 것이었다.
*
집으로 돌아간 유키나는 다시 데스크탑 컴퓨터를 켜고, 마음에 오래 품어온 이의 이름을 본딴 음악 파일을 실행했다.
지금껏 제 마음에 어울리지 않게 가벼운 표현이라고 생각하면서 고이 모셔두기만 했던 노래. 하지만 이 노래를 열어봐도 더 이상 예전처럼 애물단지 같다는 느낌은 이상하게 들지 않았다. 현란한 악기들의 속주도, 화려한 미사여구도 붙지 않은, 그러나 무엇보다도 진솔한 머릿속의 완성본. 귓가에 울리는 상상은 단단한 허세에 조금씩 금을 만들었다. 그 틈새로 더없이 사랑스러운 감정들이 콸콸 새어나왔다. 가슴이 또 벅차올랐다. 유키나는 당장에라도 이 노래에 모든 것을 걸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용기를 내 주고, 또 고민을 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 고민에서 도망치려고 하는 동안에, 그녀는 좀 더 무모하던 시절의 자신을 바라보면서 걱정거리에 맞섰던 것이었다. 거기다가 자신의 그 허세가 그녀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에 가슴이 쓰라렸다. 만약에 자신을 계기로 같은 길을 걸어주기로 한 사람이 자신 때문에 도로 그만두고 주저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로 슬픈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었다.
"리사는 자신이 서투르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방향성이 Roselia와 어긋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위해서 마음을 가사로 써냈어. 그렇다면 나도 그 마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해. 오랫동안 전하지 못한 이 노래로."
태양 같은, 그리고 달 같은 사람. 지금같이 감정이 사무쳐오는 밤이면 떠오르는 웃는 얼굴. 언제나 제 곁의 빛이 되어준 고마운 사람. 흔한 단어들 중에서 제일 찬란한 말들을 고르고 골라 흥얼거리며, 따스한 멜로디를 한 땀 한 땀 마우스 포인터로 화면의 악보에 찍어간다.
마음속에 리사가 있었던 일상의 순간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그리고 리사가 잠깐이지만 없었던 때들도 떠오른다. 보금자리를 잃었다고 생각해서 그녀마저 등졌던 때. 그리고 다시 밴드를 같이 하게 되고 나서도 그녀가 연습을 빠져야만 했을 그 짧은 순간. 그때마저도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마음. 그러나 어딘가에서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지켜봐주고 있을 따스한 시선에 대한 감사. 이 모든 것들을 선명하고 밝은 노래로 자아내 간다.
"리사한테 어울리는 빨간 보석……."
따스하고, 언제나 곁에서 비춰주는 빛. 햇살과 보석을 떠올리며, 유키나는 완성된 파일에 '양지 로도나이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미나토 유키나가 최초로 쓴 사랑노래였다.
*
다음 날, 리사가 유키나의 집을 찾아와 방문을 열면, 음악 작업용 소프트웨어가 켜진 모니터와 커피 향이 나는 빈 머그컵 셋, 각설탕이 수북하게 쌓인 접시 하나와 사탕통 하나, 그리고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하는 미나토 유키나 한 명이 보였다.
"밤새서 작업한 모양이네."
많이 피곤했으리라. 그것만으로도 유키나의 성의가 느껴져서 벌써부터 리사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커피 많이 마시면 몸에 안 좋을 텐데. 그렇게 조금 참견해보고 싶기도 했지만 잠들어있는 사람에게 말해도 무리였으리라. 대신에 부드럽게 웃으면서 리사는 침대에 걸쳐진 담요를 주워 유키나의 등 위에 덮어주었다. 유키나는 그대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리사는 유키나를 업어서 침대에 눕혀주는 게 좋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괜히 잠을 방해하기도 뭐해서 그저 담요 덮은 등을 천천히 쓸어주기만 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유키나가 작업하고 있던 거……. 들어도 될까."
