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또 저질렀다. 또 저질렀다...
시점은 토이박스 스카우트 / 라우더 이벤트 시점.
미나토 유키나는 기타와 발성을 연습하기 적당한 악보를 찾아 벽장을 뒤졌다. 아버지가 활동하던 시절의 악보며 낡은 음향기기 등이 세월의 먼지를 머리에 옅개 쌓은 채 그 후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절되었던 옛 소리의 기록을 유키나가 멈춘 시간 속에서 꺼내주었다. 악보 뭉치를 집어들면 오선보의 여백을 채운 꼼꼼한 손글씨들이 유키나를 반겼다. 그 딸에게도 고스란히 물려준 성실함과 열정의 증거는 눈으로 확인하고 머리로 해독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이 집념의 수십분의 일이라도 자신이 따라갈 수 있을까? 유키나가 가볍게 열었던 과거의 상자는 마냥 가볍게 따라부르지는 못할 것들의 보고였다. 그럼에도 첫 소절 몇 음을 흥얼거리면서 지금은 차근차근 보금자리가 되어가는 밴드, Roselia에게 어울리는 곡을 찾아서 유키나는 악보를 넘겼다. 그리고 마침내 손이 한 악보에 머물러, BPM과 첫 기타 리프의 흐름을 머리에 새기는 순간, 유키나는 머리 뒤쪽에서 불꽃의 쇄도와 같은 감각을 느꼈다.
'LOUDER' 라는 제목이 적힌 악보는 인디즈 시절 아버지의 역작이었다. 이 곡을 연주할 수 있다면 Roselia는 아버지의 신화를 다시 세울 수 있다. 음이 머릿속에 퍼질 때마다 유키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먼 옛날, 라이브하우스에서 아버지의 공연을 두 눈으로 봤을 때 생생했던 전율. 그것을 제 손으로 직접 일궈낸다. 제 목으로 직접 전한다. 무대를 사로잡는 것은 순식간이다. 홀로 디바로서 무대 위에 선 순간부터 밴드를 결성한 지금까지 학수고대해온 해답을 드디어 찾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유키나는 악보를 눈으로 훑으면 훑을 수록 목까지 차오르는 답답하게 막힌 느낌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제 막 밴드를 결성해 소리를 맞추기 시작한 자신에게, 아버지의 역작을 소화해낼 역량은 있을까?
너무나도 빨리 찾아낸 해답은 순순히 제발로 걸어오지 않았다. 막중한 과제도 함께 떠안아버린 유키나는 잠깐 들떴던 마음을 아버지의 악보와 함께 다시 고이 접었다. 당연히 쉬울 리가 없었다. 유키나는 LOUDER의 악보를 챙기고 나머지 악보를 상하지 않게 벽장에 도로 넣은 뒤 자신이 열어버린 옛 시간으로 향하는 문을 닫았다.
푸른 장미의 교차점 1편 - 상자 속 노랫소리
라이브하우스 CiRCLE의 연습실 한 켠에서 한 소년이 안무를 연습하고 있었다. 그것이 허가받은 일인지는 소년 본인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곧 둘이서 무대에 설 수 있다는 확실한 답만은 그의 파트너이자 스승 되는 자에게 들었기에, 그는 들떠서 저도 모르게 여기에 자리를 잡고 연습하고 있었다. 다니는 학교 - 유메노사키 학원의 연습실도 있을 텐데 굳이 라이브하우스의 연습실을 고집하는 것은, 지금 마주친다면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마음에 잡념이 잔뜩 고일 것만 같은 사람들로 학교가 붐볐기 때문이었다. 아르바이트생 자격으로 스태프 출입증을 지닌 지금은 보다 손쉽게 이곳을 '빌릴' 수도 있었다. 정확히는 빌린다기보다는 청소 시간을 연습 시간으로 쓰는 수법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 환경이라면 사람을 꺼리는 제 파트너도 비교적 마음 편하게 작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년, 카게히라 미카는 생각했다.
몇 바퀴째 돌고 몇 걸음의 발을 놀렸을까? 즉흥적인 움직임 속에서 제 움직임에 부여된 초 단위조차 셀 수 없게 된 때쯤, 미카의 머릿속에는 공상의 무대가 펼쳐졌다. 자신이 인형이라면, 인형이 꾸는 꿈은 어떤 것일까? 여태까지 인형사의 뜻대로 춤추는 인형의 역할은 맡았지만, 인형의 기분에 대해서는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고민을 허락받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유닛의 운명 일부가 제 손에 쥔 실일 때라면, 스스로 생각하는 머리도 인형에게는 필요한 법이다. 무대는 어릴 적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 상자나 모래상자일까. 인형은 그 상자 속에서 인간들이 꿈을 꿀 때 뛰어놀고 있지 않을까. 상상한다. 합성수지로 만든 팔다리도 색채를 갖춘 꿈 속에선 요정의 가루라도 끼얹은 듯 활기차게 움직인다. 무지개 다리 저편에서 찾아오는 장난감 기차가 찾아오면 호루라기를 삑 부는 역장이 되어 토끼 인형과 인형 친구들을 안내한다. 머릿속에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멜로디가 몸을 저절로 움직이게 했다. 가사조차 붙지 않은 멜로디를 입말로 부르며 춤을 추다 보니, 어느새 바닥에 떨어진 블럭 조각이 발치에 밟혀 미끄러지고-
"응아아아아앗?!"
휘청, 뒤로 넘어지려고 하는 순간 다행이도 받쳐주는 손이 있었다. 엉덩방아를 찧는 것은 면했다. 바닥을 보면 블럭 조각도 토끼 인형도 없었다. 대신에 미카의 허리를 받치고서 평소의 엄격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는 익숙한 분홍머리의 파트너, 미카의 스승님인 이츠키 슈가 있었다.
"스승님아? 언제 왔노? 내는 그냥 혼자 연습하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어디 갔나 했더니만..."
"미안하데이. 허락도 없이 날라서. 그래도 스승님 말대루 연습 꼼꼼히 하고 있었다."
"나보다는 뒤에 기다리는 사람한테 미안하다고 하거라. 정식으로 연습실을 빌리지도 않고 청소부 신분으로 와서 그러고 있으면 어쩌겠느냐."
그 말을 듣고 미카가 뒤를 돌아보면, 연습실 문 앞에 악기 케이스를 든 학생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인근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었지만, 그 신분보다도 두 사람에게 더 낯익을 이름은 따로 있었다.
"저기, 우리 연습실 빌리러 왔거든."
그들은 전에도 본 밴드 Roselia의 멤버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유독 미카에게는 낯익은 목소리도 있었다. 얼마 전 라이브하우스에서 리허설을 마치고 만나 대화를 나눈 베이시스트, 이마이 리사였다. 리사는 미카를 알아보고 대번 손을 흔들어 반겼다.
"안녕, 미카."
"앗, 이마쨩! 미안하데이. 내 잠깐 청소하러 들렀다 분위기 타서."
"리사, 아는 사이야?"
그 틈을 타 리사의 옆에 있던 은발의 보컬, 유키나가 리사에게 물었다. 발이 넓은 리사라면 자신이 모르는 인맥도 많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잠깐만이라도 아는 사이와 자신의 친구가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인 것은 새삼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전에 유키나도 만나지 않았어? Valkyrie의 멤버, 카게히라 미카잖아."
"내가 만난 건 이쪽이 아니라," 유키나는 눈짓으로 미카 옆에 선 슈를 가리켰다.
"미나토 유키나라고 했나,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서 미안하군. 우리 불출 대신 사과하지. 다음엔 허가 없이 연습실을 쓰지 않도록 타일러 두겠다."
슈는 유키나와 Roselia의 멤버들에게 고개 하나 숙이지 않고서 사과의 말을 전하고는 미카에게 눈치를 줬다. 그 오만한 자태에는 눈 앞에 있는 Roselia 멤버들을 향한 미안함 이상으로 미카에 대한 어떤 감정이 엿보였지만, 그것이 무엇인가는 본인도 쉬이 알지 못했다. 무례에 대한 경멸도, 꾸짖어야 할 제 소유 - 소유라고 할 수 있는가? - 의 인간을 마땅히 꾸짖어야겠다는 마음도, 그 이상의 것에 종속되어 있음은 눈치채기에 아직 이른 시기였다. 그 옆에서 미카가 쭈뼛거리며 재차 미안하데이, 하고 사과의 말을 전했다.
"자, 잠깐만요."
