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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 사탕통/팝핑 캔디

[네짜흐+예소드] 기억할 긍지

by 료밍 2020. 6. 28.

슈팅게임 헬싱커의 KEEP YOUR DIGNITY라는 문구를 생각하다가 충동적으로 써버린 네짜흐+예소드 논커플링. 원래는 예소드가 정보팀 특권 디지털풍화신공을 네짜흐에게 써서 제정신으로 되돌리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은데, 원래 쓰려던 거랑 많이 달라져버린 듯

작업 BGM은 Fling Posse - Stella

네짜흐, 예소드 코어억제 스포일러 있음. 예소드->말쿠트 감정선 있음




수많은 손들의 환영이 몸을 끌어당긴다. 중력이 저를 짓누르는 것처럼 네짜흐는 찬 바닥에 누워 있었다. 아, 무덤에서 뻗어오는 손들이구나.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구하지 못한 생명들이 서로서로를 애도하는 서늘한 곡소리가 귀에 맴도는 게 꼭 애가와도 같았다. 그 무형의 이명이 선사하는 몽롱함은, 편안히 눈을 감을 때까지 그를 저승의 강 너머로 나르는 나룻배가 되어줄 것만 같았다.


얼마나 많은 인명이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스러졌는가? 그 원초의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자신의 옛 시신이 실패를 주장하고 있었다. 애정이란 무모함의 원동력이었고, 치기어린 마음으로 제 몸을 깎아가며 바친 헌신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목숨을 바칠 정도로 희생정신 투철한 이에게 제일 큰 절망은 자신이 죽어야 누군가의 행복을 보장받는다는 게 아니라 – 그것은 오히려 희망이었다 – 자신의 목숨으론 아무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으니. 그렇게 개죽음을 당하고서 기계 소체를 갖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네짜흐는 이미 많은 것을 제 손에서 흘려보낸 뒤였다. 이 생지옥에서 하루가 다르게 생기는 희생자들도, 저승길임을 아는 기억의 물결 너머로 흘려보내곤, 그 자신도 언제 제게 새로 붙은 목숨을 뱃삯으로 낼지 가늠하고 있었다.


베고 누운 팔이 저려 뒤척이다 보니, 익숙한 초록 완장이 잠깐 초점을 되찾은 눈에 들어왔다. 안전팀의 상징. 안전할 리 없는 곳에서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모순이 그를 다시 흔든다. 외면하면, 다시 시야가 희뿌옇게 되었다. 그 속에서 저승의 윤곽은 더 가까워지고, 망자들의 모습이 어른거리며 춤을 췄다. 그 속에서 그리운 시선을 본 것도 같았다. 뒤로 묶은 갈색 머리가 고즈넉하게 휘날렸다. 마음에 그렸던 이에게, 다시 한 번, 마지막이 될 것처럼 손을 뻗으려는 순간,


"일어나."


그리운 얼굴이 모자이크라도 되는 것처럼 불명확한 색조 덩어리로 뒤덮였다. 그와 동시에 눈앞의 환영들이 치지직, 노이즈와 함께 그 형태를 잃기 시작했다. 풍화되어가는 것처럼 일그러진 색채들은 달콤한 악몽의 모양을 흐렸다. 머리가 점점 깨질 듯이 아파왔다. 덩달아 눈도 아팠다. 그가 보는 세계를 구성하는 거짓된 정보들이 하나둘씩 조각난 빛깔로 사라졌다. 당황스럽고, 또 서러웠다.


그렇게 시야가 방전되고, 바짝 정신이 돌아왔다.


네짜흐가 머리를 짚으며 허리를 일으키면, 그 생각이 들었다. 이런 짓을 할 놈은 하나밖에 없다고. 예상대로, 그는 평소의 정 하나 없는 매서운 눈을 하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상층에서 엄격하기로는 제일가는 정보팀의 독사 예소드. 웬일로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뭐야." 네짜흐는 쏘아붙였다.

"잔뜩 취해서 아주 정신이 나갔군."


째려보면, 각진 모양이 보일 정도로 일정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네짜흐를 힐책한다. 보아하니 그놈의 정보팀의 특권을 이용해 제 인지 회로에 간섭을 한 모양이다. 한심한 놈을 보는 듯한 예소드의 시선은 새삼스럽지도 않았으나, 오늘따라 유난히 걸리적거렸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특권 남용 아냐? 머리 깨지게 아프네."

"거짓된 정보를 솎아내는 건 정보팀의 원래 임무다."

"아, 그러세요."

"그리고 네가 네 일을 제대로 안 하고 있었으니까. 오늘은 정기 상층 회의가 있는 날이었어."

"뭐, 백날 회의한다고 뭐가 달라져?"

"근무 태만을 지적하지 않을 순 없지."

"아, 그놈의 규칙대로. 해도 소용없는 게 있단 걸 넌 모르겠지."


네짜흐의 체념이 뚝뚝 묻어나오는 말씨도 새로울 것 하나 없었다. 그러나, 예소드는 그 반응이 오늘따라 유난히 심기가 불편했는지 장갑 낀 손을 꾹 쥐어 눌렀다.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그 손짓은 뭔가를 참기라도 하는 듯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할 말이 있었던 것처럼 입술을 짓씹었다 마는 것이 잠깐 보였다.


