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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 사탕통/코튼 캔디

로오히 엘리트 플로렌스의 크롬과 자이라에 대한 소고

by 료밍 2020. 12. 17.

'동등함'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바라본 엘리트 플로렌스의 크롬과 자이라에 관한 소고. 로드 오브 히어로즈 엘리트 플로렌스 스토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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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3세의 정책이 바뀌면서 자이라도 크롬도 노말, 하드에서 우리가 알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지요. 빛자이라 티저가 공개되었을 때, 자이라가 기사단장으로써 플로렌스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된 이후에는 오히려 체제를 수호하는 모습이 되지 않을까, 혹은 그런 인물이라면 플로렌스의 프로파간다로 이용되지 않을 리가 없다, 등의 추측이 많았었는데, 실제로 엘리트 스토리의 자이라, 그리고 크롬은 카를 3세의 정책을 위한 프로파간다로서 적극적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노예와 이종족들에게도 기회를 주겠다는 언뜻 '공평해 보이는' 카를 3세의 정책에는 노예 출신의 인재이자 귀족보다 유능한 기사단장 자이라가 필수적이고, 크롬 역시도 가문을 등지면서까지 왕을 수호한 애국자로서 귀족 견제의 도구가 되지요. 자이라는 얼핏 명예롭고 안정되어 보이며, 크롬은 많이 지쳐 보입니다.

카를 3세가 귀족을 견제하고 사회적 마이너리티에게 신경쓰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그가 성군이 아니라는 것은 작중에서 계속 언급이 됩니다. 로드와 카를 3세의 정치적 견해에 대한 내용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지만, 정작 카를 3세의 변화 속에서도 우리는 그의 믿음에 한계가 있음을 눈치채고, 그의 권력지향적이며 시혜적인 면모에 머리를 짚을 수밖에 없지요. 오히려 그는 하드 스토리에서 크롬이 주장해오던 실력주의로 체제 안에서 개혁을 꾀하려는 것의 한계를 직접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플로렌스의 이야기는 그저 한계점만을 보여주고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은 이야기인가? 하면,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실마리는 크롬과 자이라 두 사람간의 관계에 있다고 저는 생각하네요.
불합리한 체제에 맞서려 했고 분노를 표현할 줄 알았던 크롬과 자이라가 아니라, 플로렌스의 프로파간다 아이콘이 되어버린 두 사람이? 그런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싸울 필요가 없어진 두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자이라는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이 자리함으로써, 분노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고, 아래에 있는 자들을 사리사욕을 위해 부리는 귀족을 향해 자신의 분노를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카를 3세의 왕권을 수호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크롬은 과거 플로렌스에서의 '조금 나이브하지만 눈 맑은 이상주의자'의 모습을 잃고, 카를 3세의 명에 (모종의 울분 역시 품으며) 이끌려다니는 닳고 닳은 인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 많은 것들 안에서도 두 사람의 본질, 크롬의 강직하고 고뇌하는 면모와 자이라의 정의롭고 사람을 헤아릴 줄 아는 면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플로렌스라는 국가의 정치적 맥락 속이 아니라 그저 두 사람이서 서로를 마주할 때 나타납니다. 플로렌스 안에서 두 사람의 방향은 바뀌었을지언정, 서로간의 소통은 과거 스토리들에 존재한 오해 없이 오히려 말끔하게까지 보이지요. 크롬은 자이라에게 처음부터 경어를 쓰고 있고요.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바로 크롬과 자이라의 위치가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동등함 속에서 두 사람의 미덕은 제일 크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나 싶네요. 플로렌스가, 왕권의 수호라는 대의명분이 그들에게 준 권력보다도 훨씬 값진 명예는 둘이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를 바라봐서 생기는 이해와 소통이었다고 봅니다.
하드에서 보였던 크롬과 자이라의 관계는 엘리트에서 역전되어 있습니다. 신분에 의한 장벽이 사라졌기 때문에, 크롬보다 훨씬 '우수한' 실력을 가진 것으로 판명난 자이라는 크롬을 이기고 기사단장의 자리에 오릅니다. 하드에서 자이라가 크롬에 대해 품었던 갈 곳 없는 답답함은, 이번에는 열등감의 형태로 크롬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실력주의적 등용의 맹점, '뛰어나지 않은 사람은?' 에 대한 대답이 크롬에게 필요할 시간이 오게 됩니다. 오히려 뛰어난 자이라와 덜 뛰어난 크롬 사이에 또다른 격차가 생겼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지요. 그러나, 그의 대답은 자이라의 앞에서 스스로가 가진 열등감과 여러 불안감을 고해하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크롬은 자이라의 앞에서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약한 부분들을 전부 밝힙니다. 긍지 높은 기사가 아니라, 지치고 고뇌로 얼룩진 크롬 레디오스로서요. 하지만 카를 3세에게 이끌려다니며 '애국자 귀족' 행세를 할 때의 지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자이라의 앞에서만큼은 그는 편하고, 또 정직하고 올곧게 말합니다. 정치적 도구가 아니라 사람으로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자이라 역시도 크롬을 헤아립니다. 그것은 얼핏 '높으신 분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아랫사람'의 입장의 것인마냥 서술되지만, 크롬의 앞에서 그것은 그저 '인간에 대한 이해심'입니다. 두 사람의 고결함과 미덕은 둘만 있을 때, 어떠한 가리는 것 없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그 둘 사이에서 서로의 격차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동등함을 이룩했기 때문입니다.

엘리트 플로렌스의 스토리 안에서 제일 미시적이지만 명예로운 이 대화는 카를 3세의 마이너리티들을 수단으로 대하는 태도와 제일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않고 목적 그 자체로 대한다. 그 기본적인 것이 지켜지는가 지켜지지 않는가에 따라서 양쪽의 태도는 이렇게 다릅니다. 신분이나 실력에 의한 뛰어남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인간 그 자체로서 서로를 바라보는 그 동등한 상황이야말로 대답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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