그 때, 키 큰 멤버들 사이로 척 치켜든 손 하나가 보였다. 항상 뒤를 따르는 입장이었던 드러머 우다가와 아코가 오늘따라 놓칠 수 없는 게 있었는지 작은 몸으로 눈치를 보며 시야를 확보하려 들었다. 두리번거리는 아코를 본 리사는 자리를 비켜 손의 주인이 앞으로 나올 수 있게 해 주었다. 설마 진짜로 만날 줄이야. 앞으로 뛰쳐나온 아코의 보라색 양갈래 머리가 흔들렸다. 기대 가득한 두 눈으로 확인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아코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정말로 Valkyrie의 두 분인가요? 정말로요?"
"아코쨩... 갑자기 나서면... 놀랄지도..."
"괜찮아, 린린. 아코는 안 놀라." 그 뒤에서 기어들어가는 듯한, 걱정 섞인 목소리가 났다. 커다란 키보드 케이스의 손잡이를 꼭 쥔 심약한 인상의 키보디스트, 시로카네 린코가 아코의 어깨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이미 아코는 저 만치 앞까지 간 이후였다.
아코에게는 여러가지 '초 초 초 멋있는' 것들이 있었고, Valkyrie는 아이돌 중에서는 드물게도 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었다. 댄스부 활동을 하면서 아이돌 곡은 익히 들어왔지만, Valkyrie는 그 중에서도 특유의 세계관과 퍼포먼스로 아코의 두 눈을 사로잡았다. 당연히 안무를 직접 춰본 적도 있었고, 노래에 맞춰 몇 가지 즉흥 안무를 꾸며내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아코가 그 안에서 본보기로 삼았던 것은, 당시에 세 명이었던 Valkyrie의 리드보컬이자 센터 니토 나즈나도, 리더인 이츠키 슈도 아닌, 노래 하나 부르지 않고 묵묵히 무대장치를 연기하며 춤추던 오드아이의 백댄서, 카게히라 미카였다. 그것은 어쩌면 아코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다고 생각하는 언니, 우다가와 토모에가 밴드에서 드러머 포지션을 맡은 것과도 관계가 있었을지 모른다. 세상에는 눈에 잘 보이는 것보다 잘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정말로 카게히라 미카 씨가 눈 앞에... 우와, 정말로 오드아이..."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지 말거라. 카게히라가 놀랄 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코가 미카에게로 달려가 저보다 꽤 높은 눈높이를 올려다 보면 분명히 양쪽 색이 다른 눈을 볼 수 있었다. 눈을 주목받는 미카의 부담이 걱정된 슈는 미카를 뒤로 물러서게 하였지만, 아코는 그저 들떠서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치만 그 두 눈은... 마치 신들의 황혼과 천공의 새벽이 눈 하나하나에 담긴 것 같아서, 마계의 존재인 아코는 정화당해 버릴 것 같은걸요! 큭, 팔의 마물이!"
팔을 거머쥐며 평소의 과장된 역할놀이를 선보이는 아코를, 미카는 잠깐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그 순수한 저의를 알고 미소로 화답했다. 이래저래 복잡한 말을 하고 있지만, 눈이 예쁘다는 말을 해준 것은 알 것 같았다.
"고맙데이. 쪼까 복잡한 말이라 캐도, 칭찬인 건 다 전달됐다. 내 눈 너무 쳐다보면 부끄럽지만, 눈이 이쁘다고 해주는 사람은 좋다."
"칭찬 맞고말고요. 현세에 화한 카산드라인 아코는 진실만을 말한답니다."
"아, 혹시... 로제리아에서 드럼 치는? 되게 멋있었데이. 두둥! 파방! 하는 거."
"오, 알아봐줬어? 미카 씨에게 칭찬받았다?! 역시 마물이 깃든 팔이 자아내는 소리는 마, 마인드, 마음을 컨트롤하는 악력의... 그게 있어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언젠가는 언니만큼 초 초 초 잘 치는 드러머가 되고 싶거든요."
아코는 기뻐 방방 뛰더니 멋드러진 포즈를 취하며 에어드럼을 선보였다. 멋있는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은 항상 기분이 좋았다. 드럼을 시작한 이래로 언니에게도 늘 그 성과를 인정받고 있었고, 지금은 서로 경쟁도 하고 좋은 점을 따라잡으려 하는 드러머 동료가 되었다. 그리고 밖에서도 유키나 씨와 Roselia의 멤버들, 다른 아티스트들과 마주치면서 칭찬받으니 아코는 나날이 밴드활동을 시작해서 살 맛이 난다고 느꼈다.
그것을 앞에서 지켜보는 미카 역시도 알게모르게 뿌듯함과 동질감을 느꼈다. 이 아이는 언니가 꿈의 근원인가. 미카는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꿈의 근원을 추측해보곤 했다. 동경하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길을 닦아나가는 사람은 항상 응원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자신과 다르게... 인형이 아니었다. 이마이 리사를 봤을 때에도 조금 '인형'이 되어가는 면이 있는 것 같았는데, 우다가와 아코에게는 소중하고 본받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도 그런 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생체였다. 그것이 왜인지 모르게 안도감이 들었다. 미카는 그저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다섯명 분의 사탕을 꺼내 아코에게 주었다.
"와아! 감사합니다. 이건 린린 거, 이건 유키나씨 거, 리사 언니는 이거고 사요 씨는 오렌지맛만 아니면 되고"
이 라이브하우스에서 엄격함으로 빚어놓은 듯한 그룹 하면 서로 앞다툴 두 그룹의 멤버임이 무색할 정도로 해이한 광경이니, 누군가는 여기에 딴죽을 걸 시간이 슬슬 찾아오지 않을까, 하고 멤버들은 서로 눈치 게임을 하였다. 그리고 때맞춰 유키나가 그 분위기를 깨뜨렸다.
"여기에 친구놀이를 하러 온 게 아닌 건 알 텐데. 우린 연습하러 왔어."
"앗, 유키나 씨! 죄송합니다. 사탕은 유키나 씨한테 맡겨놓을게요."
"나도 볼 일이 있으면 이만 돌아가야겠군."
"잠깐만요!"
각 유닛의 리더들이 사무적인 말을 주고받으며 결별의 신호를 알리려는 찰나, 아코가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있죠, 유키나 씨가 괜찮으면 Valkyrie의 두 분 앞에서 저희의 연주를 선보여도 될까요? 유키나 씨도 굉장히 멋있는 소리를 낸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아코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유키나에게 부탁했다. 그래도 유키나의 무표정은 좀처럼 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뒤에서는 어떤 소란에도 시종일관 찌푸린 채 언제 끝나나를 기다리던 청록색 장발의 기타리스트, 히카와 사요가 혀를 차며 우다가와 씨, 하고 아코를 불러세우려 했으나, 간발의 차로 리사가 아코의 제안을 이어받아 말을 계속했다.
"괜찮다면 우리 연주 볼래? 리허설 때 봤겠지만, 가까이서 보는 건 또 다를 지 모르잖아. 유키나는 어때?"
"나쁘지 않아. 안목은 그럭저럭 있는 사람들이고, 관객이 있다면 연습도 실전처럼 할 수 있겠지."
유키나는 의외로 흔쾌히 리사의 제안을 승낙했다.
"나도 다른 아티스트의 공연을 접한다면 많은 공부가 될 것 같군."
유키나의 말에 슈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에 대한 것이라면 흔들림 없이 결정할 수 있는 자태는 꽤나 닮았구나, 하고 그 옆에 있던 두 사람은 생각했다.
"와아! 그럼 로젤리아의 필살 넘버를 선보이도록 하겠어요. 마물 강림 의식을 하고 있을 테니 그 자리에서 제물을 준비해 주세요!"
아코의 활기찬 선언을 필두로 Roselia의 멤버 다섯은 악기 케이스를 풀고 음향설비에 악기들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미카와 슈는 연습실 구석에 있던 접이식 의자를 펴, Roselia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앰프의 선과 악보 스탠드, 신시사이저를 받칠 거치대와 전선들 뒤에서, 무거운 키보드 케이스를 막 내려놓은 린코가 아코에게 물었다.
"아코쨩... '둘 뿐' 인 거, 신경 안 쓰였어?"
"린린? 둘이라면... 아, 그거?"
"응. 아코쨩... 그 사람... 빠져서 상심한 줄."
린코는 Valkyrie의 현주소를 두 눈으로 확인한 아코가 슬퍼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Valkyrie가 불미스러운 일로 활동을 정지했다는 것도, 리드보컬의 탈퇴도 실시간으로 접했다. 비록 그 결정을 원망하지는 않았지만 상심이 컸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아코는 의외로 의연하게 그에 대한 대답을 말했다.