그래도 먼저 들어달라고 하기 전에 듣는 건 실례일 것 같아서, 리사는 조용히 유키나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아 그녀가 자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렇게 잠시 있다 보니,
"으음… 리사…?"
유키나가 눈을 비비면서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등에 두르고 있던 담요가 스르륵 내려가 떨어졌다.
"유키나가 놀러오라고 해서 왔어. 그래도 네가 들려주기 전에 내가 먼저 들어버리면 실례니까 깰 때까지 기다렸는걸."
"기다리게 해서 미안. 노래… 들어줄 수 있어?"
아직 잠결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유키나는 기지개를 한 번 펴고는 책상 위를 더듬으며 헤드폰을 찾는다. 리사는 바로 그 생각을 알아채고 책상 위에 놓인 헤드폰을 집어 목에 걸었다.
"아, 잠깐만."
무언가 생각난 게 있는지, 유키나는 텍스트 파일 하나를 열어, 리사가 잘 볼 수 있는 화면 옆쪽으로 창을 옮겼다.
"나도 가사 써 봤어. 리사의 가사에 대한 답례로 봐주면 좋을까. 아직 보컬 부분은 녹음하지 않았지만 멜로디는 넣어놨어."
"어디보자, 양지 로도나이트? 지금 들어도 돼?"
"응."
유키나가 고개를 끄덕이면 리사는 헤드폰을 쓰고 노래를 재생했다.
경쾌한 피아노 소리가 청량한 고음을 매끄럽게 연주해가면, 그것을 받쳐주듯이 따스한 기타 소리가 따라왔다. 일정하고 따라부르기 쉬운 멜로디 아래로 깔리는 베이스는 알기 쉬운 곡조를 감싸 안아주듯이 쭉 이어졌다. 어느새 리사는 주 멜로디에 맞춰서 화면 속 가사를 부르고 있었다.
고개를 까딱이며 헤드폰에 손을 대고 귀를 기울이는 리사를 보고 있으면 유키나는 긴장감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리사가 마음에 들어할까. 어제 리사를 찾아갔을 때 그녀가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자신도 느끼면서, 그럼에도 같은 감정을 공유하게 되어서 조금이라도 가까워졌다는 안도감도 느끼면서, 유키나는 화면 속의 노트들과 트랙들을 훑고 지나가는 재생 막대와 리사를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후렴구를 두 번 지나고, 간주가 지날 때쯤에 리사의 목소리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어느새 리사는 입가에 손을 대고서, 기쁨으로 휜 눈꼬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유키나……. 정말, 이런 걸 준비하고 있었다니……."
유키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이 리사를 울려버렸구나 싶어서 당황해 손수건을 찾으러 일어서자, 리사는 고개를 저으며 유키나의 손을 잡았다.
"정말로, 이렇게 예쁘고 따뜻한 노래를, 날 위해서…"
"고민 많이 했어. 이 노래를 네게 들려줘도 될까 하고. 내 감정이 너무 가벼운 말로 전해지는 건 아닐까 싶었어."
"안 들려줬으면 평생 아쉬웠을 거야. 그리고 유키나의 본심이잖아."
리사가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유키나의 목소리로도 이 노래 들어보고 싶어."
"그래?"
"응. 나중에 Roselia에서 같이 연주해보는 거 어때?"
리사의 돌발 제안에 유키나는 꽤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리사야 자신의 노래가 마음에 들어서 다 같이 나누고 싶어했겠지만, 그 말은 곧 자신의 리사를 향한 마음을 모두의 앞에서 공표한다는 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마음을 꾹꾹 눌러담아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가사를 멤버들에게 먼저 보여준 건 리사가 아니었던가? 유키나는 거기에서 새로운 형태의 감정을 느꼈다. 이 사람을 향한 애정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사람 덕분에 이렇게나 멋진 노래를 만들 수 있었음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다고. 아마, 사랑노래란 건 예전에 생각하던 것처럼 그렇게 얄팍한 것만은 아닐 터였다.