"좋으시겠어.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런 식으로 ‘말소’해버리면 되니까. 네가 가진 그 특권으로 말이야. 매사에 거리를 두고, 쓸데없는 정도 안 붙이고. 누구는 잊어버리고 싶은데도 못 잊어서 이러는데 말이야. 정말로 몰라서 이래?"

"지금 날 비웃고 싶은 거냐." 쥐어짜듯이 손을 누르면서 예소드가 네짜흐의 빈정거림에 되물었다.

"아니, 오히려 네가 날 비웃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내가 한심하고 매일 정신 놓고 있다고 말하러 온 거잖아. 그걸 확실하게 새겨두려고 내가 취해 있을 때 내 정신에 간섭을 한 거고. 다 알아."


이것은 단순한 화풀이고, 투정이다. 네짜흐는 그것을 아주 잘 알았다. 허상이더라도, 그저 기억 속의 사랑했던 이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간 잠시간의 환희를 방해받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는지는, 네짜흐 본인만이 알았다.


"아냐."


예소드의 부정은 유난히 단호하고 신경질적이었다. 네짜흐는 자기가 그 독사 녀석의 자존심에 상처라도 냈나 하고, 약간의 우쭐함을 담아 말을 이어갔다. 


"할 말 더 있어? 날 제정신으로 돌려놓는 임무는 다 했잖아. 안 그래?"

"아니라고."


빈정대는 말이 점점 많아질수록, 예소드도 점점 표정의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이를 악물고, 제 한쪽 손을 쥐던 반대편 손은 점점 긁어댈 듯이 힘이 들어가 떨렸다. 그 반응은 네짜흐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제대로 신경을 긁었나? 하지만 단순히 심기를 거슬리게 한 것 치고는, 그가 답답한 게 있는 듯 떨면서 목으로 손을 가져가는 게 수상했다. 마치 목이 막히는 것처럼. 그 생소한 광경은 얄미운 녀석을 앞에 둔 네짜흐라 해도 초조함을 느끼게 만들기 충분했다. 제 목이라도 조를 기세인가.


"잠깐만, 너..."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는 직감에 네짜흐가 반사적으로 일어나려고 하자, 예소드는 그럴 필요 없다는 듯 한손을 내젓고는 벽에 다른 손을 받치고, 잠시 숨을 골랐다.


"너는 알 거야."

"무슨 소리야."

"나도, 네 고통을 알아."


뜻밖의 말. 네짜흐는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지도 의문 투성이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 네짜흐가 본 것은, 자신의 예소드란 인물에 대한 생각을 앞으로도 바꿔놓을 것이었다.


예소드는 쭉 답답할 정도로 목을 덮고 있던 검은 천을 끌어내렸다. 사람이었다면 살을 파고들어 혈관이라도 터뜨릴 기세로, 깊게 긁힌 자국들이 그 자리에 새겨져 있었다. 무기질한 표면 사이로 내부가 다 드러나는 상흔이 얼핏 목 아래로도 쭉 이어지는 게 보였던가.

자신과 같은, 견딜 수 없어서 스스로를 해한 흔적들.


"......"


망할, 이럴 거면 차라리 같이 술이라도 마시자고 말할 것이지. 그 편이 훨씬 솔직한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평소의 예소드는 복장 하나하나도 칼같이 검사하는, 매정하고 딱 부러지는 평소의 이미지를 강박적으로 유지해왔을 터다. 그런 이상 아마 그럴 수도 없었으리라. 네짜흐는 지긋지긋한 걸 봤다는 듯, 안전팀 본부 바닥에 널브러진 빈 약통을 발로 밀며 피식 하고 웃었다. 참으로 우습다. 그래, 어차피 이곳에 모인 이들은 조금씩 나사가 빠진 구석이 있었다. 그걸 또 확인한 것뿐이었다.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괜한 참견이었다 싶지만, 그가 몸을 꽁꽁 싸맨 옷가지 속에 숨겨왔던 자해흔들이 자신의 아까까지의 행동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자, 네짜흐는 예소드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자신을 그렇게 과격하게 깨웠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소체에 남아있는 녹색 물질들의 찌꺼기가 영 비릿하게 느껴졌다. 


"멍청하긴. 지금 이 몸뚱이론, 고작 그런 짓으로 죽을 수 없다고."

"알아. 이건 그저 옛 기억에 시달려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의 잔재일 뿐이다."


예소드는 아까보다는 담담하게, 옛 일을 회상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도 몸을 엄습해오는 두려움을 추스르면서.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남의 단잠을 방해하시나."


알 것 같았지만, 네짜흐는 한 번 더 물었다.


"잊어버린 게,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게 있어 보여서다."


아, 그 이야기였나.


"나라고 해서 형편 좋게 다 잊을 수 있는 게 아냐. 때론 내 자신이 누군가였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싶어. 동시에, 어떤 것들은 내가 잊으려 하지 않아도 점점 멀어지고 있고. 네 말대로, 때론 내 손으로 지워버리는 것들도 있음을 부정할 수도 없지만."