"둘이서 새 시작을 하려는데, 전 멤버 이야기를 꺼내는 건 슬플 거 같았어."
"아코쨩은... 그 사람... 떠나서 슬퍼?"
"아코도 아쉬웠고, Valkyrie의 두 분도 아쉬운 일일 거야. 하지만 Roselia가 다섯 명이기 때문에 낼 수 있는 소리가 있잖아? 그것처럼 두 분은 두 사람이서 낼 수 있는 소리를 찾고 싶었을 거야. 그래서 이 라이브하우스에서 다시 모인 게 아닐까."
"그렇네... 꼭 게임할 때 아코쨩이랑 나처럼, 둘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둘이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지을 때쯤 앰프에 연결된 전자기타 소리가 연습실에 두어 번 울렸다. 기타의 현을 몇 번 퉁기던 사요가 유키나에게 물었다.
"미나토 씨, 곡은 평소 연주하던 대로 BLACK SHOUT으로 갈까요?"
"그거면 돼. 지금 최상의 상태로 연주할 수 있단 확신이 있는 걸로."
"어 유키나? 새 곡은 안 하고?"
"그 곡은..."
리사가 '새 곡'을 언급하자, 유키나는 벽장을 열었을 때와 같은, 자욱한 먼지 뭉치가 목을 채우는 느낌에 휩싸였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부담되는 아버지의 역작. 선보이기 용으로 가볍게 칠 수 있는 곡은 결코 아니었다.
"아직 그 곡을 부르기엔 준비가 안 됐어."
"미나토 씨도 우리도, 연주 기교는 상당히 능숙해졌으니 도전해보는 가치는 있을 텐데요."
"그래도 아직 내게는 과분한 곡이야. 타인의 앞에서 쉽게 선보일 수 있을 정도는 아냐."
"미나토 씨는 그 곡을 무대에서 부르고 싶은 게 맞는 거죠?"
"물론 도전해보고 싶어. 하지만 아직 나는..."
듣자마자 부르고 싶다고 선뜻 악보도 가져왔고, 음원도 멤버들에게 들려줬지만, 막상 새 곡으로 멤버들을 기대하게 해 놓고 자신만 역량 부족을 빌미로 계속 미루고 있었다. 이미 다른 멤버들은 자기 파트를 연습해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키나에게 당장의 문제는 연주의 능숙함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음악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이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외치는 본능적인 열망. 그 느낌이 없이는 아버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 상태로 연주해봤자 신화를 남기지는 못한다. 단지 3분 35초의 시간이 휘발할 뿐이다.
"유키나는 되게 진지하게 그 곡을 대하고 있구나..."
리사는 마이크 스탠드에 자리를 잡은 유키나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리사가 보기에는 유키나에겐 음악을 진지하게 대하는 순수한 열정이 충분히 갖춰져 있었다. 그럼에도 유키나가 계속 그 곡을 부르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저가 바라보는 유키나의 등 위로 어른거리는 듯했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나누며 키워온 정과, 그것을 온전히 품을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해 짊어져온 것들이.
"자, 그럼 네 박 세고 시작할게. 메트로놈이 없어도 빠르기는 이제 익숙하지? 실전처럼 생각하고 가볼까."
유키나가 신호를 보내자, Roselia의 모두는 일제히 악기의 음을 차례로 냈다. 어느새 다시 늠름하게 일어서, 음악에 모든 것을 쏟는 유키나였다. 열중하고 있을 때면 어떤 근심도 사라져 자유로운 유키나의 모습을 보면 리사는 다시 안도하는 것이었다. 네 박을 쉬고, 연주는 시작되었다.
먼저 린코가 오르간을 모사한 키보드 샘플의 선율을 허공에 던지고, 유키나는 그 위로 목소리를 덧입혀 갔다. 고요하게 부르는 시작의 소절에는 리사와 사요가 코러스를 곁들인다. 마침내 유키나가 목소리를 거칠게 터뜨려내자, 가녀리던 선율 사이로 아코가 강한 드럼 비트로 파고든다. 유키나의 양 옆으로 쌍익을 이룬 기타와 베이스, 사요와 리사가 연주를 개시하자 곡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바뀐다. 강렬한 간주를 거치고, 음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 유키나는 연습실의 분위기를 장악한다. 안정적이지만 결코 무르지 않은 연주가 이어지고, 유키나가 부르는 노래가사에는 각오가 하나하나 실려나간다. 악기를 든 팔은 곡이 끝날 때까지도 힘 하나 빼지 않은 채였다.
곡이 끝나자, 연습실의 둘 뿐인 관객도 말 없이 박수를 쳤다. 말 없이, 라고 해도 멋진 것을 보면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는 천성들은 어디 가지 않았지만.
"우, 와, 응아아, 엄청... 가까이서 들으니까 확실히 다르데이. 어데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도 알겠구."
"멋진 연주였다. 차원이 다른 각오가 느껴지는군."
그러나 그 어떤 평가에도 연주자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고고한 정점을 지향하는 자들이 관객 앞에서 지켜야 할 미덕. 그것은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태를 뽐내야 하는 것이었다. 좀처럼 가시지 않는 연주의 여운 속에서, 그래도 현실감각이 조금씩 돌아오자 유키나가 밴드를 대표해 말문을 열었다.
"각오가 없으면 음악을 할 수 없어.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밴드야."
"연주의 기법은 흠잡을 데 없었다. 하지만 미나토, 네 목소리에서는 어딘가 헤매고 있는 게 느껴지는 것이다. 지금 부른 곡의 주제는 '각오' 였겠지. 그럼에도 너는 다른 것을 계속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아직 나는 내다봐야 할 게 많아. 내겐 계승해야 할 이상이 있고, 그것은 각오만으로 도달하기는 힘든 곳에 있어. 헤맨다고 느낀다면 아마 그래서겠지."
"이상, 계승이라. 되살리고 싶은 신화라도 있는 것인가?"
"말하자면 그런 거라고도 할 수 있겠지."
유키나와 슈는 잠시 서로를 쳐다보며 주고받은 말의 단락을 곱씹었다. 각오. 이상. 계승. 되살릴 신화. 누구에게도 유의미한 키워드가 말이 오간 공간 속을 맴돌았다. "피드백 고마워." 라고 짧게 인사한 유키나가 먼저 정적을 깨고 연습실에 차린 간이 무대에서 물러났다.
"다들 준비가 잘 된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이마이 씨도 오늘은 평소처럼 무리하는 기색도 없었고. 이대로 다음 라이브까지 쭉 이어가죠. 그리고... 미나토 씨도 어서 그 곡에 대한 고민을 해소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고마워, 사요. 유키나도 수고 많았어. 그러면 잠시 쉴까? 쿠키 가져왔으니까 먹을 사람?"
"이츠키 씨, 카게히라 씨, 당신들도 들어줘서 고마워요. 잠시 휴식할 테니, 연습실은 쓰고 싶다면 사용해도 돼요."
"저, 정말이가?"
"쉿, 카게히라, 무례를 범하지 말거라. 먼저 연습실을 예약해둔 사람이 있다면 우리가 물러나는 게 도리다."
슈는 미카를 저지하는 것으로 사요의 제안을 돌려 거절했다. 그 때, 신시사이저의 선을 매만지고 있던 린코가 느릿느릿하게 빈 키보드 케이스를 들고 사요의 옆으로 왔다. 키보드는 자리에 펴 놨더라도,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신비한 무구라도 되는지 린코는 시종일관 키보드 케이스를 떼어놓지 않았다.
"저... Valkyrie 분들은... 리허설... 안 하는가요...?"
아코쨩도 기대하고 있어요, 린코는 덧붙이며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그 순간 미카와 슈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스승님아?"
"섣불리 나서지 마라. 우리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단 거다."
"그치만 로제리아 씨들도 멋진 노래를 선보였는데, 우리도 한 곡 부르는 게 공평하지 않겠나?"
"우리라, 그래. 카게히라. 네 말대로 우리는 우리의 노래를 선보여야지. 그렇지만 지금 우리에게 '우리 둘'만으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더냐?"
"그치만 내는 저번 리허설도 글쿠, 나즈나 형아 파트까지 다 연습해왔다 아이가."
"단순히 그렇게 결정할 게 아닌 것이다. 그럼 다시 물어보도록 하지. 우리에게 그 노래들을 부를 자격은 정녕 있는 것인가?"