"하긴, 리사도 밴드 멤버 전부에게 가사를 보여줬으니까, 나도 이 노래를 선보이는 게 도리겠지. 그럼 다음 연습 시간에 악보를 준비해서 갈게."
"너무 무리하진 마. 밤 샜으니까 슬슬 좀 더 자는 게 어때?"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러면 눈 좀 붙일게."
유키나는 하품을 하면서 고양이 쿠션을 품에 안고 베개로 가득한 침대에 파묻혔다. 리사는 침대에 걸터앉아 어느새 다시 꿈나라로 빠지기 시작한 유키나의 머리를 스리슬쩍 쓰다듬다가,
"괜찮으면 옆에 누워도 돼?"
하고 물었다. 유키나는 대답 대신에 옆으로 굴러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한 침대에 누운 두 사람, 지금 그들은 고민이라곤 꿈속에서도 만날 수 있을까 정도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평온해졌다. 솔직한 언어가 마음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아준 지금은 설령 다른 꿈을 꾸더라도 맞이하러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와, 리사 언니 이렇게 분위기 있는 가사를 쓰고! 전 마계가 울 러브송이야, 정말로!"
"제 기준에선 좀 감정과잉이라는 느낌이지만, 그게 이마이 씨가 전하고 싶은 말이라는 건 확실히 와닿았어요."
"이마이 씨……. 역시… 아니, 마음이 따뜻해지는 가사였어요…."
주말이 지나고 Roselia의 정기 연습 시간이 찾아오면, 오늘은 리사의 가사 이야기로 왁자지껄해진 분위기였다. 멤버들에게 둘러싸여서 칭찬을 받는 게 쑥스러워 리사는 멋쩍게 웃고 있었다. 그 광경을 유키나 역시도 온기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가방에서 악보를 꺼냈다.
"리사가 이렇게 진솔한 가사를 써준 덕분에, 나도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서 노래를 완성할 수 있었어."
유키나는 멤버들에게 악보를 나눠주면서 말했다.
"그 말은, 유키나 씨, 신곡인가요?!"
아코가 들뜬 목소리로 기대를 숨기지 못하자, 유키나는 거기에 자랑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악보를 재차 가리켰다. 한편, 사요는 악보를 슥 훑어보다가 익숙한 기타 리프를 발견하고 유키나에게 물었다.
"잠깐만요, 이 멜로디는…… 미나토 씨, 분명 전에는 이 곡은 Roselia의 정식 악곡으로 쓰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어. 하지만 마음이 바뀌었어."
"정말 좋은 곡이니까, 다들 같이 연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유키나의 말에 리사도 옆에서 거들었다. 둘이서 이렇게까지 입을 모아 말하는 이유가 있나? 사요는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 알 수가 없어서 어리둥절했지만, 그 옆에서 린코가 사요에게 귓속말로 상황을 전달했다.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되어서… 두 사람 다 다행인 거예요……."
그 말에 사요가 고개를 돌리면, 리사와 유키나가 악보 하나를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악보가 한 개인 거야 유키나 본인이 작곡한 노래라 보컬 파트는 머리로 외우고 나중에 옮겨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악보가 아니라 서로의 얼굴이었다. 그 눈빛은 모로 봐도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눈빛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뭐, 그런 일이라면 여태까지 혼자 고민한 것도 이해는 가네요. 축하할 일은 축하해야죠."
"어? 축하라뇨? 아, 설마 리사 언니랑 유키나 씨가…!"
"우다가와 씨, 쉿.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면 듣는 사람이 곤란하잖아요."
"별로 곤란하진 않은데?"
돌발적인 뉴스에 놀람을 큰 소리로 표현하는 아코를 사요가 막아서려 하자, 유키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마디를 던지는 것이었다.
"가사를 봤을 때부터 눈치를 아주 못 챈 건 아니었지만요. 그래서 이마이 씨 가사도 그렇고 미나토 씨의 이번 신곡 분위기에 좀 놀란 것도 있어요. Roselia에 이런 러브송이라니……."
"나도, 리사도 전부를 건 결과일 뿐이야. 그치, 리사?"