굳이 사건과 그에 연루된 사람들의 이름을 읊지 않아도, 당연히 알 것 같은 것들. 공유되는 절망감. 그 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원초의 기억 속에 자리잡은 인영을 떠올릴 때마다 사무치는 그리움과 슬픔.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잊을 수 없는 이유를 담아,


"네 긍지를 기억해라."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예소드는 말했다.


네짜흐는 홱 예소드에게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긍지? 자신에게 그런 게 있었나. 포기하고 있었던 마음이 찰나의 유치한 분노로 이글거렸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네짜흐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할 것이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해오고 있던, 선행이라 부르기도 부끄러운 필사적인 발버둥들. 그것이 무용하지 않다는 증거를 네짜흐도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긍지라니, 무슨 소리야."

"소중한 이를 잃었을 때,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 이런 몰골로 끝난 나보단, 너는 훨씬 긍지가 있었으니까."


예소드 또한 그것을 찾고 있었으리라. 오히려 처음부터 구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공포에 질렸고, 지금도 주체할 수 없는 잔정들을 숨기지 못하면서 냉혈한 가면을 뒤집어쓰는 자신보다, 훨씬 나은 해답을 알고 있을 이. 그는 네짜흐에게 명령하러 온 것도, 네짜흐를 깔보러 온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충고의 형태를 빌려 해답을 구하고 싶었기 때문에 네짜흐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그런 대단한 위인이라고는 추호도 생각 않았지만, 그래도 참 별 거 아닌 걸 배배 꼬아서 생각한다 싶어서, 네짜흐는 좀 더 간단한 해답을 예소드에게 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별 거 아닌 걸로 긍지라고 할 거면, 너야말로 그놈의 긍지 자알 지켜라."

"......"

"죽는 거 보기 싫어서 정 뗀다 말은 해도, 걘 계속 네 옆에 있잖아. 너도 걔 옆에 있고."


결국 우리는 그놈의 사랑 때문에 여기에 모인 게 아니었나. 그렇게 이 자리에 와서, 모두를 구할 수 없더라도 뭔가는 했었다. 어떤 형태로든 그 인연의 잔재는 남아있었다. 참으로 단순한 말이었지만, 어이없을 정도로 정론이었다. 그 사실에, 예소드가 동요하는 것이 눈에 다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이내,


"그래. 너는 해답을 알고 있었어."


고개를 끄덕이고, 옛 이야기들과 심정들이 술술 풀려나오는 것이었다.


"엘리야가 죽었을 때, 나도 너처럼 뭐라도 할 수 있었다면 달라지는 게 있었을까. 내가 너보다는 유능하다고 착각했으니까 나라면 다를 거라고 믿었는지도 모르지. 그래봤자 옛날 일이고, 그때의 난 겁쟁이였던 건 변함없지만. 우습군. 늘 네게 태만하다고 잔소리하는 건 나인데, 너야말로 나보다 앞서고 있었단 말이지. 자기가 거머쥔 줄도 모르는 해답을 갖고서. 그 해답을 네 스스로 놓아버리는 걸, 나는 견딜 수 없었어. 그래서 불필요한 참견을 했다."


담담하게, 옛 기억을 마주하며 예소드는 고해한다. 그 모습에선 평소의 꽉 막힌 태도에서 해방된 후련함이 엿보였다. 그 때 처음으로, 네짜흐는 예소드가 귀찮지 않게 보였다. 역시, 인정머리 없는 녀석은 아니었다. 어쩌면 괜찮은 술친구 정도는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런 지옥 같은 데서 낯간지러운 소리나 하게 생겼네."


다시 벽에 나른하게 기대면서, 네짜흐가 말했다.


"우리의 숙명일지도 모르지. 우린 그런 점에선 한 배를 탔으니까."

"그 배가 지옥행이었던 건 나도 몰랐지만. 아, 지옥 가고 싶다. 여기 말고 진짜 지옥."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술이나 깔래?"

"필요없어. 나까지 취해서 늘어질 생각은 없거든. 슬슬 정신 차리고 회의안이라도 확인하러 가지 그래? 말쿠트도 너 걱정 많이 하던데, 상황 보고라도 하러 가야 하지 않겠어? 슬슬 일어나자고."


익숙한 이름을 입에 담으면서 저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려는 예소드를 보며, 네짜흐는 바람 새는 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는 비웃음도 없이, 좀 더 기분 풀린 웃음이었지만.


"너 말야,"

"이번엔 뭐가 그렇게 웃기지?"

"속 보여."


꽤나 사람 건드리는 네짜흐의 농담에도, 지금의 예소드는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받아넘겼다.


"뭐, 여기까지 온 거, 부정하진 않도록 하지."

"천하의 독사 예소드도 짝사랑 비슷한 걸 하는구나. 별일이야."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네짜흐."


적어도 후회 없이 사랑했고, 그것을 잊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긍지. 미련하기까지 한 애정을 담은 배의 행선지는, 지옥만은 아닐 것이다. 각자의 마음에 품은 이정표가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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