"내한텐 자격이 없지만, 스승님한테는 자격이 있다 아이가. 스승님의 Valkyrie니까."
"그렇게 쉽게 끝났다면 좋았을 문제지. 안 되는 머리로 경솔하게 말하니까 네가 불출이라는 것이다."
단순한 제안에서 시작된 대화는 어느새 실랑이로 번졌다. 가벼워도 실랑이는 실랑이였고, 그나마 이 수준에서 머무르는 것도 대화의 주도권이 명백하게 한 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입에 담은 것은 언젠가는 말싸움을 해서라도 물 위로 올려야 할 문제였다. 세 사람이서 부르던 노래를 두 사람이서 그대로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둘이서 활동을 시작하겠다면서 그에 대한 대책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다시 일어설 수 없다. 슈도 미카도 그것만은 동의하고 있었다.
슬슬 과열될 듯한 분위기에 먼저 리허설을 제안한 린코가 어쩔 줄 몰라 말을 더듬고, 그 옆에서 연습하지 않을 거면 돌아가세요, 하고 사요가 일갈하는 와중에, 대화의 조각은 마치 유탄처럼 건너편에서 휴식을 취하던 자에게 튀었으니...
"그 노래를 부를 자격은 내게 있는 걸까?"
유키나는 어느새 연습실 벽에 축 늘어져 기대 있었다. 앉았다기보단 거의 누운 자세였다. 미카가 아코에게 건네줬던 사탕은 어느새 포장만 남아 유키나 주위에 나뒹굴고 있었고, 유키나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기를 계속했다. 가끔 고민이 깊어지거나 안 풀리는 게 있을 때면 으레 드러나는 유키나의 버릇이었다.
"린린! 이거 봐! 유키나 씨가 내가 맡겼던 사탕, 전부 먹어버렸어..."
"유키나, 갑자기 또 저 상태가 되었네. 당이 떨어져서 그런가? 유키나가 이래서야 바로 연습은 힘들겠는걸."
때맞춰 리사와 아코가 유키나를 가리키며 린코와 사요를 불렀다. 잘 끼어들었다기에는 조금 애매한 타이밍이었지만, 밴드의 기둥인 미나토 유키나가 유적에서 방금 출토된 석상처럼 연습실에 벌렁 드러누워 도통 움직이지 않는 광경은 Roselia로서 가만히 놔둘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자리를 비켜줄 명분은 충분히 되었다.
"그렇네요. 구심점인 미나토 씨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아서는 힘들겠죠. 오늘은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자율연습으로 갈까요?"
리사의 말에 슬슬 비켜줄 때인가, 하고 분위기를 읽은 사요는 멤버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악기들을 케이스에 도로 집어넣고 빌린 기재들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그 동안 리사는 가방에서 쿠키를 꺼내 유키나의 입에 넣어주었다. 단 내음과 바삭한 식감이 유키나를 제정신으로 돌려놓자, 리사는 유키나를 잘 타일러 일으켜세우고 사요를 뒤따라갔다. 이어서 드럼스틱을 캔뱃지를 가득 단 백팩에 꽂은 아코가 문 밖으로 나가 린코를 기다렸다. 린코는 키보드 케이스의 손잡이를 두 손에 꼭 잡고, 나가는 길에 뒤를 잠깐 돌아보고는,
"저... 두 분만의 소리... 두 사람이기 때문에 낼 수 있는 소리... 꼭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연습실에 남은 두 사람에게 그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아코를 따라 나갔다.
한 무리의 사람이 빠져나간 연습실은 휑했다. 미카는 스마트폰으로 '연습실은 쓸 수 있게 예약 양도 부탁드려놨어. 둘이 잘 해봐' 라는 리사의 메시지를 받은 참이었다. 슈는 그것을 눈짓으로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님아, 연습 계속 하까?"
아직 꽃샘추위가 기승이라 냉방보단 난방이 어울리는 실내온도도 시려오겠다, 슈는 집에서 늘 덮던 안심담요라도 있다면 뒤집어쓰고 싶었다. 줄곧 결함 없는 작품세계를 빌미로 외면해왔던 문제가, 고개만 돌리면 볼 수 있는 분홍색 코끼리가 되어 넓은 방 안에 어른거렸다. 뭐라도 해야 도태를 면할 수 있는 상황에서 주인 잃은 노래를 계속 부를 수는 없었다. 영감만 있으면 순식간에 악상을 자아낼 수 있었던 예술의 동료가 이럴 때는 부러웠다. 그 녀석도 마냥 속 편하게 사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는 새로운 것을 빠르게 찾고 선보일 수 있도록 준비가 갖춰져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슈 자신은 치기에 가까운 무모함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고,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을 위기 상황에서 굳이 또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실패에 데인 자국은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저를 침식해 놓았다. 자신의 예술관을 투영할 완벽한 뮤즈도 이제는 없다. 정확히는 자신이 쫓아버린 셈이었다.
"연습할 곡도 없는데 무슨 연습을 한단 말이냐."
어느새 전성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체념이 슈를 장악한 지 오래였다. 2년 남짓 활동해놓고 전성기를 논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지만. 그리고 이 멍청한 까마귀는 마음에 든 횃대라도 되는 듯이 제 옆에 붙어있다. 그게 거슬린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 것조차 체념의 증거 같아서 슈는 쓴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예술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실격인 자신을 빨리 떠나버리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미카가 슈의 곁에 있는 것도, 모종의 각오 때문일까. 방금 전 연습실을 장악하던 Roselia의 보컬이 했던 말을 떠올려본다. 그들은 각오가 있기 때문에 모인 사람이랬다.
"곡은 만들면 된데이."
슈의 절망을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미카는 단언을 입 밖에 냈다. 머리가 비어서 상황 파악을 못하는 게 아니라면, 그것도 각오가 서린 대답이었을까. 단지 저는 기억도 못하는 은혜 때문에 갈 곳 없이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미카의 말대로 둘이서 부를 수 있는 곡을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리드보컬이 빠져 균형이 무너진 상황에서 두 사람이서 무대를 해낼 수 있을까는 과중한 고민이었다. 미카가 그것까지 고민해봤으리라는 생각을 아주 안 한 건 아니지만, 폭군 리더로서 군림하면서 미카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 그는 여전히 고민을 혼자 떠안았다. 무대의 중심으로 삼고 있었던, 찬란한 최고 걸작의 빈 자리는 상상 이상으로 실감이 컸다. 그러나 그 자리를 떠나기로 결심한 그의 선택은 그가 슈의 앞에서 보인 최초이자 마지막 의사표현이었다. 그것을 존중해서라도 제 죄나 다름없는 과거에 의탁할 수는 없었다. 단연 무대에서 제일 빛나던 존재를 잃어버린 게 제 탓이라면, 빛나는 시절을 되찾을 자격조차도 이 실을 잃어버린 인형사에게는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우리가 찬란하던 시절을 되찾을 자격이 있는가, 그 확신이 없다는 게야."
쭉 슈를 바라보는 미카의 눈에 담긴 그는 옆모습인 채였다. 말하는 사람을 바라보지 않는 보랏빛의 두 눈에 담긴 시절은 여전히 황금빛의 기계장치로 가득한 세계였다. 한때 동경했던 먼 이국의 황금기처럼, 아름다운 복식과 발전사 아래로 잔혹한 착취의 역사가 아로새겨진 모순의 결정체. 그리워해선 안 될 시기에 갖는 향수를 떨쳐내지 못하는 미련. 그러고보면 지금은 없는 그도 말했었다. Valkyrie의 무대는 아무도 웃지 않는 무대라고. 스승님이 추구하는 예술은 대중의 즉각적인 반응에 의존하는 - 그는 아첨한다고 부르는 - 것은 아니었지만, 미카는 슈가 없는 곳에서 그 말을 퍽 진지하게 곱씹어왔다.
그렇다면.
무너져도 무너져도 다시 쌓을 수 있는 장난감 블럭으로 만든 세상이라면, 쌓는 사람과 무너뜨리는 사람의 구분 하나 없이 모두가 기쁘게 놀 수 있는 세상이라면 적어도 슬퍼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승님이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도, 누군가를 상처줄 필요도 없이 성립할 수 있는 예술세계. 그렇다면 다 함께 웃고, 다함께 꿈꿀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제 마음 속에 있는 장난감 상자가, 다시 일어선 제왕의 보물상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스승님아, 실은 내 오늘 청소 시간에 연습하면서 곡이랑 컨셉이랑 생각해놓은 게 있데이."