"유키나도 참……."
태연한 유키나의 반응에 얼굴을 붉히면서 자리를 피하는 리사의 모습은, 다섯이 모인 자리에서는 드문 광경이었다. 보통은 장난도 솔직한 말도 리사 쪽에서 먼저 하고, 마음을 숨기려 드는 것도 유키나였는데, 오늘은 유키나의 당당한 말에 리사가 새빨개진 얼굴로 쑥스러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애초에 이렇게 될 걸 몰랐던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오히려 전하지 못하던 때에 비하면 훨씬 속 시원했다. 다른 멤버들 역시도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면 마냥 웃음이 나왔다.
"유키나 씨, 리사 언니, 축하드려요! 맞다, 유키나 씨랑 리사 언니도 기념으로 뭔가 어울리는 칭호가 있어야 할 거 같아요! 아코랑 린린이 심연의 전우들인 것처럼."
"으음, 그래? 그럼 아코가 멋진 걸로 하나 정해줘."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축하의 말을 건네주는 아코의 말에 다시 힘이 났는지, 리사는 어느새 평소의 친근하고 발랄한 태도로 돌아왔다.
"리사 언니가 로도나이트니까, 유키나 씨는… 음, 베니토아이트 어때요? 양지의 로도나이트와 음지의 베니토아이트!"
"아코쨩, 음지라고 하면 조금… 너무 어두워 보이는걸…."
린코가 아코의 표현을 지적하자, 아코는 말의 미로 속에서 헤매며 그럴듯한 표현을 찾으려 했다.
"그러면 칠흑 아래의, 암흑, 암전의……"
"달빛 아래의 베니토아이트는 어때? 굳이 너무 어려운 말로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멋있는 말은 만들 수 있는걸."
말을 꾸며내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 아코에게, 리사는 새로이 얻은 자신감을 갖고서 조언을 해 주었다. 그것은 자신이 작사 콘테스트에 참여하면서 얻은 제일 큰 교훈이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언어의 정교함과 전하려 하는 말의 무게가 항상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 역시 선배의 관록! 리사 언니가 마법 주문 영창의 선배가 되었으니까 이렇게 조언도 해주고. 스승님으로 모시고 싶어!"
"하하, 괜찮아, 아코. 다음에는 그럼 아코가 가사를 써 볼래?"
"좋아! 린린, 같이 가사 쓰자!"
"다들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모양이네. 여태까지 가사는 내가 써 왔고, 전에 사요만 한 번 썼었는데, 조금 미안한 기분도 들어. 하지만 다들 Roselia를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있을 거야. 그걸 진솔하게 가사에 담아내 줘. 조금 서투를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우리라서 할 수 있는 노랫말을 찾는 거야."
유키나도 한층 여유로운 자태로 멤버들의 말에 귀 기울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이 계기가 되어, 서로 솔직하게 말하고 표현하는 분위기를 모두에게 선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확산되는 애정이 만들어낸 향상심의 연쇄는, 그야말로 유키나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애정의 터전임을 다시금 확신하게 만들었다.
"자, 그러면 이제 쉬는 시간 끝내고 연습을 시작해볼까. 양지 로도나이트, 차근차근 연주해 보자."
그 발돋움을 햇살 같은 멜로디에 담아내며, 다섯 명은 사랑스러운 계기의 이름을 한 때 입었던 노래를 연주해갔다. 노랫말 하나하나, 음표 하나하나에 서린 따뜻한 감정들을 소리로 만들어가며, 이제 막 걸어가기 시작한 연인들의 앞길에 꽃처럼 뿌려주는 것이었다.
후일담
"리사 씨, 리사 씨 덕분에 이렇게 사람이 모이게 되었답니다."