실패작이 만든 실패작 세계. 미카는 그것이 슈의 고상한 기호를 만족시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뭐라도 하는 건 안 하는 것보다 나았다. 슈는 그 말에 조금이라도 솔깃했던 듯 고개를 돌려 제대로 미카에게로 눈을 향했다.
"딱히 기대한 건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구경거리는 되겠구나. 너도 나와 함께 예술의 길을 걷겠다고 각오한 이상 그 작은 머리에 무엇도 안 들어있진 않을 테니 말이다."
정말로? 라고 미카가 입을 떼기가 무섭게 슈는 아까 벽 앞에서 관객석을 대신했던 접이식 의자들을 집어, 연습실 중앙이 잘 보이는 곳에 놓았다. 그러고는 스마트폰의 녹음 기능을 켜고 옆 의자에 두었다.
"서거라. 네 자리에."
미카는 슈의 말을 따라 연습실 가운데로 걸어갔다. 눈을 감고서, 다시 아까전에 떠올렸던 세계를 상상한다. 머릿속의 태엽을 감으면, 자신은 다시 한 번 실이 끊어진 인형에서 장난감 기차의 역장으로 변모한다. 실을 잃고 헤매는 인형사를 제 꿈이 만들어낸 세계로 인도한다. 즉흥으로 만들어낸 멜로디는 다시 부를 때는 구체화되어 그럴 듯한 가사 내용을 갖췄다. 노랫말은 실보다 더 확실하게 서로를 이어줄 수 있는 것이 되어갔다. 어느새 미카는 너울거리는 움직임으로 간이 객석의 앞까지 다가가, 슈의 한 손을 잡고서는,
"자, 스승님, 무대 위로 다시 가재이."
처음으로 무대 비슷한 것 위에서 환한 미소를 선보였다. 슈는 당황했지만, 어느새 홀린 듯이 미카의 손을 잡고 연습실 중앙으로 걸어나갔다. 미카의 노랫소리가 머릿속에서 선율로 재구성되었고, 미카 혼자서 떠올려낸 안무 속에서 놀랍게도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반 박자? 한 박자? 몇 초 늦었는가? 처음 들은 노래에 즉흥으로 임하는 안무는 조금씩 엇나갔고, 철저한 연습으로 빚어진 그의 신경이 이를 힐난하려 들었지만, 어느새 슈에겐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어졌다. 그는 미카가 막 그려내기 시작한 세계에 취해, 어느새 장난감 기차를 타고 상자 속 미지로 향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미카의 노랫소리도 안무의 마지막 시퀀스도 멎었을 때, 미카는 슈를 바라보며 물었다.
"스승님아, 내 어땠나?"
슈는 자기도 아까의 감각이 믿기지 않는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실패작이라고만 생각했던 아이에게서 이런 역량을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청소 시간에 짬을 내어 하는 연습에서 이런 걸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슈는 미카가 막연히 계획 없이 행동만 앞서는 줄 알았지만, 미카는 제 나름대로 비전을 가지고 어쩌면 슈보다 앞서서 무대를 생각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른 비전이다. 하지만 어쩌면 완벽을 가장한 결함투성이였던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려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앞길이 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은 미카와 '소통'을 하고 있었다. 실로 이어지지 않아도, 조종하는 인형사와 조종당하는 인형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제 뜻대로, 아니, 서로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방금 전의 고양감을 머리로 이해하려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 미카가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슈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내... 역시 이걸로는 안 되나?
"다음 무대는 결정되었다."
단호하게 슈는 미카에게 전했다. 그 말에 미카가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부른 곡은 녹음해 두었으니, 이를 실제 음원으로 곧 만들어오겠다. 너는 내게 구성을 짜서 내게 지도해다오."
"참말로? 스승님 다시 무대에 서 주는 기가? 그것도 내 곡으로?"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CiRCLE에서 열리는 페스에 우리는 참가한다. 지옥같은 학교의 대결 시스템은 없지만, 한낱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만 머무르는 녀석들보다는 수준있는 아티스트들이 참가하니 얕봐선 안 될 게야."
"와아! 스승님, 내 윽수로 기쁘데이! 우리 잘 해보자!"
미카는 너무 기뻐 그대로 슈를 끌어안았다. 그 행동에 또 무게중심을 잃을 것 같아 반사적으로 떨쳐내려 했지만, 오늘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슈는 느꼈다. 옛날, 조금이나마 그에게 상냥했던 시절처럼 슈는 미카의 머리로 손을 뻗어, 땀과 활발한 동작으로 엉망이 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게 기분이 좋아 미카는 슈의 어깨에 함박웃음 가득한 제 뺨을 비볐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미카는 몸을 떼고는 다시 연습을 선보이겠다며 슈의 앞에서 안무를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슈는 가방의 노트를 꺼내 미카의 모습을 하나하나 기록하기 시작했다. 오래되어 녹슨 톱니바퀴가 다시 굴러가면서 시간의 흐름을 알렸다. 과거를 마냥 답습하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계승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같은 시각, 유키나는 자기 방 침대에 누워 고양이 모양 쿠션을 꼭 끌어안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침대 시트에는 사탕 포장이 열댓 개는 널브러져 있었다. 귀에 낀 헤드셋에서는 몇 번이고, 아버지가 남긴 노래가 반복재생되고 있었다. 침대 옆 책상에 둔 스마트폰이 간헐적으로 진동하고, 그때마다 뜬 화면에는 리사나 아코, 사요가 보낸 메시지들의 알림이 밀려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Louder, you're my everything, 빛나 흘러넘치는..."
무심코 노래가사를 흥얼거린다. 들을 대로 들어서 가사는 외웠지만, 그 가사의 뜻을 제대로 이해했는가는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알기 힘든 말이 섞인 가사도 아니었는데, 그 마음가짐에 자신을 합치시킬 수가 없었다고 유키나는 쭉 믿어왔다. 가슴이 답답했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추워서 닫은 창문조차도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 너머에는 아버지와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함께해온 소꿉친구, 리사가 있을 것이다. 리사라면 유키나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을까. 처음 LOUDER의 악보와 음원을 들고 모였을 때, 리사는 말했었다. 유키나가 음악을 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이면, 노래의 뜻이 전해질 거라고. 생각할 수록 답답한 마음에 한 줄기 뜨끈한 것이 밀려들어와, 유키나는 고양이 쿠션을 안은 품에 꾸욱 하고 힘을 주었다.
아, 노래를 부르고 싶다. 이대로 있으면 너무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홧김에 유키나는 벌떡 일어서, 창문을 열고 온 힘을 다해 내질렀다.
"LOUDER YOU'RE MY EVERYTHING! 빛나 흘러넘치는! 당신의 소리가 내 소리로 TRY TO 전하고 싶어!"
발성을 신경쓰지도 않은, 그저 되는대로 막 내지른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유키나는 왠지 묵은 마음의 부담이 한 층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리사도, 아버지도 들었을지도 모른다. 음 하나하나에 각오를 짜넣어 부르던 때와는 다른 단순무식한 행동에 그들은 실망했을까? 그래도 유키나는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지금의 심정이 마냥 싫지 않았다. 자격이고 뭐고 이 때만큼은 잊어버리고, 원하는 만큼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유키나, 밥 다 됐다."
그 때 방 바깥에서 유키나를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키나는 밀려오는 무안함을 견디며 묵묵히 방을 나서서 식탁에 앉았다. 어머니가 출장을 나가서 모처럼 둘이서만 먹는 밥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노래구나. 10년도 더 되었을 때의 노래를 웬일로 네가 부를 줄이야."
"벽장에서 찾았어."
유키나는 저와 닮은 금색의 눈동자를 애써 피했다. 한때는 무대 위에서 열정이 불타던 황금빛 눈에는, 지금은 인자한 양육자의 시각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 눈을 유키나는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겠다면서 실력을 쌓아왔지만, 여전히 그 명성에 걸맞지 못한 자신 때문에 면목이 없었다. 지금 그 심정을 털어놓으면 아버지는 뭐라고 말할까. 유키나는 깨작깨작 밥상에 젓가락을 놀리며 먹는 둥 마는 둥 하다 입을 열었다.
"이 곡을 발견하자마자, 따라부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전율했어. 아버지는 이런 멋진 노래를 불렀구나, 하고. 그래서 나도 이 노래를 부르고 싶었어. 그렇지만 내가 과연 아버지만큼 이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을까 확신이 안 섰어. 나는 아직... 각오가 부족하니까."
유키나의 아버지는 잠시동안 유키나의 말을 경청하더니, 단 한 마디로 그의 해답을 정리했다.
"그러면 망설이지 말고 부르거라."
그 말에 유키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간단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처럼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음악에 임할 수가..."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마음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란다. 유키나가 하고 있는 고민들을 노래에 담아내어 표현하고 싶다는 그 마음. 그것만 있으면 돼."
"그래도 아버지에겐 아버지만의 뜻이 있잖아. 나는 그걸 따라갈 수 없을 거야."
"유키나에게는 음악을 마주하는 유키나만의 생각이 있지? 그거면 돼. 어떤 생각이라도 괜찮으니까, 한번 부딪쳐 보렴."
자신의 생각. 유키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완벽한 노래를 구사하려는 생각에 휘말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의 의지가 있다는 데조차 생각이 닿지 않았던 것이었다.
"비록 그게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닿지 못한, 미완성의 곡이 되더라도 괜찮아?"
"음악에 미완성이란 개념은 없어. 스스로에게 한계를 정하지 말거라. 완벽해지고자 하는 네 고민과 꾸준한 연습... 그 마음은 내게도 잘 전해지고 있단다. 그 순수한 생각만큼은 인정할 수 있어. 그러니까 아까처럼 원하는 만큼 소리지르고 연주하거라. 내 노래가 아닌, 미나토 유키나의 노래를."
해답은 너무나도 간단한 곳에 있었다. 유키나가 처음 벽장을 열고 악보를 발견했을 때처럼. 이 노래를 부르고 싶다며 악보를 쥐고, 음원이 든 CD를 가지고 연습실에 동료들을 불렀을 때처럼. 표현하고 싶다, 노래하고 싶다는 마음에 이끌려 그저 순수하게 임하면 되는 것이었다. 번뜩, 하고 눈 안쪽에서 전구가 켜지는 듯했다.
"아버지, 고마워. 잠깐만 볼일 좀 보고 올게."
유키나는 반도 먹지 않은 밥을 내버려두고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 뒷 모습을 아버지는 그저 미소지으며 지켜볼 뿐이었다. 유키나는 당장에 밀린 알림들을 확인하고는 리사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유키나?"
"리사. 나는 그 곡을 부를 거야."
"유키나? 무슨 일이 있었어?"
"너도, 아버지도 그렇게 말했어. 내가 음악을 하는 순수한 마음만 있다면 괜찮다고."
"어?"
"중요한 건 노래를 부를 자격도, 아버지와 완전히 같아지는 것도 아니야. 고마워, 리사. 덕분에 조금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됐어."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걸. 유키나가 도움이 필요하면 곁에 있어주는 게 친구인 내 일이니까. 그보다 유키나... 아까 목소리 엄청 우렁찼어."
"드, 들은 거야? 리사?"
"옆집이니까 당연히 들리지. 아, 이상했다거나 그런 건 아냐. 오히려 힘차서 멋있었어. 유키나가 그 곡으로 고민하고 있던 차에 이렇게 속 시원하게 소리를 내는 거 처음 들어봤거든."
"그, 그렇구나. 응. 알겠어. 좀 있으면 Roselia 단체 방에도 연락할 거야. 다음 페스의 세트리스트에는 LOUDER를 넣을 거라고."
"그래, 잘 생각했어. 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줘. 지금 과자 가져다줄까? 오늘은 연습 일찍 끝나서 남은 것도 많은데."
"아니, 괜찮아. 지금은 조금 집중할 시간을 줘."
"알았어. 끊을게."
전화를 끊고 유키나는 Roselia의 단체 대화방을 켜서 공지를 올렸다. 세트리스트의 마지막 곡에는 아버지의 역작에서 Roselia의 새 비전이 된 곡의 이름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키나 씨 왔다! LOUDER 왔다!'
'미나토 씨가 기운을 차려서 다행이네요. 그 곡이 없으면 세트리스트가 잘 맞지 않을 것 같았어요.'
'다섯이라서 낼 수 있는 소리 함께 내 봅시다'
유키나가 공지를 올리자마자 대화방에는 나머지 멤버들의 메시지가 즉각 올라왔다. 모두가 유키나의 결정을 응원하고 있었다.
'변경사항이 있을 예정이야. 원곡 대신 아코가 어레인지해온 드럼 리프를 쓸 거야. 그리고 키보드 파트는 린코가 제시한 샘플음을 좀 넣어볼 거고. 그 외에도 어레인지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올려줘. 이번엔 우리들의 노래를 만들어보자.'
그 말을 올리는 순간 유키나는 세상에서 제일 자유로워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눈을 꼭 감으면 머릿속에는 명확한 이미지가 그려졌다. 새장 속에 앉아, 누군가의 그림자 속에서 노래를 부르던 자신. 그러나 우렁차게 내지르는 목소리가 새장을 깨트리고, 그 한가운데에 자유로워진 제 모습이 우뚝 서 있다. 더 크게, 더 힘차게. 자신의 음악 세계를 이루던 근간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소화해낼 수 있었다. 과거의 영광을 계승하는, 그러나 완전히 같지 않은 새로운 영광이 곧 라이브하우스의 무대 위에 찾아올 것만 같았다.
페스 당일, 대기실에서는 여러 그룹들이 모여 악기며 의상을 차려놓고 무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몇 번 거듭한 리허설을 통해 갈고 닦은 실력이, 드디어 빛을 볼 날이었다. 푸른 깃털 장식이 수놓은 드레스를 차려입고 유키나는 아, 아, 하고 가볍게 발성을 체크했다. 옆에서는 리사가 사요의 메이크업을 도와주고 있었다.
"이마이 씨, 평소에도 이렇게 화장하고 다니나요?"
"우리 학교는 너희 학교보단 교칙이 느슨하거든. 그래서 귀걸이도 하고 다닐 수 있어."
"말도 안 돼, 사실은 그냥 학주랑 선도부 눈치 볼 뿐이잖습니까. 그리고 귀를 뚫으면 아프고 감염에도 쉽게 노출이 되어요. 잠깐 하고 말 장식을 위해 그런 리스크를 지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사요는 귀걸이가 아니라 귀찌잖아."
장난끼 가득하게 웃으며 사요의 눈 화장을 해주는 리사 옆에서는, 아코와 린코가 휴대용 게임기를 들고서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으으! 또 소재 안 나왔잖아. 어제도 10번은 돌았는데 물욕센서 작작 좀..."
"아코쨩... 혹시 어제 연습하고 남는 시간에 게임 한다고 안 잔 건 아니지?"
"그, 그건... 아코, 너무 들떠서 좀처럼 잠들 수가 없었거든."
"우다가와 씨, 시로카네 씨, 곧 우리 차례니까 게임은 적당히 합시다."
"사요, 고개 움직이지 마. 아이라인이 흐트러지잖아."
조금 왁자지껄해진 Roselia도 나쁘지 않구나, 하고 유키나는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무대의 컨셉인 '새장을 깨고 나오는 파랑새'에 맞춰, 린코가 직접 만들어준 푸른 깃털 드레스를 다섯명이 똑같이 차려입고 있었다. 이 통일감이 유키나는 꽤나 즐거웠다. 시간을 확인하려고 대기실 벽의 시계 쪽으로 몸을 기울이면, 익숙한 얼굴의 남성 둘이 장난감 병정 같은 알록달록한 제복을 입고서 서로의 화장과 옷매무새를 다듬어주고 있었다. 원래도 저런 이미지였나? 리허설을 할 때 입었던 복장이나, 얼핏 전해들은 모습은 좀 더 무겁고 가라앉은 고딕풍의 옷차림이었다. 어떤 변덕이 있었는가 떠올려보니, 전에 연습실에서 둘이 했던 대화가 생각났다. 아마 그 해답을 찾은 결과겠지.
"카게히라, 가만히 있거라. 화장이 흐트러지지 않는가."
"응아앗, 그치만 내 너무 들떠가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겠데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대화를 건너편의 두 사람도 주고받고 있었다. 원하는대로 미카는 장난감 기차의 역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미카는 피부에 닿는 화장 브러시가 간지러워 몸을 배배 꼬았다. 그 앞에서 장난감 병정으로 분장한 슈가 한숨을 쉬면, 그 시야에 하얀 스타킹 위에 무릎보다 짧은 기장의 반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디자인한 옷이지만 생각 이상으로 잘 어울려서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스승님아, 옷 마음에 드나보네."
"다, 당연한 것이다. 이 내가 네게 선사한 옷이니."
"근데 아까부터 스승님 계속 내 다리만 쳐다보고 있데이. 혹시 스타킹 올 나간 거 있나? 아니면 바짓단 박음질 잘못했나?"