오늘도 아늑함과 활기가 가득한 하자와 카페의 한 테이블에 다섯 사람이 모여 앉았다. 리사와 모카 외에도, 모카와 같은 밴드 Afterglow의 키보디스트이자 하자와 카페에서 일하기도 하는 하자와 츠구미, 유명 아이돌 밴드 Pastel*Palettes의 보컬이자 패스트푸드점에서 성실하게 아르바이트를 뛰는 마루야마 아야, 여기에 아야와 같은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생에 유쾌한 밴드 헬로 해피 월드의 드러머인 마츠바라 카논까지.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작사 스터디 모임을 가져 보는 건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리사와 모카는 같이 연습할 사람이 없는가를 찾아보기로 했다. 이 와중에 평소에도 열심인데다 리사와 마찬가지로 밴드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을 찾던 츠구미가 의욕을 가지고서 합류했고, Roselia의 정기 감자튀김 모임을 갖던 도중에 리사의 안부 이야기를 듣고 흥미가 동해 아야와 카논도 연락을 주게 되었다. 리사는 자신을 계기로 이렇게 자리가 조성된 것이 믿기지 않으면서, 또 뿌듯하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아르바이트 쉬는 날이 다 비슷비슷해서 모일 수 있게 되었네. 자, 그러면 첫 번째 가사 주제는 '일상'으로 하자."
"일상이라고 하면… 나는 피아노 연습을 하고 카페에서 사람을 만나고 블렌딩을 배우는 이야기에 대해서 써 볼까?"
리사가 주제를 제시하자, 츠구미가 먼저 자신이 쓰고 싶은 가사에 대해서 소신있게 말을 던졌다. 그러자 옆에 있던 모카는,
"츠구는 오늘도 츠구하네-. 그럼 모카쨩은 빵이 먹고 싶으니까 다양한 빵에 대해 가사를 쓰겠습니다-."
평소대로 느긋하게 말은 하지만 게으름 피울 생각은 전혀 없는지, 모카는 벌써부터 휘휘 돌리던 펜으로 몇 줄은 써놓은 상태였다.
"아, 겹치면 안 되나? 난 맛있는 디저트에 대해 가사를 쓸까 했는데. 괜찮으면 이런저런 맛있는 디저트에 대해서 팬들한테 알려주고 싶어!"
아야도 의욕을 가지고 복숭아 라떼를 두 모금 쯤 들이마시면서 당분을 충전하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사를 써내려갔다.
"나, 나는… 전에 만났던 펭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고 싶어."
처음 왔을 때는 소심해보이던 카논도 의미있는 경험을 떠올려내면서, 용기를 내어 펜을 잡아보았다.
"리사쨩은 뭐에 대해서 쓰고 싶어?"
아야가 그렇게 물으면, 리사는 또 고민에 빠지는 것이었다. 리사는 한 자리에 모인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씩 보다가, 문득 이 멤버의 공통점에 생각이 닿았다.
"맞아, 우리들 전부 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지?"
"듣고 보니 그렇네요-. 모카쨩도, 모카쨩보다 성실한 여러분도 전부 아르바이트가 있네요. 사실 그래서 만나기 편했던 것도 있고."
"그러면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써 볼까?"
어느새 주제를 정하고 나니 머릿속에서 노랫말들이 술술 나오게 되었다. 리사는 이제는 친근해진 노트를 펴고서 한 줄 한 줄 자기가 생각하는 노래의 윤곽을 그려나갔다.
그리고 하자와 카페 창가의 작은 테이블에서는,
"웃는 얼굴 한 방울에 행복이…"
시럽이 듬뿍 담긴 캐러멜 마끼아또를 마시면서, 리사와 그 일행과 마찬가지로 노트를 펴고 열심히 악보를 쓰고 있는 유키나가 있었다. 자신이 직접 쓴 사랑노래의 보컬 파트를 악보로 옮겨 다듬는 그 표정에는 평소의 스토익함과는 다른 옅은 미소가 피어 있었다.
같은 공간,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연인들. 얼핏 두 사람은 인파 속에서 서로를 본 것도 같았지만, 이제는 초조해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느긋하게 서로의 공간을 존중하며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다음에 만나게 되면 또 자신이 쓴 가사와 곡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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