"농! 그럴 리가 없다는 게야! 나는 그저 네가 옷을 제대로 안 입었을까봐 걱정되었을 뿐인 거다."
자신의 시선이 어디서 왔는지 의식하려는 제 머리를 애써 멈추며 슈는 툴툴거렸다. 그러는 얼굴이 조금 빨갰다. 미카는 그 행동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이렇게 생기있는 스승님의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 게 그저 좋아서 이내 풀린 얼굴로 웃었다. 겉으로는 또다시 작은 실랑이를 벌일 것만 같아도, 둘은 이내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올 수 있었다. 두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곡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기대가 무엇보다 컸기 때문이었다.
"그쪽도 결국 답을 찾은 모양이네."
둘 다 준비가 다 끝나 자리에서 일어설 때쯤, 유키나가 말을 걸어왔다.
"앗, 미나토 유키나 씨? 선배? 이마쨩 친구분? 이다. 안녕하세요."
"너도 좀 더 마음이 편해진 듯해보이는군."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기로 결정했을 뿐이야. 내가 음악을 하게 된 이유인 사람이 물려준, 오래된 노래가 있었어."
"그렇군. 우리는 부르고 싶은 노래가 없었기에 만들기로 했다. 그것이 옛 기억에 내가 표할 수 있는 최대의 예의였으니."
"신곡이구나, 이번엔 제대로 라이브가 아니면 용서 안 할 줄 알아."
"칫, 그 정도 성의는 기본인 것이다."
"응아아앗, 스승님이랑 미나토 씨, 또 어려운 이야기 하고 있데이."
셋이서 이야기하고 있으면 마찬가지로 준비를 마친 리사와 아코도 유키나의 옆으로 달려왔다.
"유키나, 나도 준비 끝났어. 어, 미카, 오늘은 쌩쌩해보이네?"
"앗, 미카 씨다! 오늘 페스에 나오기로 했네요. 천공의 눈과 마물의 팔을 가진 이계의 동지끼리 잘해봐요!"
"이마쨩이랑 앗쨩도 오늘 나오는구마. 반갑데이."
그렇게 Roselia와 Valkyrie 두 그룹은 대기실에 모여서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며 차례를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자 라이브하우스의 스태프가 Valkyrie의 두 사람을 찾아와 순서가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슈와 미카는 마지막으로 서로를 마주보고는, 대기실을 나서 무대 위로 올라섰다. 그 뒷모습을 유키나와 리사가 바라보고 있었다.
"쟤네들 의외로 사이 좋았네."
"그러게."
"다행이야."
"다행인가? 저 사람들, 애정 때문에 다시 와해되어버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있을까?"
"유키나? 뭔가 신경쓰이는 거라도 있어?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연습실에서 봤을 때보단 잘 된 거 같은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리사는 미카가 슈의 옆에서 웃는 얼굴로 무대에 나서는 광경을 보니 안도감이 들었다. 시종일관 그림자에 휩싸인 것 같은 느낌이었던 그가, 조금이나마 빛을 찾아 날개짓한 것만 같았다. 그것은 자신이 유키나를 지켜봤을 때와도 비슷하지만, 근본은 다른 감각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가 닮은 쪽이라면 유키나보다도...
"아, 시작한다. 유키나 씨, 리사 언니! 여기 앉아서 같이 봐요." 하지만 그 생각을 마치기 전에 대기실의 모니터에는 두 사람의 무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Valkyrie의 두 사람이 선 무대의 객석은 웅성거렸다. 활동을 중지한 줄만 알았던 인기 아이돌이 라이브하우스에 복귀한다는 것만으로도 입소문은 충분히 탔었다. 그 자리에는 세 사람이던 시절부터 팬이었던 사람들이며, 라이브하우스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지하 아이돌들을 눈여겨보는 매니아층도 있었다. 두 사람이서 해낼 수 있을까, 프로로 뛰던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는 거야말로 '떨어진' 것이 아닌가, 그런 반신반의로 웅성이는 관객석은 무대의 막이 오르고 조명이 켜지는 순간 멎었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인형의 언어가 전해진다. 부드러운 저음이 나지막하게 고하는 말은 어느 언어도 아닌, 아마도 미지의 행선지의 이름. 태엽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땅에 놓인 장난감 기차가 둥글게 늘어선 레일을 타고 달리기 시작하고, 그 가운데에서 장난감 기차의 역장이 동작의 태를 갖춰간다. 리버브를 적당히 두른 드럼 루프에 맞춰 현악기와 뮤직박스의 소리가 어우러지기 시작하다, 어느새 그 속도가 빨라지면서 조명이 밝아진다. 활기로 가득하지만 태엽 장난감다운 절도가 갖춰진 움직임으로, 미카는 오색찬란한 조명 아래에서 기차 레일을 끼고 돌며 춤췄다.
미카를 따라가던 조명은 건너편의 기차역에 의자 대신 놓인 커다란 알파벳 블록 위에 앉아 조는 장난감 병정을 비췄다. 미카가 그의 뒤로 가서 태엽을 감는 시늉을 하자, 슈도 그에 맞춰 일어나서는 미카에게 경례를 했다. 어색하게 과장된 동작으로 걷기 시작하는 그의 손을 미카가 잡아끌며 웃었다. 손을 잡고 마주보면서 둘은 몇 번이고 돌고, 노랫소리로 만들어낸 장난감 세계를 일주하며 무대 위를 노녔다. 과거에는 절대 무대 위에서 보이지 않았던 웃음을 마음껏 지으며, 실이 아닌 마주잡은 손으로 둘은 장난감의 언어를 계속 나누어 불렀다.
무대장치가 몇 번의 정착역을 거치고 노래의 클라이막스에 도달하자, 두 사람의 등 뒤로 블록으로 쌓은 삐뚤빼뚤한 시계탑이 종착역이 되어 우뚝 섰다. 그 앞에서 손을 놓지 않고 빈 손으로 객석에 손짓하며 말하는 노랫말은 명백한 조어였지만, 신의 노여움으로 갈라져버린 인간의 언어를 다시 한데 모으는 공용어와도 같이 따뜻했다. 그들은 처음으로 소통의 소중함을 깨달아, 그 기쁨을 무대 위에서 전했다.
노래가 끝나고 둘이 예의 갖춰 인사를 건네자, 관객석이 술렁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관객들은 고민하는 눈치였다. 소통을 거부하고 관객석을 압도하여 입다물게 하던 격식 높고 오만한 유닛. 여태까지의 Valkyrie에 대한 인식은 그랬다. 하지만 그들은 처음으로 관객들을 향해 말을 전했다. 진공에 내던져지는 소리가 아니라, 제대로 누군가에게 닿는 소리를 부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독특한 무대장치와 안무는 타협하지 않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 때, 관객석에서 하나둘씩 박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박수와 호응은 객석 전역으로 퍼져나가, 그들의 새로운 시도를 색안경 끼고 볼 수밖에 없었던 올드팬들의 자리에서까지도 함성이 들려왔다. 옛날의 모습과는 달랐지만, 그들은 분명 해답을 찾았다. 무대에 서는 기쁨을 오랜만에 찾은 두 사람은 차례가 끝나고도 오랫동안 객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대를 끝마치고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에, 처음으로 슈는 미카에게 부정도 이중부정도 아닌 말을 건넸다.
"잘 했다, 카게히라."
미카는 그 말에 대답할 마땅한 표정을 몰랐지만, 대기실 안에서도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가슴이 뭉클해져, 눈물이 고일 것 같은 눈을 소매로 닦고는 한껏 웃어보였다. 스승님이 다시 일어서서 내는 참말로 기쁘데이, 그 말 뒤에는 처음으로 자신이 세운 무대가 인정받는 기쁨 역시도 있었다.
"잘 하고 왔어. 뭐 좀 마실래? 과자도 갖고 왔는데."
대기실로 돌아온 두 사람에게 리사가 스포츠 드링크와 쿠키를 건넸다. 과자에 눈을 빛내며 미카가 과자를 집으려 하자, 슈는 리사가 건넨 먹을거리들을 밀어냈다.
"사양하지. 남이 주는 걸 함부로 먹었다가 카게히라가 탈이라도 나면 어쩌겠느냐."
"으, 응아아, 스승님아, 사람이 성의를 주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제. 이, 이렇게 스승님이 남이 주는 건 먹지 말라 캐서. 마음만은 고맙데이?"
"아, 하하, 괜찮아. 땅콩 알러지나 그런 거 있을 수도 있으니까 신경쓰는 것도 이해해."
"리사, 먹기 싫다는 사람한텐 안 줘도 돼."
"별 건 아냐. 그냥 수고했다는 의미였어."
유키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리사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라니까, 속으로 되뇌이면서. 이래저래 고민도 많아보이고 공감하는 심정도 있어서 답을 찾는 길은 거들어주고 싶었지만, 아직 저쪽의 꼬장꼬장한 리더가 완전히 마음에 들지만은 않는 유키나였다.
"저, 두 사람의 소리... 제대로 찾으셨어요. 다행... 이에요..."
"필사적이 되면 뭐라도 손대게 되는 법이지. 충고는 고맙군. 그나저나 의상은 직접 만든 건가? 상당히 능숙한 솜씨인 게야."
"새로운 시작 축하드려요! 아코, 앞으로도 자주 무대 볼게요."
"응아앗, 고맙데이! 로제리아도 화이팅이다."
그래도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간에, 멤버들끼리는 꽤나 친목을 쌓은 모양이었다. 특히 리사와 아코는 미카와 어느새 친밀감을 쌓은 모양이고, 린코도 어지간한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슈와 대화를 여차저차 이어나갈 수 있었다. 사요는 이 모든 것에 관심이 없었기에, 홀로 기타에 클립 튜너를 끼우고 기타 소리를 손보고 있었지만. 친구놀이는 필요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유키나도 타인의 인간관계에 일일히 간섭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소란은 그만. 다음은 우리 차례죠? 어서 악기 챙겨서 세팅하고 실전에 임하자고요."
"사요 선생님 말씀 잘 들었지? 다들 멋진 노래 보여주자고!"
스태프가 차례를 알리기도 전에 Roselia의 다섯은 악기를 챙기고 일어서서 무대로 나섰다. 케이스에서 꺼낸 베이스를 둘러맨 리사는 유키나의 손을 꼭 잡고 유키나의 귀에 속삭였다.
"유키나, 잊지 마. 유키나의 순수한 마음."
유키나는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서, 전장을 향하듯이 무대에 올랐다.
첫 세 곡은 익숙한 세트리스트였다. 라이브하우스에서 Roselia를 계속 지켜봤다면 익숙할 곡들. 그럼에도 무대를 장악하는 박력은 몇 번을 들어도 쇠하지 않았다. 초연한 듯이 기타에 몰두하는 고고한 기타리스트 히카와 사요, 무대 위에선 호전성으로까지 보이는 웃음을 만면에 띈 채 이따금 큰 동작으로 주목을 끄는 베이시스트 이마이 리사, 시종일관 두둥, 파방, 하는 소리를 터뜨려내며 꾸준히 소리의 박력을 유지하는 우다가와 아코, 다채로운 신스 샘플과 현란한 연주로 귀를 즐겁게 하는 시로카네 린코, 그리고 이 모든 소리에 힘입어 각오를 거친 목소리에 담아내는 미나토 유키나. 그들의 무대는 언제나처럼, 그리고 언제나보다 뜨거웠다.
그리고 마침내, 오랫동안 벽장에 잠들어있었던 그 곡을 연주할 차례가 되었다. 유키나가 마이크를 든 손을 위로 치켜들자 무대의 조명이 암전되었다. 그리고 잠시간의 정적이 지속되더니, 끓어오르는 듯한 기타 속주와 함께 조명이 다시 켜졌다.
황금빛의 새장 속을 조명이 비추자, 그 안의 그네에 파랑새를 닮은 유키나가 앉아있었다. 힘찬 기타와 신시사이저의 소리와는 대비되는 다른 무기력함을 연기하며 그네에 다소곳하게 앉았던 유키나는, 첫 소절이 끝나자마자 점점 동작의 박력을 되찾아갔다. 자신을 가둔 새장 세트의 철창살을 손 끝으로 훑으며 새장 안을 돌다가, 나가고 싶다는 열망을 표현하듯 쥐고 흔들었다.
관객석에서는 10년 전의 익숙한 멜로디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아, 혹은 어, 하는 소리도 몇 번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카피만은 아니었다. 기억하는 그 곡들과 다른 부분이 생동감을 더한 것이다. 인디즈를 사로잡았던 옛 밴드의 역사를 되살려내는 이들에게 순식간에 주목이 쏠렸다. 연주가 잠시 잠잠해지는 구간, 유키나의 주변으로 조명이 켜지면서 차례로 악기를 연주하던 멤버들의 모습이 드러나고, 고요함 속에 드럼과 기타의 기습이 들어가 후렴구로 이어지는 순간, 유키나는 강하게 목소리를 터뜨려냈다. 굉음이라도 들은 것처럼 세트장의 철창살이 내려가고, 날개와 같이 교차한 푸른 조명이 유키나를 비췄다. 두 팔을 벌리고 유키나는 자유에 벅차 노래했다. 자신을 사로잡았던 그림자 속에서, 자신이 찾던 것이 실은 자기 가슴 속에 늘 있었음을 깨달은 파랑새는 가슴 가득한 열망을 토해낸다.
완벽도 완성도 아닌, 그 때의 소리와는 다른 새로운 역작이 그 자리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무대를 마친 유키나는 쏟아지는 박수갈채를 뒤로한 채 눈을 꼭 감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렇게나 많은 호응 속에는 아버지의 곡이 드디어 빛을 본 것 같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유키나는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의 모양을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아버지의 명예를 되살리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노래를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이 무대에서 그것을 얻어가는 것으로 Roselia는 한층 더 정점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이 동료들과, 이 마음가짐을 가지고 언제까지나 나아가자고 유키나는 각오를 다졌다.
Roselia는 노래를 마치자마자 대기실로 들어갔다. 곡의 여운 이외의 사적인 감정은 무대에 드러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평소 엄격함 이외를 찾아볼 수 없었던 유키나의 얼굴에 홀가분한 미소가 드리운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었다. 평소에 무표정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너도 해답을 찾고 돌아온 건가?" 슈가 유키나에게 물었다.
"그렇네. 우리 둘이 도달한 답은 다른 것 같지만 말야."
"누군가는 과거와의 단절을 꾀하고, 누군가는 과거를 이어가지만, 결국 그 속에 있는 건..."
"우리들 자신이지. 자신을 잃지 않고, 내가 전하고 싶은 걸 전한다. 뭐, 그것 정도가 비슷한 점이겠지."
여전히 본인들 외에는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는 두 리더를, 그 측근들이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둘 다 비슷한 타입의 사람에게 호감을 품은 건 아닌가, 그런 추측이 서로 오갔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유키나도 여전하네."
"스승님도 여전하구마. 아, 아까 스승님 때문에 미안하데이. 내는 과자 못 무도, 대신에 사탕 줄게."
"그렇게까진 안 해도 돼. 아, 혹시 유당불내증이나 알러지 있어?"
"그... 그거는 아닌데, 쪼까... 내, 먹을 거를... 좀 가린데이. 막 탄 거나 그런 거 아니고 잘 만든 건 못 묵는다."
"흐-음, 그러면 안 돼. 탈 나니까 좀 더 좋은 걸 먹으라고."
"그치만 스승님이 먹지 말라고 해서..."
"너희 스승님도 신경써주고 있지만, 다짜고짜 안 먹기만 해서는 몸이 안 자란다?"
"내는 안 자라도 상관 없다."
그 말에 리사는 별달리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마음 속으로 헤아리며, 미카에게 짙게 깔린 그림자의 근원을 섣불리 추측하지 않으려 할 뿐이었다. 여전히, 마냥 평탄대로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 그들이었다.
"맞아요, 미카 씨, 혹시 NFO 하세요?"
"아코쨩... 모든 사람들이 우리처럼 게임에 인생을 갈아넣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도 돼..."
"엔에프오? 그거, 옆반 아들이 자주 하는 그거? 내는 안 하지만 울 학교에 게임연구부도 있고 암튼 하는 아들은 있데이."
그래도 한 가지 고비를 넘으면 조금씩 희망이 싹트기 마련이고, 언젠가는 그것도 기적을 피워낼 수 있으리라고, 그들은 조금씩 믿고 달려나간다.
과거의 과오를 짊어졌던 인형사는 실을 자르는 연습을, 누군가의 그림자 속에 자신을 가두던 가희는 새장에서 나오는 연습을.
그리고 앞으로도 여러 교차점도 비탈길도 건너, 정점에 핀 푸른 장미가 보일 때까지, 고고한 그들의 여정은 계속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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